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너머 저녁
노을은 내 나이만큼
길게 늘어져 있다
인생이 달리는 차라면
나는 이제 시속 륙십킬로
바퀴는 돌고 돌아
어느덧 고개를 숙이고
뒤유리 너머 고향 하나
연기처럼 떠난다
신호는 이미 멎었고
정류장도 지나쳐 버렸다
더 이상 길을 찾지 않는다
그저 다가오는 어둠이
나를 데려가리라 믿는다
나를 지나간 계절
네 길을 막은 건 아니였다
발끝조차 떼지 못한 채
강물도 숨을 고르는 계절
내가 널 밀어낼 리유도 없었다
바람에 눈이 시리도록
고개 숙인 들국화 한송이
그런 내 마음, 네가 알리 없다
마음이 식은 건 아니였다
단지 계절이 바뀐 것 뿐
모든 빛이 낮아질 때
내 마음도 조금씩 잠들었다
애쓴 흔적 하나 없이
그저 계절이
나를 지나쳐 갔다
해볕 머무는 손끝
나이 들어 입을 다물면
손끝엔 해볕이 길게 머문다
말보다 긴 침묵이
강물처럼 골목 불빛을 감싼다
지갑 속 지페 몇장
작은 손 하나 잡고
웃으며 내여주는 것
그것이 나의 가을이다
북풍에도 문 닫지 말고
허물어진 담엔 꽃을 심어라
베푸는 일이
되돌아오는 길이 아니라
내가 길우에 서있는 리유다
자기 겨울로 들어간다
빈자리가 늘어간다
한두명씩 멀어지며
사진 속 얼굴들은
빛바랜 벽지로 벗겨진다
자랑할 것도 없고
흉볼 이도 없어졌다
다들 조용히
자기 겨울로 들어가는데
술잔우에 내려앉는
웃음소리만 허공에 맴돈다
괜히 미안해진다
내가 아직 이 불빛 아래
그림자로 남은 사실에…
이름 없는 저녁
이미 다 있었다 믿었는데
자식들의 뒤모습
강물에 젖어지고
고개마루 넘자
늙음이 바람 끝에 걸려 왔다
길우엔 락엽이 말없이 쌓이고
내 그림자는 길 하나를 더 만들다
스스로를 잃는다
산은 등을 돌리고
들꽃도 입 다물면
침묵이 꽃처럼 피여나는 저녁
홀로 선 그 자리
내 이름 부르는 이 없다 해도
그 침묵은 나를 닮아있다
침묵이 피는 곳
산등에 걸쳤던 옷자락
바람에 접혀 사라졌다
해는 말없이 눈을 감고
들판우에 긴 그림자를 눕힌다
내 그림자도 늙었다
발끝부터 흐려오는 기억처럼
잎 하나 떨어질가 말가
가지 끝에서 멈춘 새 소리
저 노을이 가는 막길일까
다들 저렇게 지는구나
마지막 빛이 내려앉는 자리
침묵은 꽃이 되여 핀다
나이가 알려주는 것
산길 끝에 앉으면
바람도 말없이 멈춘다
잘난 날의 웃음은
지는 꽃잎 같아
손끝에 살며시 떨어지고
못난 날의 한숨은
이슬이 되여
풀잎에 고이 맺힌다
어찌 영광만 내 몫이랴
지는 것도 봄이요
잊힌 것도 향기인 것을
나이는 고요히
내 곁에 앉아
낡은 책장 한 귀퉁이를
조용히 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