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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강신문 > 동포

연길조선족민속원 모래판우에 새겨진 씨름의 숨결

2026-09-08 11:04:23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74주년 경축 씨름대회 연길에서 

연길의 9월은 유난히도 길다. 아침 해살이 민속원의 푸른 기와장 우에 닿자 오래된 대청마루가 반짝이며 온기를 뱉어낸다. 

이곳은 중국조선족민속원이다. 해마다 가을이면 전통 씨름의 함성이 흙먼지를 일으키는 곳이다. 올해는 특히나 뜻깊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74주년을 경축하는 제14회 민족식 씨름 대회가 펼쳐진 것이다.

9월 3일, 경기장은 아침부터 북적였다. 할아버지들의 긴 담배대 연기와 아이들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뒤섞이고 엄마들은 아이들의 샅바를 다시 매듭지으며 “허리를 낮추라”는 주문을 쉬지 않는다. 선수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연길, 도문, 룡정, 왕청, 화룡, 안도, 훈춘 그리고 할빈과 길림, 장춘에서까지 10개 대표팀이 기발을 들고 입장했다. 저마다의 고장 색갈을 입은 선수들은 긴장과 기대를 얼굴에 새기고 씨름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씨름대회를 위해 다져진 모래판우에서 가을볕이 내리쬐자 텁텁한 향이 올랐다. 심판의 호각이 울리고 첫 경기가 시작된다. 소학교 체급은 11개나 되였다. 아직 키가 크지 않은 꼬마 선수들이 샅바를 붙잡고 엉거주춤 자세를 잡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관중석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은 이미 투사였다. 몸을 낮추고 상대의 중심을 읽으며 한걸음 한걸음 원을 그린다. 갑자기 작은 몸집이 날쌔게 돌며 다리를 걸자 상대가 그대로 넘어갔다.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저 어린 나이에 이미 씨름의 ‘흐름’을 아는 것이다.

중학교부는 더욱 치렬했다. 사춘기의 탄력 있는 몸이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했다. 특히 녀자 중학생부의 두 체급 경기는 시선을 사로잡았다. 샅바를 맨 소녀들이 허리를 숙이고 서로를 견제하는 모습은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한폭의 그림 같았다. 그중 한 소녀는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채로 미소를 잃지 않았고 넘어질 때마다 벌떡 일어나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 집념에 관중들은 더 큰 함성을 보냈다.

한낮이 되자 성인부 경기가 시작되였다. 몸집이 우람한 장정들이 샅바를 감고 모래판에 오르면 땅이 울렸다. 62kg 이하급에서는 연길시의 김광준이 유려한 발놀림으로 상대를 제압했고 도문시의 리지훈과 왕청의 김준희가 그 뒤를 이었다. 87kg 이하급에서는 화룡시의 박성환이 압도적인 힘으로 우승을 차지했고 룡정시의 허성룡과 왕청현의 리지성이 아쉽게 패했다. 

그러나 진짜 감동은 그다음이였다. 바로 로년조 경기였다. 50세 이상 경기는 할빈에서 온 리충산(66세)과 송태일(63세), 길림의 김충국(61세)과 리성보(59세)씨다. 그들이 씨름판에 오르는 순간 관중석이 술렁였다. 그들의 등에는 구부정한 로년의 곡선이 있었지만 샅바를 감는 손끝은 여전히 정확했다. 첫 경기, 리충산씨가 상대의 샅바를 잡고 느릿하게 원을 그리다가 갑자기 허리를 낮추며 밀어붙였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은 50년 전, 소년 시절 처음 씨름판에 섰던 그날의 그것이였다. 흙먼지가 일고 상대가 넘어졌다. 관중석에서 터져 나온 함성은 그를 향한 찬사이자 지난 청춘 못지 않은 녹쓸지 않은 기량에 대한 평가였다. 경기 후 그는 숨을 헐떡이며 웃었다. “이 맛에 사는 거지.” 그 말에 모두가 다시 한번 박수를 쳤다.

해가 기울 무렵 마지막 결승전이 펼쳐졌다. 성인부 87kg 이상급, 룡정시의 유택군과 최지성의 맞대결이였다. 두 선수는 같은 고향에서 온 동지이자 라이벌이였다. 샅바를 잡고 마주 선 그들의 눈빛에는 승부를 넘어선 존경이 담겨 있었다. 

심판의 호르래기 소리와 함께 긴 정적속에 관중들은 숨을 죽였다. 유택군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오른발을 살짝 뒤로 빼며 상대의 중심을 흔들었고 최지성이 그에 반응해 몸을 낮췄다. 그 찰나 유택군의 왼다리가 번개처럼 상대의 오른쪽 다리를 걸어채며 온몸을 돌렸다. ‘돌려치기’였다. 최지성이 허공에서 한바퀴 돌아 모래판 바닥에 나자빠졌다. 동시에 함성이 민속원 하늘을 가르고 심판의 팔이 유택군을 가리켰다.

승리였다. 유택군은 두 팔을 들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땀과 모래가 뒤섞여 반짝였다. 전통에 따라 그는 우승의 상징인 황소 한마리를 넘겨받았다. 누런 털이 해빛에 윤이 나는 황소의 목에는 붉은 꽃 띠가 둘러져 있었다. 유택군이 그 띠를 잡고 황소를 끌고 경기장을 한바퀴 돌았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관중들은 손을 내밀어 그를 축하했고 아이들은 황소를 따라 뛰며 환호했다. 이 순간은 74년 전 자치주가 설립된 그날의 함성과도 겹쳐 보였다.

경기 후 유택군은 인터뷰에서 눈시울을 붉혔다. “자치주 창립 74주년 경축일에 우승하게 되여 영광입니다. 이 황소는 저만의 것이 아니라 연변의 모든 씨름군들의 것입니다. 래년 전국소수민족전통체육운동회에서 반드시 금메달을 따내 연변의 이름을 빛내겠습니다.” 그의 말에 주변의 선수와 코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변성주청소년체육구락부의 리설봉 대표는 “이번 대회를 통해 연변주내의 많은 학교와 청소년들이 씨름의 매력을 느꼈으면 합니다. 전통은 우리가 지켜야 할 뿌리니까요.”라고 덧붙였다.

씨름판이 자취를 감출 무렵 민속원에는 민간 악단의 가야금과 장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관중들은 아직 자리를 뜨지 못하고 오늘의 명장면을 되새기며 수군거렸다. 로년조 할아버지들의 투혼, 소녀 선수의 눈물, 유택군의 황소 행진—그 모든 것이 가을 하늘 아래 하나의 이야기로 엮였다.

연변의 74주년은 이 모래판 우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씨름은 단지 상대를 넘어뜨리는 기술이 아니였다. 그것은 땅을 딛고 서서 자신의 무게를 견디며 상대의 힘을 읽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삶의 철학이였다. 이 날의 함성과 땀방울은 앞으로도 수많은 가을을 거쳐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연변이라는 땅의 뜨거운 숨결로 전해질 것이다.

/강빈 길림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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