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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강 물줄기 따라 피여난 꿈 - 불산의 가구인 김강철씨의 이야기

2026-11-06 12:42:03

사람의 인생은 때로 한줄기 강물과 같다. 잔잔하게 흐르다가도 바위를 만나면 물줄기를 바꾸고 좁은 골짜기를 지나 넓은 들판에 이르면 비로소 세상을 품는다. 불산에서 가구 사업을 일구며 조선족 기업인들의 든든한 리더로 불리우는 김강철(57세) 대표의 이야기도 그렇다. 

기자의 인터뷰를 받고 있는 김강철씨 

고향 길림성 영길현에서 태여나 군생활을 거치고 한국에서 땀 흘려 돈을 모으고 여러번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며 오늘의 자리에 섰다. 그의 삶에는 성공의 화려함보다 실패를 딛고 일어선 끈기와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 준 이웃들의 따뜻한 정이 더 진하게 배여 있다.

김강철씨는 송화강반 길림성 영길현의 한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공안국에서 어머니는 생산자료 회사에서 일했다. 아래로 남동생 하나가 있었고 그 시절만 해도 집안 형편은 비교적 넉넉한 편이였다. 영길현 강밀봉소학교와 영길현조선족중학교에서 초·중학교를 다녔고 길림조선족고급중학교를 마친 뒤 1987년, 열여덟 살의 나이로 군에 입대했다. 군 생활은 4년 규률과 책임 그리고 어떤 일이든 끝까지 해내는 힘을 배운 시간이였다. 제대 후 그는 길림시 량식국에 정식 직원으로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안정된 직장이였고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출발이였다.

그러나 세상은 늘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1995년 량식 계통이 불경기에 접어들면서 김강철씨의 마음에도 고민이 쌓였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가’ 그때 운 좋게 연수생으로 뽑혀 단위 업무를 정리한 뒤 비용 부담 없이 한국으로 출국할 수 있게 되였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 가려면 적지 않은 돈을 들여야 했으니 그는 정말 하늘에서 복이 떨어진 듯했다. 설렘과 두려움이 함께 밀려왔지만 젊은 그는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압록강변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불산시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단 일행

한국에 도착한 김강철씨는 처음 전자회사에 입사했다. 하지만 돈을 더 모으기 위해 노가다 현장으로 뛰여들었다. 고된 일에 몸이 지칠 때도 많았지만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한가지 마음으로 버텼다. 환률이 좋았던 시절이라 조금씩 돈을 남길 수 있었다. 1998년, 3년간의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그는 그동안 모은 돈을 투자해 길림시에서 식당업을 시작했다. 식당은 꽤 잘됐다. 개업 2년 만에 사업이 안정을 찾아갈 무렵 “광서 북해에서 무역을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이 찾아왔다. 2000년 그는 그 말에 마음이 흔들려 광서 북해로 향했다.

하지만 현실은 랭혹했다. 도착 후 4000원을 먼저 내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 그제야 자신이 다단계판매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미 돌아설 길이 없었다. 그렇게 1년반 동안 집을 세맡고 현지인들과 사귀고 술을 대접하고 소비하다보니 당시로서는 큰 돈인 5만원을 전부 탕진하고 말았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모든 것을 잃고 난 뒤였다. 2001년 하반기 그는  개혁개방의 1번지 심천으로 가서 부동산관리회사에 들어가 보안원으로 일했다. 밤낮이 뒤바뀌는 생활이였지만 그는 다시 일어설 발판을 찾고 있었다.

2002년 하반기에는 함께 일하던 친구와 각각 3만원을 투자해 북경으로 가서 의류공장을 세웠다. 그러나 상업 경험이 적었던 탓에 2003년 회사는 부도가 났고 그는 다시 길림으로 돌아왔다. 한국과 식당 일을 하며 모은 돈을 모두 잃은 그에게 세상은 잠시 어둡게만 보였다. 그때 사우나를 운영하던 친구가 그를 불러 월급을 주며 부사장 자리를 맡겼다. 그는 감사한 마음으로 일에 몰두했다. 사업은 비록 실패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는 남아 있었다. 그것이 그의 다음 인생을 열어 주는 씨앗이였다.

