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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기다림의 미학 - 태승호

2026-05-29 13:25:06

우리의 삶은 기다림의 숨결로 가득 차있다. 첫 울음을 터뜨린 그 순간부터 기다림은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다니며 존재의 무게를 느끼게 하고 인내의 가치를 깨닫게 하며 삶 속에서 깊이 성찰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준다.

어린 시절, 엄마가 밭에서 가꾼 채소를 팔러 시장에 가시면 나는 동구밖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돌아오실 길만 뚫어지게 바라보곤 했다. 엄마는 누런 종이봉지에 싼 눈깔사탕을 싸가지고 와서 자식들에게 나누어주군 하였다. 사탕을 입안에 넣는 순간, 달콤함이 혀끝에서 꽃망울 터지듯 피여오르는 느낌은 여전히 기억 속에 생생하다. 사탕은 녹아 사라져도 그 안에 깃든 기다림의 여운은 지금껏 내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다.

나의 뒤집에 살고 있는 동갑내기 친구 터밭에 심어 놓았던 돌배, 살구, 자두 등 여러가지 과수나무가 생각난다. 동갑내기 친구와 함께 봄부터 가을까지 매일같이 열매의 변화를 관찰하면서 언제쯤 맛있게 먹을 수 있을가 하고 고대했던 기억이 새롭다. 꽃망울이 터지고 작은 열매가 맺히고 서서히 빛깔이 물들어가는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기쁨이였다. 마침내 익은 열매를 따서 입에 넣는 순간의 달콤함은 단순히 맛의 감각을 넘어 시간의 결실을 온몸으로 누리는 경험이었다. 자연은 우리에게 서두르지 말 것을 가르친다. 모든 생명은 제각기의 시간을 품고 여물어가는 법이니까.

겨울이 다가오면 아이였던 나는 하늘만 바라보았다. 언제면 눈이 내릴까하고 첫눈이 내리기를 기다리던 마음은 설레임으로 가득차 있었다.

어느날 오후, 창밖을 내다보니 하얀 솜뭉치같은 눈송이가 하나둘 흩날리며 사뿐사뿐 내려 앉았다. 나는너무도 기뻐서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뚸여 나갔다. 눈송이가 어깨에 살며시 내려앉을 때면 온 세상이 선물처럼 느껴졌다. 그 기다림의 시간은 결코 공허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속에 수많은 상상의 꽃을 피워냈고 겨울이 주는 침묵과 여유를 자연스레 깨우치게 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다림은 아마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작은 생명이 배속에서 조용히 자라는 열달, 그 시간은 단순한 생물학적 과정을 넘어선 무언의 대화와도 같다. 아이가 태여나 첫걸음을 떼고 첫마디로 배운 말로 엄마, 아빠라고 부를 때까지의 이 모든 순간들은 사랑으로 인내하며 기다린 소중한 결실이다. 부모의 마음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기다림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아무런 조건도 없이 오로지 지금의 존재함에 행복해 하고 그 미래를 축복하는 마음으로 시간이 걸리는 모든 과정을 기꺼이 품어내는 것이니까.

우리는 종종 빠른 것과 즉각적인 것에 길들여져 있다. 그러나 봄이 오고 겨울이 가는 데에는 그만한 시간이 필요하듯 마음의 변화와 성장에도 그만의 속도가 있다. 깊은 감정이 가라앉아 맑게 침전되거나 상처가 아물어 흉터로 남거나 타인을 리해하는 마음이 싹트려면 우리는 가끔 멈춰 서서 숨을 고를 필요가 있다. 그 멈춤이야말로 진정한 대화가 시작되는 공간이 된다. 서두르지 않는 마음으로 타인의 말에 귀기울일 때, 비로소 관계의 깊은 물결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기다림의 끝에는 항상 새로운 시작이 있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만난다. 초조함과 불안을 마주하고 고독의 침묵을 경험하고 때로는 지친 마음을 달래기도 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변해간다. 모든 기다림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더 단단하고 유연하게 가꾸는 시간이다.

나는 오늘도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 아직 오지 않은 계절의 문턱에서 아직 피여나지 않은 꽃을 상상하며 아직 마주하지 못한 마음의 온기를 그리며 말이다. 그 기다림은 공허한 바람이 아닌 지금 이 자리를 충만하게 하는 마음의 호흡인 것이다. 나는 앞날의 인생 로정에서 서두르지 않는 마음으로 기다림의 숨결에 귀를 기울이며 삶의 모든 순간을 온전히 품어안을 것이다. 기다림이란 결국 오늘을 살아가는 또 다른 방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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