黑龙江日报朝文版
国内统一刊号: CN23-0019  邮发代号: 13-26
흑룡강신문 > 동포

체육사업에 기여한 이 조선족 ‘체육가족’을 아십니까

2026-07-22 15:15:15

축구 경기장에서의 두 형제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여 우리나라 축구계에는 많은 출중한 축구건아들이 용솟음쳐 나왔다. 그 속에서도 조선민족의 축구영웅들은 중국의 축구사업에 마멸할 수 없는 공헌을 하였다.

그 영웅들 속에 축구명장 두 형제가 있었다. 그들은 바로 걸출한 축구명장 '아시아 최우수공격수' '국가축구건장' 리주철씨(동생)와 중화인민화국 체육운동위원회에서 시상한 '신중국체육개척자' 영예를 받아안은 리주찬씨(형)이다. 

1943년생인 리주철은 어려서부터 뽈차기를 무척 즐기였다. 그는 흔히 혼자서도 훈련하기를 즐기였는데 중학시절 오후 하학시간이 되면 운동장에 달려가 공을 높이 차고는 달려가서 축구공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되받아차는 훈련을 하였다. 이 장면을 구경하는 사생들은 감탄의 환성을 금치 못했으며 그를 '운동장의 은제비'로 비유하였다. 

1963년 계림중학교에서 참군하여 심양공군부대 독립 18퇀 고사포련 1포병으로 근무하였다. 한번은 사단부에서 열린 운동대회에서 그의 재주를 발견한 심양공군부대 축구팀에서 데려갔다. 

이듬해 북경에서 열린 '전국 공군부대축구대회'에서 리주철이 소속한 축구팀이 전반전에 골을 세개나 먹었다. 당시 감독은 리주철의 축구기술에 료해가 적었던지 전반전에 리주철을 내보내지 않았다. 급해난 주철씨는 련속 감독에게 후반전에는 내보내달라고 청들었다. 감독은 마지못해 리주철을 출전시켰다. 후반전에 리주철이 올라가자마자 혼자서 골 두개나 터뜨려 감독도 눈이 휘둥그래졌다. 심양공군부대팀은 그번 대회에서 1등은 하지 못했어도 리주철은 여섯경기에서 홀로 골 여덟개를 몰아넣어 인기가 제일 높은 선수로 소문이 났다.

그자리에서 ‘전국공군부대팀’에서 축구경기장의 '보배'를 빼앗다싶이 하여 심양공군 축구팀은 아쉬운대로 리주철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리주철은 축구를 체계적으로 배우지는 못했어도 타고난 볼재주와 피타는 자신의 노력으로 다른 선수들보다 특이한 축구기술을 장악하게 되였다. 일반적인 경우에 축구선수들은 경기장에서 공을 잡으면 속도가 늦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리주철 선수는 공을 잡으면 가속도가 생기면서 원속도보다 더욱 빨리 달리는 특수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 세기 70년대에는 전국 축구팬들이 가장 선호하는 축구선수로 되였다. 1970년대 말 리주철은 국가팀에 입선되여 7번 운동복을 입고 우익 공격수로 맹활약하였다.

당시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주임으로 활약하다 퇴직한 윤봉현 선생님은 “텔레비전이 보급되지 않은 그 시기에 주로 방송으로 국제국내축구경기를 생방송하였지요. 국제경기나 국내경기가 있을 때마다 리주철 선수가 축구선수들과 함께 북경 로동자 체육장에 나타나기만 하면 관중들은 일제히 일어나 '리주철! 리주철!'하면서 뜨거운 박수를 보내군 하였습니다”라고 했다.

제7회 아시안게임과 제6회 아시안컵에서 리주철 선수를 핵심으로 한 국가팀은 뛰여난 성적을 올려 중국팀에 신심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특히 그번 대회에서 리주철 선수는 그의 뛰여난 축구기교를 보여주어 유독 그만이 ‘아시아 최우수 공격수’ 라는 칭호를 받았다. 일본팀과의 치렬한 대결에서 경기가 시작된 20분만에 리주철은 홀로 공을 몰고 이악스레 련속 달려드는 수명의 일본팀 방어수를 요리조리 따돌리고 박스안에서 강슛을 날려 승부를 결정하는 관건적인 골을 넣어 소조 2등을 하는데 기여했다.

