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학교 5학년이였을 때 마을은 아직 전기가 드문드문 들어오는 시절이었다. 해살이 오후 세시를 넘어 노을색으로 물들면 오솔길 량옆의 참나무 잎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그림처럼 겹쳐지고 마을 끝 저편 논밭에서는 농부들의 밭갈이 소리가 멀리 퍼져나갔다. 그날은 학교에서 대청소를 하느라 점심을 건너뛰였기 때문에 배는 속이 꼬이도록 허전했다. 등산화 끈을 꽉 매고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질 때쯤 우리집 오두막 지붕 우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걸 보았다.
“옛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백설기야. 어서 먹어라.”
엄마는 나무로 된 주방 테이블 우에 흰색 봉지 하나를 펼쳐놓고 있었다. 봉지 속 백설기는 해살을 받아 살짝 투명하게 빛나며 고소한 쌀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나는 신발도 벗지 않고 의자에 앉아 엄마가 주는 나무젓가락으로 설기를 먹기 시작했다. 배가 너무 고프고 설탕의 단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니 세 조각, 네 조각을 게눈감추듯 먹어버렸다. “엄마, 더 있어?” 하자 엄마는 웃으며 “없다”고 말했다. 나는 “왜 이렇게 적게 가져왔어?”하며 토라졌다. 그때 엄마가 말했다.
“우리집에서 만든 게 아니야. 칠선녀네 집에서 득남해서 가져온 복받은 떡이야.”
칠선녀네 집은 마을 중앙에 있는 흰 벽돌집이였다. 아주머니는 마을에서 딸을 가장 많이 낳은 사람으로 여섯 딸을 키운 뒤 일곱째 아이를 기다렸다. 작년 겨울 점쟁이가 집에 와 “이번에도 분명히 딸이 태여날 거다”고 말해서 아이가 들어서기도 전에 아주머니는 실망했지만 “일곱째니 칠선녀”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지난달 아주머니가 갑자기 임신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어디서 이런 기적이?”하며 속삭였고 아이가 나오는 날 집 앞에는 사람들이 빽빽이 모였다. 울음소리가 들렸을 때 아저씨가 문 밖으로 뛰여나와 “아들이다! 우리집 아들이다!”라고 고함치자 마을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비록 떡은 적지만 그 기쁨이 마음에 와닿지?” 엄마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입안에 남은 백설기의 단맛을 음미하면서 속으로 동생이 없는 나를 생각했다. 만약 나에게도 저런 남동생이 있다면 방에서 공부를 같이 하고 논밭에서 개미구멍을 찾아다니고 겨울에는 방바닥에서 눈싸움도 할 수 있을 텐데. 그날 저녁 나는 칠선녀네 집의 기쁨과 나의 부러움에 잠을 설쳤다.
이틀 후 점심시간 나는 다시 주방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그곳에 또 똑같은 백설기가 놓여있었다. “엄마, 또 칠선녀네 집에서 가져왔어?” 하자 엄마는 살짝 웃었다.
“아니야, 이번엔 칠남네 집에서 가져왔단다.”
칠남네 집은 마을 끝에 있는 황토집이었다. 아저씨는 칠선녀네 아주머니처럼 여섯 아들을 키운 뒤 일곱째 아이를 기다렸다. 점쟁이가 “이번에도 아들이 나올 거다”고 말했고 아저씨는 “일곱째니 칠남”이라고 이름을 미리 지었다. 아저씨는 실망했지만 “어쩔 수 없지”라며 일곱째를 기다렸다. 그런데 지난달 아주머니가 해산달이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번엔 정말 딸이 나올까?”하며 기대했고 아이가 나오는 날 집 앞은 칠선녀네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아기울음소리가 들렸을 때 아저씨가 문 밖으로 나와 “딸이다! 우리집 딸이다!”라고 고함치자 또 마을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이 세상 참 기묘하지? 원래는 반대로 나올 줄 알았는데.” 엄마는 고추장을 뿌린 밥을 나에게 떠주며 말했다. 나는 백설기를 먹으며 칠선녀와 칠남의 얼굴을 상상했다. 그들도 지금 엄마의 젖을 탐스레 먹을가?
며칠 뒤 마을 주민센터에서 소식이 돌았다. “한호에서 50전씩 내고 칠선녀네와 칠남네의 득남 득녀를 경축하는 대회를 열자!” 50전은 당시에 세끼 식사값보다 비쌌지만 마을 사람들은 모두 기꺼이 돈을 냈다. 대회는 생산대 대장의 집앞 넓은 마당에서 열렸다. 칠선녀네 아저씨는 막걸리를 단지에 담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칠남네 아주머니는 찐찐한 떡을 팬에 구워 내놓았다. 아이들은 축구공을 차고 뛰여다니고 어른들은 음악을 틀고 춤을 추었다.
