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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한국생활 체험기

2022-05-25 15:07:48

동북지역의 편벽한 조선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해온지 28년이 된다. 90년대초부터 한국열이 불면서 나는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아주 컸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전문 한국드라마, 뉴스를 시청하였다. 한국인 못지않게 드라마내용도 줄줄히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취업비자 h-2를 따낸지 3년이 되였지만 소학교 다니는 아들 때문에 못가게 되였다. 2014년 아들이 소학교 졸업시험을 마친 후 여름방학을 잡아서 한국행을 하게 되였다. 나에게 너무도 큰 유혹중의 나라였던 한국은 처음 타보는 비행기만큼이나 신비롭고 낯선 나라였다. 공항에 내려서도 중국글과 한글로 된 길 안내표시가 잘되여서 쉽게 짐을 찾고 공항을 나섰다. 다행히 언니가 공항마중을 나와서 금방 버스를 타고 안산에 거주하고 있는 반지하방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 문을 열자 습기가 찬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아니, 이런데서 살고 있었단 말인가?

밤이 되여가니 하나, 둘 한국에 와있던 식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중국에서보담 훨씬 피곤한 모습들이였다. “언니가 책상머리에 앉아서 편하게 벌어 먹다가 이제 식당일을 어떻게 할란가 몰라?...” 그때까지만 해도 나이에 비해 어려보이고 날씬해보였던 내가 은근히 걱정되는 눈치들이였다. 실은 방학시간을 타서 식당일을 하면서 생활체험도 할겸 돈을 벌려는 심사로 한국으로 왔던 것이다.

엄청 더운 한국의 한여름 날씨를 실감하며 비좁은 단칸방에서 후덥지근한 더운 바람만 싣고 오는 선풍기 날개에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을 식혀가며 한국에서의 내 ‘첫날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이튿날, 파출부를 통해 식당일을 찾게 되였다. 파출부 사장님이 적어주는 주소대로 버스를 갈아타고 행인들에게 물어보면서 겨우 식당집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문화파출부에서 보낸 서빙입니다.” 식당 사장님과 인사를 끝내고 앞치마를 둘렀다. 이렇게 나는 한국에서의 첫 출근을 시작하였는데 2층으로 된 식당은 가정집 분위기의 뷔풰집이였다. 사장은 서글서글한 60대 초반의 경상도 아저씨였고 사모님은 별반 식당하고는 상관없어 보이는 듯한 무표정한 얼굴의 화장을 찐하게 한 50대 초반의 서울아줌마였다. 식당에서 같이 일해야 하는 언니벌 되여보이는 녀자 한명이 있었는데 고향이 부산이라서 그런지 “사장님예, 이랬어예”하는 귀여운 경상도사투리를 많이 썼다.

일을 시작한 첫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뭐 좀 시키면 그대로 좇아 할건데 웬일인지 다들 니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그러고 있으니 나로서는 참 미치는 일이였다. 점심시간이 다 되여오자 손님들이 우르르 밀려들고 여기저기서 주문을 해대는데 하나를 기억하면 또 하나가 잊어지고 음식은 나왔는데 누가 시켰는지 몰라서 눈치만 보고 있고 멍청하니 같이 일하는 언니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다가 어느 순간 갑갑해 미치겠다는 눈길들과 마주치게 되였다. 나는 중국에서 조선어문교사를 해온지라 한국에 가서도 말을 주고받는데는 문제가 없다고 장담했는데 말투가 이상한지 뭐라고 물어보면 그거 알아들을 시간이면 이거나 갖다 주라는 식으로 언니는 등을 떠민다. 손님상에 음식그릇을 갖다놓는 손길이 부들부들 떨리고 바보같이 당황해하는 나를 손님들은 걱정스럽게 지켜만 보고 있었다.

하찮게 여겼던 식당일도 대담성과 요령이 필요함을 그때에야 깨닫게 되였다. 전쟁 치르듯이 한바탕 법석이던 손님들이 하나, 둘 식사 자리에서 물러나고 음식그릇을 주방으로 날라가는데... 사모님이 주방으로 들어오란다. 물이 가득 담겨진 싱크대에 세제를 부어놓고는 그릇을 씻으라는 것이다. 장갑도 끼지 않은 채 덤벙거리며 그릇을 씻어대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깨끗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그릇을 쳐들고 보는 사이에 옆으로 어마어마하게 그릇들이 쌓여지고 있었다. “예얘, 뭐하니? 좀 빨리빨리 해야지.” 사모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나는 또 속이 한줌이 돼서 손놀림을 다그치다가 쨍그랑하고 접시 하나를 손이 미끄러워 주방바닥에 떨궈 깨버리고 말았다.

