산 너머 저녁
노을은 내 나이만큼
길게 늘어져 있다
인생이 달리는 차라면
나는 이제 시속 륙십킬로
바퀴는 돌고 돌아
어느덧 고개를 숙이고
뒤유리 너머 고향 하나
연기처럼 떠난다
신호는 이미 멎었고
정류장도 지나쳐 버렸다
더 이상 길을 찾지 않는다
그저 다가오는 어둠이
나를 데려가리라 믿는다
락엽이 우수수 날리는 날씨, 하늘에서는 철없는 비까지 내려 꽤 을씨년스럽다. 이맘때가 되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엄마를 떠나보내고 홀로 고달픈 인생을 걸어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서 마음이 아프다. 구질구질하게 지난날에 연연하며 아픈 상처까지 더듬어야 하는 게 씁쓸하지만 그래도 한때나마 마음의 위로가 될가 싶어 몇자 적어본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의젓하고 씩씩한 군인이셨고 전역 후에는 직장에서 생활하셨다. 하지만 워낙 힘든 세월이라 적은 월급에 의지하기보다는 남들처럼 농사를 짓는 편이 더 자유롭고 먹고사는 데도 나을 것 같아 자진해서 농촌으로 내려가셨다. 장애인이 된 몸으로 대대의 회계일과 가정 살림에 힘겨웠을 고달픈 생활, 세월이 흘러 동네 어른들께서 새어머니를 소개해 주셨을 때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계모의 눈치밥을 먹이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지금 돌아보면 그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속마음이 담겨 있었을가. 어쩌면 아버지는 애초에 부모라는 무거운 짐을 홀로 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셨는지도 모르겠다.
한국 서울의 화려한 별장 대문이 열리면서 80세가 넘어보이는 로인이 나타났다. 비록 걸음이 온당치 못하지만 후리후리한 키에 풍채가 름름한걸 보아서 젊었을 때는 영웅호걸이였을 것이다. 그 뒤를 따라 작은 강아지를 안은 중년녀인이 나왔다. 별장에서 멀지 않는 공원에서 녀인은 로인의 곁에서 걷고 로인은 수시로 한손으로 강아지를 쓰다듬어주었다. 산보가 끝나 별장으로 돌아갈 때까지 녀인은 강아지를 한번도 땅에 내려놓지 않고 그냥 안고 있었다. 그들을 본 주위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을 모르고 그저 강아지 안은 녀인아라 불렀다. 이렇게 로인과 강아지를 안은 녀인은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산보를 하면서 거의 8년이란 세월을 함께 했다. 어느날부터서인지 두 사람은 다시 공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하늘 향해 올곧게 선 멋진 큰 나무, 그 옆에 예쁜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였다.
어느 날부터였나, 나무는 가지를 길게 내려 작은 꽃잎을 건드렸다. 살짝살짝 들킬세라 조심조심, 꽃이 아파할세라…
“귀엽고 앙큼하고 달콤하고 아름답구나 꽃아 꽃아!” 작은 꽃은 큰 나무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혼잡한 먼지를 떠나 높은 언덕에 자리 잡고 고요함에 취하여 낮이면 막춤도 추고 노래도 맘껏 질렀는데… 나무가 있었구나. 부끄러운 나머지 “나무 너 입이 왜 그리 커, 날 삼킬 것 같아. 그러니 헤실헤실 웃지 마! 나무 너 소리 왜 그리 커, 하늘에 번개치는 줄 알겠다. 그러니 크게 웃지 마!”라고 앵돌아졌다. 나무는 제꺽 손으로 입을 가렸다.
서로는 언제 왔고 왜 왔는지 묻지 않았다. 고요한 시간 속에 둘은 알고 있었다. 억겁의 인연이란 걸…
어느 날, 거리에서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 서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수십년 세월이 젊은 시절의 풍모는 빼앗아갔지만 소탈하고 유머가 있는 성품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 순간 우리는 서로의 변화를 알아차리며 짧지만 진솔한 말들을 주고받았다.
나는 우리의 인사가 단순한 례의가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마음을 나누는 따뜻한 대화임을 느꼈다. 비록 각자의 길을 걸어왔지만 그 짧은 만남은 길가에 피여난 작은 꽃처럼 내 마음을 훈훈하게 적셔주었다.
보슬보슬 봄비가 내린다
젖줄기 받아 문 꽃나무
수유하는 소리 맛갈스럽다
사처에 봄의 눈망울
개구리눈처럼 불거졌다
장미꽃 나무는 파란 눈망울
개나리꽃 나무는 노란 눈망울
진달래꽃 나무는 빨간 눈망울
목련꽃 나무는 하얀 눈망울…
수묵산수 등불을 켠듯이 환해졌다
해마다 다시 만나는 봄인데
처음인듯 신기하게 바라보는 고운 눈망울
꽃샘바람에 씻은 고운 눈망울
복화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복이 없는 처녀였다. 원래는 부모가 복이 꽃처럼 피여나라고 ‘복화’라고 이름을 지었건만 시골에서 태여난데다 다병한 아버지때문에 초중을 졸업하고는 농사일에 나서야 했다.
3년간 농사일을 하다가 친구의 알선으로 A시에 가서 보모란 직업을 찾았다. 늙은 어머니가 스무아홉살 나는 아들과 함께 있는 집이였다. 아파트에서 사는 은행직원인 아들 성길이는 인물체격이 좋고 몸단장이 깔끔한데다 품위가 있어보였다. 그와 반대로 안로인은 성격이 퍼그나 괴벽했다. 하여 복화는 다른 집을 선택하려다가 마음을 무척 끄는 것이 있어 주춤하고 말았다. 그것은 객실에 놓인 책장이였다. 그 안에는 수많은 책들이 절서정연하게 꽂혀있었는데 워낙 학교 때부터 독서에 재미를 붙인 복화는 그 수두룩한 책을 보자 눈앞에 아롱진 세계가 펼쳐진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