그날 저녁 대회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칠선녀네 아저씨가 마이크를 들어 말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 이 기쁨을 나눠주셔서 저는 이제 칠남네 아저씨와 사돈으로 정하겠습니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결혼 나이가 되면 꼭 부부로 맺어주겠습니다.” 마당에는 환호성이 하늘을 찔렀다. 칠선녀는 아주머니의 팔에 안겨 웃고 칠남은 아저씨의 가슴에 안겨 웃었다. 나는 엄마의 옆에 서서 두 아이가 행복하게 자란다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그 후로 몇년이 지났다. 칠선녀와 칠남은 앓지 않고 무럭무럭 자랐다. 칠선녀는 이름처럼 눈이 크고 얼굴이 하얗게 생겼으며 공부는 항상 전학년 일등이었다. 칠남은 키가 크고 주먹이 세서 마을 아이들 사이에서 리더 역할을 했다. 나는 중학교에 진학했고 그들도 소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매일 아침 나는 학교 가는 길에서 그들을 만났다. 칠선녀는 책가방을 메고 조용히 걷고 칠남은 그 옆에서 “오늘도 공부하냐?”하며 장난을 쳤다. 때로는 다른 남자아이들이 칠선녀에게 사탕을 주면 칠남은 그 남자아이를 붙잡고 “얘는 내가 지켜”라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두 아이가 정말 잘 어울린다”며 웃었다.
세월은 빠르게 흘렀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서 벗어나 도시로 갔다. 대학을 다니고 취직하고 결혼했다. 마을은 점점 잊혀졌다. 겨울방학이나 국경절에만 엄마를 보러 갔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칠선녀가 또 일등했어”, “칠남이 축구 잘해서 학교 대표로 뽑혔어”하며 소식을 전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그래? 좋다”고 말했지만 그들의 모습은 이미 기억 속에서 흐릿해졌다.
국경절이 다가왔다. 나는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엄마를 보러 마을로 갔다. 마을은 예전과 달라졌다. 아스팔트 도로가 깔렸고 여러 집에서 TV 소리가 나왔다. 우리집도 새로 지은 건물로 바뀌였지만 주방 테이블은 여전히 나무로 되여 있었다. 엄마는 나를 보고 기뻐했지만 눈동자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저녁밥을 먹고 아이들이 잠들자 엄마가 나에게 다가왔다.
“세상에나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니?”
엄마가 술잔을 앞으로 밀며 말했다.
내가 “무슨 일이야?”하자 엄마가 속삭였다.
“칠선녀와 칠남이 갈라진다고 해. 어쩌면 좋아?”
나는 술잔을 멈췄다. “갈라진다고? 왜?”
“칠선녀가 북경농업대학에 갔잖아. 거기 교장선생님이 그녀가 마음에 들어 며느리로 삼고 싶어한대. 교장선생님은 칠선녀가 북경에 호구를 붙이고 직장생활하면서 잘 살게 해준대.”엄마는 한숨을 쉬며 계속 말했다. “칠남은 대학 시험에서 떨어져 버스 운전수가 되였어. 칠선녀네 집에서는 ‘우리 딸이 버스운전수랑 결혼한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고 하면서 딸을 지지하고 칠남은 칠선녀가 싫어하는 눈치를 채고 ‘내가 능력이 없어서 할 수 없다’고 말했어. 그래도 그녀를 잘 살아라고 말해줬대.”
마을의 분위기는 엄마의 말처럼 무거웠다. 예전에는 국경절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축제를 열었지만 이번엔 각자 집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칠선녀네 집과 칠남네 집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저녁밥을 먹고 마을을 산책했다. 칠선녀네 집은 불이 켜져 있었지만 문은 닫혀 있었다. 칠남네 집은 어둑했다. 나는 그들이 어렸을 때 백설기를 나눠먹으면서 웃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의 백설기 맛은 아직 입안에 남아있었다.
이틀 후 마을에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원래 점쟁이 말대로 칠선녀는 칠선녀로 칠남은 칠남으로 태여났다고 해.”
“그런데 두집이 아이를 낳고 나서 상의해서 바꿨어. 칠선녀네가 아들로 기대했는데 딸이 나왔고 칠남네가 딸로 기대했는데 아들이 나왔어.”
“이번 일로 칠남의 아버지가 아들이 실련한 모습을 못 보겠다면서 파출소에 신고해서 자식을 찾겠다고 했대.”
마을은 일대 소동이 났다. 사람들은 칠선녀네 집과 칠남네 집 앞에 모여 “왜 그랬어?” “이제 어떻게 해?” 하며 소란을 피웠다. 칠남은 량부모님을 설득했지만 량부모는 “우리 아이를 돌려줘”하며 고집을 부렸다. 칠선녀는 학교에서 돌아와 “아무리 그래도 이미 늦었다”며 울었다. 나는 엄마와 함께 그 소란을 보고 “세상 참 복잡하다”고 말했다.
그날 저녁 나는 칠남을 만났다. 그는 마을 끝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옷은 헝클어졌고 눈은 붉었다.
내가 “괜찮아?”하고 묻자 칠남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가 잘 살기만 하면 돼. 어차피 나는 그녀를 지켜줄 수 없었어”라고 대답했다.
다음 날 나는 마을을 떠났다. 엄마가 “다음에 또 와”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마을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차가 아스팔트 도로를 달리면서 마을이 점점 작아졌다. 나는 창밖을 보며 칠선녀와 칠남의 어린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의 백설기 맛, 그때의 환호성, 그때의 기쁨이 모두 기억 속에 살아났다.
차가 도시에 들어갔다. 빌딩이 높고 사람이 많고 소음이 컸다. 내가 아이들에게 “마을이 재미있었어?”라고 묻자 아이들이 “재미있었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마을의 슬픔을 아이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슬픔은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흙냄새와 백설기 맛이 섞인 이야기였다.
이제 나는 매일 도시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가끔 해살이 노을색으로 물들면 마을의 참나무 잎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칠선녀와 칠남이 웃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잘 살고 있을까? 나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그 이야기는 나에게 세상의 기쁨과 슬픔, 운명과 선택을 가르쳐주는 소중한 선물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