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거리에서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 서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수십년 세월이 젊은 시절의 풍모는 빼앗아갔지만 소탈하고 유머가 있는 성품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 순간 우리는 서로의 변화를 알아차리며 짧지만 진솔한 말들을 주고받았다.
나는 우리의 인사가 단순한 례의가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마음을 나누는 따뜻한 대화임을 느꼈다. 비록 각자의 길을 걸어왔지만 그 짧은 만남은 길가에 피여난 작은 꽃처럼 내 마음을 훈훈하게 적셔주었다.
기나긴 인생의 길에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과 마주친다. 그중에는 스쳐 지나가는 인연도 있고 깊이 새겨지는 인연도 있다. 그 모든 만남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남긴다. 아련한 기억이 될 수도, 삶의 무게가 담긴 교훈이 될 수도, 또 언제 떠올려도 따뜻한 미소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남겨진 수많은 조각들이 모여 비로소 우리의 인생은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지인과 헤여진 후 나는 계속 길을 걸어갔다. 발걸음이 이전보다 묘하게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고 가슴 한구석에는 어느새 싱그러운 봄빛같은 따뜻함이 스며들어 퍼지고 있었다. 길가에서 안면이 조금 있는 사람과 마주치며 주고받는 눈인사와 스치는 미소는 마치 오래전에 잊었던 위로를 건네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들 자체가 나에게 사소한 것 같지만 소중한 선물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날도 따스한 해빛이 비추는 유난히 맑은 날이였다. 나는 부르하통하 강가로 산책을 나가려 집을 나섰다. 길가의 이름 모를 나무에는 하얀색, 분홍색, 빨간색 꽃망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고 조금 차가운 바람 속에도 봄기운이 서려 있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강변을 걷노라니 온 세상이 봄빛에 싸여 흐드러지게 피여난 것만 같았다. 강물은 은빛으로 반짝이며 유유히 흐르고 그 옆에서는 삶의 여러 모습이 화음처럼 펼쳐져 있었다. 어린 손주의 손을 굳게 잡은 할머니의 주름진 손에는 세월의 따스함이 스며있는 것 같았고 아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는 강바람을 타고 저멀리 퍼져 나갔다.
발길이 닿는 대로 한가롭게 둘러보며 천천히 걷노라니 지나가는 모든 얼굴에 맺힌 봄날의 평화로움이 조용히 내 마음의 언덕에 스며들었다. 서두름 없이 지금 이 순간의 빛과 숨결을 만끽하는 것이 삶의 본래 경지가 아니였던가. 뜨거운 해살이 점점 강하게 강물우에 금실을 수놓으니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더디여졌다. 이 여유로움 속에서 나는 비로소 봄이 주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 시간 자체의 아름다운 무위(无为)임을 깨달았다.
그때였다. 나와 멀지 않은 거리에서 익숙한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엔 착각인가 싶었지만 그가 가까워질수록 오래된 기억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는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그의 얼굴에도 나와 같은 놀라움과 기쁨이 섞인 미소가 어려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이 짧은 한마디에 수년의 시간이 꿰뚫리면서 우리는 마주서 서로를 살짝 훑어보았다. 옛날에 항상 입에 달고 살던 익살스러운 말투는 여전했지만 그 안에 담긴 여유는 예전보다 더 깊어져 있었다. 나 역시 그에게서 예전의 날카로움이 부드러워진 모습을 발견했다.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흰털이 보였고 눈가에는 나와 비슷한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세월은 우리에게 주름과 흰머리를 선물했지만 그 세월을 견뎌낸이만이 가질 수 있는 평화로움도 함께 안겨주었다.
우리는 길가의 벤치에 잠시 앉아 옛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는 마치 오래된 앨범을 넘기듯 한장 한장 추억을 되살렸다. 젊은 시절, 우리는 한 마을에서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 무더운 여름이면 동네 골목길을 누비며 밤새워 즐기고 세상 모든 것을 품은 듯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꿈 많은 청년들이였다. 앞집 처녀와의 첫사랑과 실련의 쓰라림 그리고 서로의 꿈을 응원해주던 그 순간들. 그 모든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했지만 동시에 뒤돌아보니 아득히 먼 옛날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이제 우리는 황혼의 언덕길에서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고향을 떠난 후 우리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궤적을 그리며 흘러갔지만 이 만남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듯 했다. 우리는 서로의 현재를 묻고 미래를 걱정하며 깊이 파고들지 않고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설명할 필요없이 단지 “너도 여기 있었구나”, “나도 잘 지내고 있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우리의 대화는 마치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들꽃과 같았다. 누군가는 지나칠 수도, 풍경의 일부로 여길 수도 있지만 그것을 발견한 나에게는 특별한 하루를 만드는 작은 기적이었다.
인생이라는 긴 려정 속에서 나는 모든 만남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깊은 인연은 사랑과 소중함을 가르쳐주고 스쳐가는 인연은 우연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길을 걷다 마주친 로인의 미소, 고속렬차에서 우연히 들은 누군가의 고백, 길가의 커피숍에서 마주친 고양이의 눈빛까지.
나는 마지막으로 옛 친구의 어깨를 살짝 토닥이며 작별 인사를 나누고 다시 각자의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멀어지는 뒤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이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깨달았다.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며 마음 속에는 친구와 나눈 웃음소리가 맴돌았고 그 따뜻함이 온몸을 감쌌다. 이 만남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고 서로를 확인하는 긴 려정 속의 작은 휴식이다.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여지겠지만 그 모든 만남이 오늘처럼 따뜻한 기억으로 남기를 기대하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