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함께 아침 산책을 했다. 때는 화창한 봄철이라 황해바다로부터 불어오는 훈훈한 바람이 가슴을 부풀게 하고 한창 꽃망울을 터치기 시작한 진달래가 어서 오라 손짓한다.
산 정상에 올라 다리쉼을 하는데 최선생이 문뜩 “하루 생활에서 어느때가 기분이 제일 좋소?”라고 묻는다.
나의 옆에 앉은 박선생이 “거야 산책을 나와서 저 사품치는 바다구경을 할 때가 제일 좋지”라고 선코를 떼자 말없이 차를 마시던 강씨가 인차 “나는 친구들을 만나 술잔을 기울이면서 회포를 나눌 때가 기분이 가장 좋아”라고 말한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사진 한장을 꺼내 친구들에게 꺼내보이면서 “나는 아침마다 한복을 입고 찍은 이 가족사진을 볼 때가 가장 기쁘오”라고 말했다. 친구들은 귀가 솔깃하여 나와 아들 며느리 그리고 손자 손녀 다섯이 모두 한복을 입고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우리 가족사진을 번갈아보며 엄지척을 내밀었다. 나는 바다우에 훨훨 날아예는 갈매기를 바라보며 이 가족사진에 깃든 가족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주었다.
2003년, 아들이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려고 머나먼 프랑스로 장사길에 올랐다. 입은 옷은 물론 눈동자마저 새파랗게 다른 외국인들 속에서 몇년동안 비지땀을 흘리며 자리매김을 한 아들이 성탄절이 돌아올 때 어머니가 보고싶다며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표를 보내왔다. 내가 출발하기 전 아들은 전화로 “어머니, 여기엔 먹거리, 구경거리가 많으니 여기로 올 때 아무것도 사오지 마세요”라고 신신당부했다.
설날 아침, 아들 며느리는 상다리 부러지게 음식을 차려놓고 나를 밥상 중간에 앉으라고 했다. 내가 “잠깐만, 아들아, 이 한복을 모두 갈아입고 가족사진을 찍자”라고 말하면서 소중히 건사했던 한복 네벌을 아들, 며느리 앞에 내놓았다. 생각지도 못한 한복을 받아안은 아들과 며느리는 물론 철부지 손자, 손녀도 저으기 감동되여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아들, 며느리의 도움으로 산뜻한 한복을 갈아입은 손자, 손녀들은 너무도 좋아 퐁퐁 뛰면서 나의 품에 안겼다. 상다리 부러지게 차린 설음식, 비바람속에서 자리매김을 튼튼히 한 아들과 물쑥처럼 커가는 손군들을 바라보노라니 나의 눈굽이 축축이 젖어들었다.
처녀 때 연변의 편벽한 시골에서 자란 나는 약혼하고 결혼날자까지 받았으나 입고 갈 첫날옷을 갖추지 못하였다. 어머니는 첫날 신부는 생활이 아무리 어려워도 한복을 입어야 한다면서 돼지를 기르고 밤이면 가마니를 짜서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나에게 치마, 저고리를 갖추어주었다. 바느질 솜씨가 이만 저만이 아닌 어머니는 첫날옷을 양복점에 맡기지 않고 직접 만드셨다. 그리고 나에게 “자식들이 결혼할 때 반드시 한복을 입혀야 한다”며 옷감을 고르고 재단하고 바느질하는 방법을 상세히 알려주셨다. 오늘 자식들이 내가 밤을 패가며 만든 한복을 입고 저렇게도 좋아하니 내 마음이 왜서 설레이지 않으랴!
설날 아침, 우리 온집 식구는 프랑스의 수도 파리시장에 설구경을 갔다. 서방의 설명절 풍경은 중국과 판판 다르다. 거리 중심엔 성탄수가 우뚝 세워져 있고 폭죽소리 대신 요란한 악기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옷차림도 중국과 판판 달라 남자들은 양복을 입고 중절모를 썼으며 녀성들은 깔끔한 치마를 입었다. 아들 며느리와 손군들은 내 의견에 따라 모두 한복을 입고 거리 중심에 나선다. 두 눈이 새파란 외국인들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것처럼 욱- 모여와 우리들을 포위하고 옷차림을 구경하고 생김새를 뜯어보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어떤 로인들은 손군들의 옷차림과 행동에 매료되여 껴안고 사진을 찍고 춤을 추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한 기자는 슬그머니 나의 곁에 와서 “당신들은 어느 나라에서 왔소?”라고 물었다. 눈치 빠른 아들이 익숙한 영어로 “차이니즈 코리언(중국의 조선족)”이라고 대답하자 그들은 “오케이”하고 환성을 지르면서 손자를 머리우로 쳐들었다.
어느 나라이든 자기민족의 전통문화가 있다. 세상에 그 어떤 풍운이 일어나도 자기 민족의 전통문화를 전승하는 것은 어제의 일이 아닌 오늘과 래일의 사명이며 나와 너뿐이 아닌 우리 모두 앞에 놓여진 과업이라는 생각이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