그는 국제시합에도 자주 참가하였다. 한번은 알바니야에 가서 시합하는 도중 갑자기 맹장염이 발작하여 수술을 받게 되였는데 그 소식을 들은 주은래 총리가 친히 위문 전화를 해왔다.

매년마다 열리는 년말 국빈연회에 두번 초청을 받아서 참여하였는데 국가지도자들의 친절한 접견을 받는 영예를 지녔다.

축구운동을 한없이 사랑한 그는 전업후 계속 축구 운동원 양성에 주력했다. '8.1 소년팀' 감독, '8.1팀' 감독으로 지내며 많은 우수한 축구 운동원을 키워냈다.

그의 업적에 대해 중화인민화국 체육운동위원회로부터 리주철 선수에게 '중화인민공화국 최우수 선수’ ‘축구건장’등 많은 칭호를 수여하였다.

리주철 명장은 2002년 57세에 중국국가팀 총감독으로 임명받은 날 갑자기 찾아온 뇌혈전으로 북경에서 별세하였다. 그의 시신은 중앙 유관부문의 지시에 따라 팔보산 혁명묘지에 안장하였다.

1939년생인 리주찬은 학교때부터 뽈차기를 잘하여 '뽈매지’라고 소문났다. 축구장에서 뛰는 속도가 빠르고 공 다스리는 기술이 능란하여 체육선생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1957년 목릉중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도에 흑룡강 축구팀에 선발되여 전문선수로 되였다. 제1기로부터 제3기까지 흑룡강성 축구팀으로 전국운동대회에 참여하였는데 매번마다 두 형제는 축구장에서 만나게 되였다. 

“축구경기에서는 부자간에도 한치의 양보도 없다”는 말이 있다. 두 형제는 자기의 팀을 위해 추호의 양보도 없이 경기를 진행하곤 하였다. 한차례의 경기에서 일곱개의 골이 났는데 그중 다섯개는 두 형제가 넣었다. 형 주찬이가 세개를 넣었고 동생 주철이가 두개를 넣어 당시 축구계의 미담으로 전해졌다.

1985년 중화인민공화국 체육운동위원회에서 시상한 ‘신중국 체육 개척자’ 증서와 메달을 수여받았다. 

그뒤로 흑룡강성 축구팀 감독원직무를 맞고 퇴직할 때까지 축구사업에 헌신하였다.

2001년 중국 조선족 축구 원로들이 축구팀을 조직하여 한국 인천광역시에 ‘친선방문 축구 교환경기’를 떠났다. 63세의 리주찬이 대머리에 뚱뚱한 몸집으로 축구장에 나설때 “와”하고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저렇게 뚱뚱한 배를 가지고 어떻게 뽈을 차느냐!”면서 야단법석이였다.

그런데 생각밖으로 여섯경기에서 매경기마다 리주찬이 날렵한 몸짓과 숙련된 기술로 멋들어지게 골을 넣자 관중들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다. 경기가 끝나고 많은 관중들이 리주찬에게 엄지를 내보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995년 리주철이 휴가를 맡아 두 형제가 고향으로 친척방문을 오게 되였다. 이 소식을 알게 된 계동현 령도들은 열렬히 환영하는 의미에서 '전현 축구경기'를 개최하였다. 전현의 각 촌에서 축구대를 조직하여오고 축구선수들이 두 형제앞에서 축구경기를 하였으며 두 형제 또한 아낌없이 젊은이들과 경험교류를 하였다. 그날 각 촌에서 돼지잡고 소잡고 명절같은 기분으로 두 축구명장들을 초대하였으며 현에서 차를 파견하여 두집 식구들을 중소변경까지 구경시켰다. 

지금도 리주찬은 “우리가 태여나고 자라난 정든 고향을 사랑한다!”면서 그때의 그 열정적인 초대를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이 두 형제가 태여나고 자라난 계동현 계림향 영선촌(지금의 계동현 계림조선족향 영광촌)은 150여가구 되는 작은 농촌마을이였다. 