오후 3시가 되여갈 때에야 점심을 먹기 시작했는데 밥값만큼도 일을 못한 것 같아서 밥먹는 것도 눈치보였다. 그래서 “일 못해서 죄송해요.”하고 가까스로 뱉은 한마디에 “첨엔 다 그래, 이제 하다보면 요령이 생길거야.”하며 그렇게 너그럽게 받아넘기는 사모님이 눈물나게 고마웠다. 중국에서 말로만 들었던 야박한 한국주인들 모습하곤 너무나 차이가 큰 것 같았다. 도량이 넓다고 해야 하나? 역시 선진국 사람들이라서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헌데 좋은 날은 며칠 못가고 나에게는 스트레스만 잔뜩 쌓여 갔다. 중국의 모든 것에 익숙해졌던 나의 사고방식과 한국 사람들에데 대한 리해부족의 차이에서 오는 모순도 컸다. 중국에서 상급이 지시하면 차근차근 받아하던 굳어진 사고 때문에 누군가 나한테 하나에서 열까지 가르쳐주면 참 잘 할 것 같은데 여기서는 그런 방식이 안통했다. 스스로 눈치껏 일을 배워야 했고 요령을 장악해 나가야 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순진한 듯 쫓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따지고 묻고 그런 내가 참 많이 바보스러웠던 것 같다.

그때 정말 힘들었던 것은 1, 2층 사이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무거운 쟁반을 나르는 것뿐만이 아니였다. 세집을 따로 맡지 못한 상황에서 식당의 한쪽 방구석에 주숙하고 있으려니 같이 일하는 언니가 열시가 되여 칼같이 퇴근해 버리고 나면 나머지는 다 내몫이였다. 너무 피곤해서 부랴부랴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 다섯시가 못돼서 식당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부시시 깨여 일어나보니 사장 부부가 그 시간에 가락시장에 물건 구입을 다녀온 것이엿다. 잠이 덜 깬 상황에서 무우며 배 박스를 낑낑거리고 주방에 날라가고나니 온몸이 해나른해져서 정말 그대로 자버리고 싶었다. 사모님은 잠도 없는 그길로 열무를 손질한다면서 법석이고 있었다. 나보곤 그대로 올라가서 자라고 했지만 그냥 또 혼자 올라가진 뭐하고 해서 “괜찮아요”를 반복하면서 또 한번 착한 모습을 연출하였다. 그만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를 받아주었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였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함으로써 사모님에게 더욱 이쁨받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오산이였다. 시간이야 어찌됐든 나는 그날의 일들을 계속해야 했다. 사모님은 점심 끝나고 나서 아무 때까지나 한숨 자면 되였고 그래서 피곤한건 나뿐이였다. 점차 나는 체력의 한계를 느꼈다. 며칠후 다른 한 언니가 식당에 들어왔고 그로부터 나는 사모님의 미움을 받게 되였다. 새로 나타난 언니는 손님한테 애교스럽게 서빙도 참 잘했고 일도 잽싸게 해제꼈다. 무뚝뚝하고 어정쩡한 나하고 비교할 때 내가 주인 립장이였더라도 뻔한 비교였다. 그러면 차라리 속편히 나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하면 될 것인데 사모님은 한사코 내 결점들만 꼬집어 놓는다. 홀에서 뛰여다녀도 바쁜데 살살 걸어다닌다는둥, 뭐라하면 네, 네 대답 한번 시원하게 들어본적 없다는둥... 주인립장이라 할 말도 많았겠지만 죽어라고 일하는데 잘 안되던 그때는 참으로 억울했었다. 결국은 어느날 아침인가 이어지는 스트레스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나는 20일 일하던 그 식당을 나오게 되였다.

식당에서의 탈출이 어쩌면 한국생활에 있어서 경험과 면역력으로 뒤받침되여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일당으로 식당에 들어서면 제법 재치있게 일을 찾아하군 하여서 사장님들의 잔소리도 덜 듣는다. 방학간의 한국생활체험으로부터 부족함을 스스로 채워가야 함을 다시 한번 느껴보았다. 

/라북현조선족학교 김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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