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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질그릇 이야기 - 성송권

2026-09-11 14:10:08

민속촌에 갔다가 장독대 옆에 있는 물항아리, 화로, 물동이에 눈이 갔다. 한때는 귀한 대접을 받으며 한시도 한가한 날이 없던 물건들이 오늘은 이렇게 박물관에 편하게 놓여 사람들이 구경대상이 되였고 끝없는 추억을 불러오는 골동품이 되였다.

고향에서는 물 받아두는 물두멍을 물독 또는 물항아리라 불렀다. 지금도 나는 그렇게 부르고 있다. 그래야만 그를 둘러싼 기억들이 새록새록 솟아날 것 같다. 물독을 비롯한 질그릇들은 내 삶의 려정을 따라다닌 몇푼 안되는 물건들이다. 고향 부엌에 있다가 아빠트 베란다 지어는 주택 옥상에 옮겨 다녔다가 그 려정 중에 수도에 존재 가치를 빼앗겨서 지금은 이렇게 민속박물관에 조용히 엎드려 있다. 그들을 헹궈내고 채우고 닦던 손길도 곁을 떠난지 오래다.

내가 살던 고향은 땅밑에 석탄 매장량이 많은 곳이라 그 수질이 좋치 않았다. 한동네에서 길건너집의 펌프물은 두부를 앗을수 있고 길 아래집 펌프물은 두부가 안되였다. 그리하여 마을에서도 두개의 우물로 생활용수를 공급하는 일은 녀자들에게 큰 일감이였다. 그나마 물을 저장할수있는 큰 그릇이 있으면 한가할 때 물을 비축해둘 수 있어서 훨씬 수월했을 텐데 그런 그릇이 없어서 툭하면 물을 길어야만 했으니 그 수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명절이나 집안 행사가 있을 때는 더욱더 물을 저장할 용기가 아쉬웠다.

마을의 공동우물은 여러 집 공동용이여서 물 긷기가 여간 힘들었다. 그나마 그 우물은 깊어서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뜻한 감로수를 담고 있었다. 우물집 사람들의 인정도 샘물처럼 다디 달았다. 샘을 팔 때 도와주거나 드레박을 갈아준 적이 있었는지 모르나 겨을에는 드레박 물을 흘려 마당이 얼음장판이 됐고 여름에 비오는 날에도 물을 긷다보면 마당이 질척거리는 진흙탕이 되였다. 그래도 이웃에게 기꺼이 물을 맛보시라고 했다. 녀자들이 아침 일찍이나 저녁 늦게 남의 집에 들락거리며 펌프물을 길어들이는 것은 례에 금기였던 시절이였지만 물이 떨어져도 별로 눈치안보고 길어들일수 있어서 좋았다.

어머니는 진작부터 펌프타령이였다. 그것도 맏이인 큰 누나가 시집을 간 후 그 아래로 말짱 아들들이여서 물을 긷는 일은 녀자인 어머니 몫이여서 몹시 힘든 고욕이였다. 부엌 옆에 펌프가 있고 물을 저장할 수 있는 물독이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빠듯한 살림에 장만할 여력이 없었다.

부득이 한겨울에 목숨도 내건다는 탄광일에 아버지가 나섰고 어머니도 어린 형들을 데리고 가마니짜기에 동원됐다. 어머니는 숼새없이 가마니를 생산하였다. 그때의 가마니는 주로 곡식을 담는 가마니여서 탄탄히 질을 보장했어야 했는데 힘겨운 로동이였다. 가마니를 짜는 일도 일이지만 워나 새끼가 많이 드니 공급하는 일이 더 문제였다. 온 식구가 매달려야 했다. 어머니를 도와 나도 심부름을 부지런히 했다. 물을 흠뻑 머금은 집단을 커다란 나무망치로 두들겨서 나긋하게 만든다. 그런 다음 방바닥에 놓고서 꼬고 또 꼬아도 짚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한나절 꼬고 나면 손바닥이 얼얼해나고 새까맣게 된다. 또 그 손으로 화로재불에 묻었던 감자도 벗기고 김치도 집어먹군 했다.