그 후 벽돌공장을 운영하던 한족 친구의 통역을 맡아 조선 라진으로 관광을 갔다가 국제관광이 호황을 누리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한족 친구가 200여만원을 투자하고 그도 옆에서 도왔다. 그후 여러가지 사정으로 함께 길림시로 돌아온 뒤에도 그는 벽돌공장을 운영하는 한족 친구를 조력하며 일했다. 민족이 달라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돕고 좋은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는 것이 그가 몸으로 배운 삶의 방식이였다. 이 경험은 후날 그가 불산에서 조선족과 한족 여러 민족 기업인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밑거름이 되였다.

2006년 3월 8일, 김강철씨는 광둥성으로 향했다. 동관의 한 한국인 가구공장에서 월급 1000원을 받는 잡공으로 일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닥치는 대로 일했다. 대리석 가공 일을 할 때는 모자와 얼굴 온몸에 대리석 먼지를 뒤집어쓰고 일했다. 숨 쉬기도 힘들었지만 그는 이를 악물었다. 3개월쯤 지났을 때 한국인 사장과 바이어들이 공장에 왔다. 통역이 없어 현장이 어수선해지자 김강철씨가 나서서 통역을 했다. 한국인 사장은 매우 만족해 그를 사무실로 불렀다. 그리고 물었다. “공장장을 할 수 있겠나?”

연길왕훙 '률형' 물류중심을 방문해 업무교류를 하고 있는 불산조선족기업가협회 연변방문단 일행.

김강철씨는 곧바로 반문했다. “공장장이 이미 건재해있는데 제가 가운데 끼여들면 안되지 않습니까?” 한국인 사장은 “원래 공장장은 능력이 없어 안되겠다. 그래서 한국어와 중국어를 모두 잘하는 자네를 쓰려는 것”이라고 했다. 김강철씨에게도 생각이 있었다. 원래 공장장은 능력은 부족해도 주변 사회관계가 있어 함부로 밀어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공장장을 맡는 대신 원래 공장장은 고문으로 두고 공장 일을 절반씩 나누어 맡기로 했다. 이는 상대를 배려하면서도 일은 제대로 해내는 지혜였다. 그는 열심히 공장 일을 뛰여다녔고 월급도 4000원으로 올랐다. 원래 공장장이 능력이 부족했기에 김강철씨가 대신 일을 도맡다싶이 했고 공장은 그의 노력으로 안정적으로 발전했다.

1년 후 김강철씨는 회사에 찾아온 한국 측 바이어들을 위해 제품검사원으로 일하고 있던 한살 아래의 연변 화룡 친구를 만났다. 가깝게 지내던 그 친구가 하는 일의 물량이 많아지자 그에게 함께 일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강철씨는 회사 공장장직에 사표를 냈다. 그의 생각은 달랐다. 공장장보다 제품검사원을 하면 더 많은 상품을 접촉하게 되여 업무 수준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였다. 회사 사장은 반대했지만 그는 일곱번이나 찾아가 설득한 끝에 동의를 받았다. 친구 회사에서 함께 대리석 제품검사원으로 일하게 되었고 월급도 1만원으로 올랐다. 기술도 익히고 경험도 쌓았다.

1년 후 친구는 그에게 “너도 이제 업무 수준이 올라갔으니 더 큰 곳에서 일해 보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다. 2008년 그는 전문 한국 바이어 검품사로 일하게 되었다. 이후 흑룡강 친구의 소개로 500여명이 일하는 한국 가구회사의 총경리로 일하게  매달 1만원의 월급을 받게 되였다. 한국 의자, 거실가구, 침대, 대리석 등을 아우르는 종합 가구공장이였다. 회사는 당시 경영이 어려워 부도 직전이었지만 가구 분야에서 일선부터 검사원까지 두루 경험한 김강철씨의 리력이 중요하게 인정받았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바이어들을 동원하며 부지런히 자신의 능력을 검증했다. 그러나 한국 본사가 부도가 난 탓에 회사는 오래 버티지 못했고 그의 혼자 힘으로는 력부족이였다. 결국 회사는 자금난에 빠졌고 손에 쥐고 있던 돈도 바닥이 났다.