이 두 형제는 휴가로 고향에 올때마다 늘 마을 청년들을 모아놓고 축구활동을 벌리고 그들에게 축구기술과 경기전술을 배워주기에 정력을 기울이였다. 두 축구명장의 영향에 큰 힘을 입어 이 마을은 축구열풍이 일었으며 촌 축구팀의 수준도 날따라 눈에 띄게 제고되였다. 공사 혹은 현 체육 운동대회때면 영선촌 축구팀은 늘 우승을 따냈으며 이 작은 마을에서 지난 세기 60~70 년대만 해도 다섯명의 현급 선수(태만길, 배덕춘, 서수천, 서창학, 김룡택)와 두명의 지구급 선수(리태주, 안영택)등 우수한 운동원들이 배출되였다. 하여 영선촌 마을은 이 지역에서 '축구의 고장'으로 불리우고 있다. 

리주찬의 부인 ‘국가운동건장’ 리보금 

리보금은 1941년 계서시 제일 교량공정사 리영철의 넷째 딸로 태여났다. 어려서부터 달리기를 잘하였으며 담이 크고 머리가 령활하여 소학교때부터 운동장에 나서면 누가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가 열한살 나던 해였다. 보금이가 계서 조선족 소학교를 대표하여 시 운동대회에 참가하였는데 달리기 경기에 나서기만 하면 일등이였다. 일등이라도 뒤 선수를 한발씩이나 떨궈놓곤 하여 운동장 관중들의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마침 장춘체육학원 선생이 휴가로 왔다가 운동대회를 구경하였는데 한눈에 보금이를 점찍었다. 그는 선생님을 찾고 아버지와 어머님을 찾았다.

“이 애는 꼭 운동할 아이입니다”그는 지금부터 키워야 된다면서 보금이를 데려가겠다고 했다. 한달후에 그 선생님은 학교의 정식 '입학통지서'를 가지고와서 보금이를 데려갔다.

말썽을 부리고 엄마한테서 욕을 밥먹듯 하던 개구쟁이가 직접 집을 떠난다 하니 엄마는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꼭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으라면서 신신당부했고 아버지는 “체육 하려면 아주 힘들거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견뎌야 성공한다”고 말했다.

온 집안이 서운해하는 가운데 떠났던 보금이가 두달만에 선생님도 모르게 혼자서 집으로 도망쳐왔다. 한어를 잘 모르는데다 집생각이 너무 나서 견딜수 없었다면서 울음보를 터뜨렸다. 기차에 올라 계서로 가겠다는 말만 하고 울기만 했더니 렬차장도 하는수 없이 계서역에 내려주었다 한다. 아버지가 편지로 선생님에게 사과하고 보금이는 계속 학교에 다니게 되였다.

그 체육선생이 보금이를 체육천재라고 했듯이 보금이는 실로 체육천재였다. 달리기, 높이뛰기, 너비뛰기, 그네, 널뛰기 등 막힘이 없었고 성적도 우수했다. 널뛰기는 전국 시합에서 일등을 하여 소문이 났다. 

중학교 일학년 때부처 스케이트를 잘 탔는데 아버지가 만들어준 나무 스케이트를 타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밀산고중 1학년때에 흑룡강성 륙상팀에서 보금이를 뽑아갔다. 흑룡강성을 대표하여 전국 운동경기에 두회 참가하고 성빙속팀이 설립되면서 그곳으로 가게 되였다. 리보금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처음으로 비준 맞은 ‘스피드스케이팅 운동건장’의 일원이였다. 

1961년 전국 빙상시합에서 500m(49.7초)성적으로 전국 기록을 돌파했다. 2년후 독일에서 열린 '세계사회주의국가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국제시합에 참여하는 중국팀에서 리보금은 500m 2등, 1000m 3등의 우수한 성적을 따내였다.

1962년 당시의 소련에서 열린 '중소대항전'에서 500m 2등, 1963년 중국에서 열린 '중일 대항전'에서 전능 3등을 따내였다. 

이렇게 우수한 성적을 따내기 위해 보금이는 피타는 노력을 하였다. 불같이 뜨거운 여름 해볕 아래서 한두시간씩 선자리에서 스케이트 타는 동작을 반복하는데 등에 묵직한 모래주머니를 올려놓고 훈련했다. 매번마다 땀이 흘러 땅바닥이 푹 젖을 정도가 돼서야 감독의 호르래기가 울렸다.

