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외아들 하나를 장가보내고 세간을 내여 준 뒤 홀가분하게 독립시켰다. 그리고 중풍으로 몸이 불편해진 어머니를 모시고 살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십여년이 훌쩍 지났다.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여 하루라도 탈없이 무사하기를 몸과 마음으로 약속하며 나날을 보내는 모녀가 되였다.
모녀 사이는 세상에서 가장 허물없고 믿을 수 있는 관계라지만 나는 어머니 앞에서만큼은 말을 삼가고 또 삼간다. 상처가 될 말은 아예 생각조차 말아야 하고 가끔 어머니가 불편해할 때 애가 나서 내뱉으려는 소리도 어머니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목구멍으로 삼키고 불편함은 속으로 접어버린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필경 어머니이다. 십여년 넘게 앓고 있는 자신을 애써 간호하는 딸의 팔자가 늘 마음에 걸려 자주 같은 말을 내뱉곤 한다.
"영실아, 좋은 사람 만나 시집을 가라."
그럴 때면 왜 하필 그런 말을 하실까 하고 생각해본다. 어머니 곁을 떠날 수 없는 내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도 하시는 말이다. 실현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하시는 그 말이, 어머니가 나에게 남기는 따뜻한 사랑임을 안다. 어머니는 전처럼 내가 남편과 함께 웃으며 사는 모습을 희미한 의식속에서도 그려보며 하시는 말씀이다. 자기 곁을 떠나지 않고 손발이 되여 간호하는 나를 더 붙잡고 싶지만 또 하루빨리 하늘나라로 가서 나를 놓아주고 싶은 마음의 여실한 고백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어머니, 어떻슴둥?" 하고 안부를 묻는 말조차 감히 꺼내지 못했다. 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집에서 같이 살면서도 몇번이나 망설여졌다. 어머니의 숨소리를 가까이서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어쩌면 그 짧은 한마디를 건네는 일조차 조심스러운 일이 되여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사십여년 전, 내가 스물넷이 되던 해에도 어머니는 나를 조용히 불러 앉혀 놓고 말씀하셨다.
"시집도 때가 있는 법이다.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말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 말에 나는 결혼을 했다. 사업도 안정적이고 학력도 좋고 인물도 훤칠한 남자였다. 가정을 꾸리고 아들을 낳으며 평범한 행복이 시작되는 듯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남편은 백혈병 판정을 받았고 우리는 국내 유명 병원을 전전하며 집 네채를 다 팔아 치료비를 마련했건만 결국 남편을 구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사위의 죽음을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셨다.
"내가 먼저 가야 하는데, 젊은 사람이 먼저 가다니……"
남편의 장례식 날, 어머니의 손수건은 눈물로 흠뻑 젖었다.
어머니 역시 서른일곱살에 남편을 잃고 다섯 남매를 홀로 키우셨다.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아버지의 몫까지 혼자 짊어진 채 살아오셨다. 그래서인지 늘 자식들에게만은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셨다. 중년에 배우자를 잃는 삶이 얼마나 억울하고 힘겨운지 몸으로 겪어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런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자식에게 생의 진액을 다 빼주고 속이 텅 빈 나무처럼 말이다. 갑자기 쓰러진 어머니는 다섯 자식가운데 그래도 둘째 딸인 나를 선택해 우리 집으로 오셨다. 리유는 두가지였다. 내가 소학교 때 학교가다 돌에 걸려 넘어져 허벅지뼈를 다쳐 절뚝거리게 되자 어머니는 "낳을 때는 정상아이였는데 왜 절름발이로 살아가게 해야 하는가"라며 체념하지 못하셨다. 그래서 나를 업고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천진골과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 마음에는 아픈 자식이 첫째다. 다리를 다쳐 아팠던 나, 그런 나를 업고 다닌 만리길, 결혼하여 남편을 잃고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나, 그런 나를 동무해 주고 싶어 우리 집으로 오셨다. 그렇게 함께 살면서도 어머니는 틈만 나면 같은 말을 하셨다.
"영실아, 가정에는 남편이 할 일과 녀자가 할 일이 따로 있다. 너는 지금 그걸 다 혼자 하고 있구나. 그러다 너도 나처럼 쓰러진다."
몇해 전 봄, 마당의 산포도를 전지하러 남자를 불렀다. 그가 일을 마치고 방에 들어와 어머니께 인사를 했다.
"어머니, 효녀 따님을 두셔서 든든하시겠습니다."
어머니는 굳은 혀로 또렷이 답하지는 못했지만 눈가에 조용히 미소가 어렸다. 수도가 막히거나 보일러가 고장 나 남자들의 손길이 집에 머물다 가는 날이면 어머니는 그 뒤모습을 오래 바라보시고는 늘 같은 말을 남기셨다.
"그래도 남편은 있어야 한다."
코로나를 기적처럼 이겨낸 어머니는 이제 말을 거의 하지 못한다. 나더러 시집가라던 그 목소리도 더는 들을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사무치게 그립다.
어머니는 남편을 잃고 륙십년을 혼자 사셨고 나는 쉰다섯에 남편을 잃고 어머니와 함께 십여년을 살고 있다. 딸에게 시집을 가라던 그 말은 어쩌면 자신의 고단했던 인생을 딸에게만은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마지막 기도였을 것이다. 남자 몫까지 도맡아 살며 지쳐 쓰러질까 봐 밤마다 속으로 삼켰던 걱정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절대 시집갈 생각이 없다. 있어도 안 되는 일이다. 그것이 딸로서의 마지막 례의라고 생각한다.
오늘 아침, 창문을 여니 해살이 거실 바닥에 고요히 내려앉아 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손을 쥐고 나는 오래 그 빛을 바라본다.
사람의 인생이란 끝내 자기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강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평생 남편 없이 아이들을 건너편으로 떠밀며 살았고 나는 남편 없이 늙은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이쪽 언덕에 서 있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같은 외로움을 건너온 셈이다.
어머니가 내게 시집을 가라던 말은 새 삶을 살라는 재촉이 아니라 혼자가 되지 말라는 당부였을 것이다. 견디는 법이 아니라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 기대여 사는 것이 삶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데 더 도움이 된다는 리치를 알고 가르쳐 주신 것이였다.
이제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할 의식이 모두 사라진 오늘 아침에도 어머니의 조용한 얼굴을 들여다보면 어머니는 그냥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영실아, 수고했다. 이제 어머니를 놓고 어서 시집을 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