김강철씨의 가족 

삶의 벼랑 끝에서 그는 안해와 낳은 지 두달밖에 안되는 아들을 데리고 2009년 말 불산으로 이사했다. 그때 동관에서 1년 전 술자리에서 만난 대리석 공장 사장인 한족 친구가 나섰다. 만난 지 오래지 않았지만 그는 김강철씨의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기며 발벗고 도왔다. 3개월치 집을 마련해 주고 불산에 있는 한국 가구회사의 검품사 자리도 얻게 해주었다. 한국 가구회사가 김강철씨를 선호한 리유는 검사원과 회사 대표를 두루 거친 그의 경험 때문이였다. 월급은 1만원에서 6000원으로 줄었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할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했다.

그는 다시 시작했다. 후에 그의 노력으로 매출이 오르면서 월급은 1만8000원까지 올랐다. 지금도 김강철씨와 그 한국인 사장은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며 업무상 서로 돕고 있다. 김강철씨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며 말한다. “술자리에서 만난 한족 친구가 제가 가장 어려울 때 자기 일처럼 발벗고 나서 주었기 때문에 그 당시 제가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는 그 한족 친구와 가족처럼 가깝게 지낸다. 민족이 다르고 만난 지 오래지 않았어도 진심으로 손을 내밀면 한가족이 된다는 것을 그는 삶으로 보여주고 있다.

2017년부터 김강철씨는 불산시헝전과학기술유한회사(佛山市享电科技有限公司)를 설립하고 그동안 쌓아 온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바이어들과 접촉하며  년 매출 4000만원에 달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휴대전화 충전 보조배터리 회사도 함께 운영한다. 그의 경영 리념은 단순하고도 단단하다. “성실과 신용으로 사업해야 하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화려한 말보다 한걸음 한걸음 쌓아 온 신뢰가 그의 가장 큰 자산이다. 그는 앞으로 자신의 제품을 전 세계에 진출시키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그 꿈은 결코 허황한것이 아니다. 수없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선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꿈이기 때문이다.

광동성조선족련합회 운동회에서 

현재 그는 불산시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이제는 자신의 사업도 중요하지만 회장으로서 불산에 거주하는 모든 조선족 기업인들을 도와 그들과 함께 성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앞으로 회사는 불산에서 사업하는 조선족 기업인들과 단결하여 불산 등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불산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적을 때는 5000여명, 많을 때는 80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는 앞으로 더 많은 회원사를 받아들여 함께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한사람의 성공이 아니라 모두가 손잡고 함께 잘사는 길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불산시조선족기업가협회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는 김강철씨  

김강철씨의 이야기는 한 개인의 성공담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 안에는 중화민족 공동체의식을 마음에 새기고 민족단결과 민족 화합을 삶으로 실천해 온 발자취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 준 한족 친구, 서로를 형제처럼 아끼는 한국인 사장, 함께 성장하기를 바라는 조선족 기업인들. 이 모든 인연이 모여 오늘의 김강철씨를 만들었다. 그는 말한다. “사업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어 주었기에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송화강 물줄기 따라 고향을 떠나 한국으로, 다시 광서와 심천, 북경으로, 그리고 동관과 불산으로 이어진 그의 인생 길이다. 그 길은 곧게 뻗은 고속도로가 아니라 굽이굽이 돌아가는 산길이였다. 그러나 그는 길을 잃을 때마다 다시 일어섰고 어려울 때마다 이웃의 따뜻한 손을 붙잡았다. 한그루 나무가 뿌리를 내리면 주변에 그늘이 생기고 그 그늘이 모여 숲을 이루듯 김강철씨는 이제 불산 땅에서 조선족 기업인들과 함께 더 큰 숲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의 다음 꿈은 자신의 제품을 세계로 내보내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이웃과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그 꿈의 끝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고 신뢰가 있고 민족단결의 따뜻한 온기가 있다.

/강빈 길림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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