보금이는 힘들때마다 ”성공하려면 천고만난을 이겨내야 된다”하던 아버지의 말씀이 힘이 되였다고 하였다. 그러다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리보금은 꿈을 더 키우지 못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중국인민해방군 8.1빙속팀이 설립되면서 그는 팀 감독으로 초청받았다. 빙상운동을 무척 사랑했던 그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과 열정을 학생들에게 퍼부어 많은 우수한 빙속 운동선수를 키워냈다.

전업이후 소수민족운동에도 적잖은 공을 세웠다. 국가체육위원회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리보금을 그네와 널뛰기항목의 전문가로 인정하였으며 소수민족운동회의 그네와 널뛰기 운동의 시합규칙을 작성하게 하였다. '전국 소수민족 운동회' 심판장 자격으로 신강에서 열린 제2회부터 광주에서 열린 제8회까지 매번 운동회마다 수민족운동회의 심판장으로 활약하였다. 

리주찬의 딸 국제급 건장 리연자 

리주찬과 리보금은 딸 둘을 두었는데 큰딸 연화는 북경정법대를 졸업하고 북경화윤에서 처장급으로 일하던 작은딸 연자는 엄마의 뒤를 이어 아홉살 때부터 해방군빙속팀에서 훈련을 받았다. 연자는 빙속운동을 무척 사랑하였으며 열심히 기술을 련마하였다.

1995년 아시아 스피트스케이팅 선수권대회에서 500m와 1000m금메달을 획득하였으며 당해 제8회 전국운동회 스피드스케이팅 1000m금메달을 따냈으며 1997 년 ‘세계대학생운동회’ 500m 은메달을 따냈다.

1999년부터 8.1빙속팀 감독직을 맡게 되였다. 제대된 후 2014년‘심양시스케이팅협회’를 설립하고 의지가 견강하고 신체와 품덕이 좋은 학생을 양성했다. 그 기간 학생들을 데리고 빙상운동이 발달한 한국, 캐나다, 네덜란드, 독일 등 나라에 가서 교류학습을 진행하며 학생들의 수준을 제고시켰다. 

그는 6년동안 많은 우수한 운동원들을 8.1팀과 국가팀에 보냈다. 리연자는 중국인민해방군 정퇀급(正团级:上校) 간부이며 현재도 빙상운동 후대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리연자의 딸 ‘국가 1급 운동원’ 곡오 

2002년 심양시에서 태여난 곡오(谷午)는 엄마의 영향을 받아 빙상운동을 무척 즐켰다. 어려서부터 스케이트 타기를 련마했는데 2018년 16세에 료녕성운동대회 쇼트트랙 500m에서 금메달을 탔으며 스피트스케이팅 1000m와 1500m에서 은메달 두개, 동메달 한개를 받았다.

2020년 전국 대학시험 스피드스케이팅 항목에서 총 86.55점이라는 최고의 점수로 북경체육대학에 입학하였다.

2022년, 북경 동계올림픽의 지원자로서 곡오는 매일 아침 6시부터 저녁 11시까지 열심히 책임성 있게 임무를 잘 완수하여 지도자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언론에 보도되였다.

곡오는 기자와의 담화에서 경기장에서 각 나라 선수들의 기술과 인내력 등 스포츠정신을 많이 학습하였으며 중국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우리나라 국기가 높이 올라가고 국가를 부를때마다 격정의 눈물을 흘리였다고 하였다. 

그는 앞으로의 목표가 더욱 뚜렸해졌다면서 '국제빙상련맹 입성'의 꿈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것이라고 밝혔다. 

곡오의 아버지 (리주찬의 사위) 곡보강은 국가스피드스케이팅관 국내기술관원으로서 (国家速滑馆滑冰项目国内技术官员, 弯道裁判员) 북경동계올림픽에서 커버심판 임무를 잘수행하여 우수심판 영예를 수여받았다.

글을 마감하면서 필자는 우리가족의 영광이자 조선민족의 자랑인 체육일가에게 감동과 축하의 꽃다발을 드린다.

/리련금

관련 기사
版权所有黑龙江日报报业集团 黑ICP备11001326-2号,未经允许不得镜像、复制、下载
黑龙江日报报业集团地址:黑龙江省哈尔滨市道里区地段街1号
许可证编号:23120170002   黑网公安备 23010202010023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