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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노란 보자기 - 유미화

2026-09-03 12:17:19

어제 오후, 택배 기사님이 제법 묵직한 박스를 건네주셨다. 광주에서 왔다. 문학 선배님께서 보내주신 책들이다. 항상 책이 모자라 늘 선배님께 빌려보는 신세다. 박스 뚜껑을 열자 노란 보자기가 반듯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깨끗했다. 구김 하나 없이 모서리가 반듯한 정교하게 접힌 노란 보자기. 그 안에 책 열권이 단정히 들어 있었다. 보자기 매듭도 단단하고 예뻤다. 누군가 정성을 다해 싸매 놓은 손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그 노란 보자기를 보는 순간 가슴 한켠이 뭉클해졌다. 그리고 바로 아득히 먼 어린 시절로 건너가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적 시골집 우물가에는 늘 빨래줄에 널린 보자기들이 바람에 나붓겼다. 흰 보자기, 파란 보자기 그리고 이 노란 보자기처럼 연한 색의 보자기들. 그 보자기들은 단순한 천이 아니였다. 할머니가 손주에게 보내는 약초, 어머니가 시집간 딸에게 보내는 김치, 명절이면 고모가 보내온 과자와 엿가락... 귀한 것은 언제나 보자기에 싸여 왔다. 보자기에 싸여 오지 않는 것은 정말 귀한 것이 아니였다.

그때는 그게 당연했다. 물건을 싸는 일은 마음을 싸는 일이었다. 천의 결을 따라 조심조심 접고 매듭을 질 때는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내용물이 상하지 않도록 부드럽게. 그런 손길들이 모여 하나의 보자기가 완성되면 그 안에는 물건 이상의 정분이 배여들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우리는 모든 것을 비닐과 플라스틱과 뽁뽁이에 싸기 시작했다. 빠르게 효률적으로 튼튼하게. 그건 확실히 물건을 보호하는 데는 탁월했다. 하지만 그 포장을 뜯어내는 순간, 우리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쓰레기만 바라보아야 했다. 보자기라면 다음에 또 쓰고 다른 이를 위해 또 싸고 그렇게 마음을 이어갈 수 있었을 텐데.

노란 보자기 우에 차곡차곡 쌓인 책들을 꺼내며 나는 문득 내가 왜 이토록 문학에 마음이 뽑혔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은 말한다. 늘그막 사랑이 기둥뿌리를 뽑는다고. 나는 사랑때문에 기둥뿌리가 뽑힌 게 아니였다. 늦깎이 문학공부가 내 마음을 송두리째 뽑아버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기둥뿌리가 뽑히면 집은 무너져야 하는데 내 마음은 무너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단단해지고 있다. 뽑힌 자리에는 또 다른 뿌리가 내리고 그 뿌리는 책이라는 양분을 빨아들여 새로운 줄기를 틔우고 있다.

선배님은 나에게 책을 빌려주실 때마다 이렇게 싸 보내신다. 동네 서점에서 구하기 어려운 책은 직접 주문하시고 소중히 읽으셨던 책들은 깨끗이 닦아서. 그리고 반드시 보자기에 싸신다. 그것도 정성껏 반듯하게. 나는 책을 다 읽고 돌려드릴 때마다 같은 보자기에 다시 싸서 보낸다. 그렇게 우리의 보자기는 광주와 청도를 몇번이고 오간다.

그 속에는 책만 오가는 게 아니다. 서로의 마음이 오간다. 읽는 이의 설렘과 깨달음 빌려주는 이의 아낌과 격려. 그 모든 것들이 노란 보자기 결에 스며들어 있다.

오늘 밤, 나는 선배님께서 보내주신 책 중 한권을 꺼내 읽었다. 수필집이였다. 책상 우에는 아까 그 노란 보자기가 개켜져 있다. 나는 읽다가 잠시 고개를 들어 그 보자기를 바라본다. 노란빛이 책상 스탠드 불빛을 받아 은은하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문학공부는 가끔 외롭고 버겁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이 길이 내 길이 맞는지 의심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 순간, 누군가의 정성이 담긴 보자기를 풀어 책을 꺼내 읽을 때면 그 의심은 조금 누그러든다. 나 혼자 읽는 것이 아니다. 나를 믿고 책을 맡겨준 선배님의 마음, 그 책을 쓰기 위해 밤을 지샌 작가의 마음 그리고 먼 옛날 내가 처음 책이라는 것을 만지게 해주었던 어머니의 손길까지. 그 모든 마음들이 노란 보자기 속에서 숨 쉬고 있다.

나는 문득 이 노란 보자기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쓰는 글이 비록 서툴고 부족할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정성스레 싸 보내는 노란 보자기가 될 수 있기를. 읽는 이의 마음을 조용히 감싸주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가 상하지 않도록 단단히 지켜주는 그런 보자기같은 글이 되기를.

창밖에는 밤비가 내린다. 나는 다시 책으로 눈을 내린다. 노란 보자기는 여전히 책상우에서 은은한 빛을 내고 있다. 언젠가 이 책들을 다시 싸서 광주로 보낼 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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