어느해 봄, 부엌옆에 펌프를 박아 앉히고 고운 물독도 갖추어 놓았다. 마을에서 10여리 떨어진 향소재지 량수천자에서 석두하자 강이 흐르는 웃목에 오지공장이 있었는데 농민들은 일년내내 집에서 불 땐 나무재를 가마니에 정성들여 모았다가 소수레에 싣고가서 오지독이나 물독을 바꾸어 왔다. 물 네동이 남짓이 들어가는 아가리가 좀 넒고 키가 두자쯤은 되는 항아리였다. 우아하고 름름한 자태에 붉끄레한 옥처럼 반질반질한 유약을 올린것인데 흰 구름 무늬가 있었다. 한겨울에 짜낸 땀이 이뤄낸 부엌살림의 벽혁이였다. 아버지가 앞집 목수에게 부탁해 나무판자로 곱상한 뚜껑을 만들어 달고나니 내 눈에도 구색을 갖춘 부엌으로 비쳤다. 그후로 우리는 펌프로 지하수를 자아 올렸고 물독에는 항상 샘물이 넘쳤다. 흐뭇해 눈물을 글썽이던 어머니의 눈을 지금도 잊을수 없다.

그때 동네 누나들은 정수리에 놓인 똬바리우에 물동이를 이고 사뿐사뿐 걸으며 길게 땋은 머리를 치렁거렸다. 넘친 동이물이 동이 몸통을 타고 아래테에 달리면 한손으로 연신 물방울을 흠치곤 했다. 마당에 들어서며 한손으로 동이 쪽지를 잡고 한손으로 사립문을 당기며 집에 들어와 부엌 문지방을 넘어 물동이를 치켜들어 머리를 뒤로 빼고는 조심스레 물동이 입술을 물독 입술에 얹힐 때까지 천천히 밑으로 내렸다. 시골처녀의 몸은 한껏 뒤로 젖혀졌다.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그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다.

하얀 백토로 굽어낸 풍로는 점잖게 민속촌 진렬대에 놓여 있다. 고향사람들은 화로를 풍로라고도 불렀는데 나에게는 잊지 못할 한단락의 이야기가 있다.

륙십년대 내가 영호소학교를 다니던 어느 무더운 삼복철 여름이였다. 그때는 집집마다 저녁이면 화로불로 밥도 짓고 반찬도 볶고 하면서 남은 화로불에 모기태쑥을 태워 모기를 쫓았다.

그날 저녁에도 우리 조무래기들이 숨박꼭질 놀음에 꽁꽁숨어라 하면서 마당에서 장난질 하였다. 급한김에 내가 사고를 내고야 말았다. 화로에 걸려 넘어졌다. 짙은 쑥향기를 풍기며 타오르던 화로가 넘어지면서 두동각 났다. 그 당시 대부분 그릇은 사기 아니면 질그릇이 였다. 화로 역시 백토로 굽어낸 것이라 자칫하면 깨지기 일수였다. 아버지에게 혼쭐이 날 일을 생각하니 바들바들 떨렸다. 그때 저녁 설거지를 하시던 어머니가 나오셔서 어디 데지는 않았는지 나를 세워놓고 빙빙 돌리며 이리저리 살폈다. “그릇 깰라. 명심들 해라.” 입버릇처럼 매일 경고를 하셨어도 끝내는 일을 치고 말았다. 그때는 아버지가 동네 마실을 가고 없었다. 무서운 호통은 피할수 있었으나 사고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가 일단 아버지에게는 비밀로 하고 큰 형이 나서 쇠줄로 테를 동여맸다. 화로테두리에 철사테가 감기고 얼마간 계속 쓸 수 있었다. 무엇이나 귀했던 그때 그 시절 추억때문에 나는 은퇴후 고향을 자주 찾는다.

다시 볼 수 없는 질그릇들, 세월이 모든 걸 다 싣고 간 것 같다.

산자락에 불빛이 두리워진 날, 다시 고향을 찾아 억새꽃 한다발 들고 쉬염쉬염 걸어가 옛집에 앉아 막걸리 한잔 마시며 지난 이야기를 펼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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