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무한정 높고 바다가 끝간데 없이 넓다 해도 나에게 생명을 주신 량친의 은덕에는 못 비긴다.
세상의 무엇과도 비길수 없는 그 사랑 그 정에 목이 메여 오늘도 다정히 불러보는 부모님, 그 이름 되새기며 마음속 깊이에서 솟구치는 뜨거운 눈물이 내 얼굴을 적시며 한정없이 흐른다.
선인들은 이미 시공간에 묻히고 하늘의 별이 되였지만 늘 푸른 소나무처럼 마음 속에 살아 계시는 량친, 오늘도 나는 꿈에서라도 다시 한번 안아보고 싶고, 안기고 싶은 량친을 한없이 그리며 반짝이는 저 하늘의 별을 세여 본다. 세고 세다가 내 눈길이 미치는 곳의 가장 밝은 별이 부모님이라고 믿는다.
두분은 내 인생의 영원한 등불이였고 방황할 때 옳은 길로 인도하는 지남침이였다.
아버지 최철산은 어릴 때에 서당을 다니며 천자문을 잘 쓰고 통달하여 훈장으로부터 신동이라 불리웠다.아버지는 남조선 경상북도 대구에서 살다가8.15 광복 전야에 어머니와5살난 형님을 데리고 석탄차에 앉아 두만강을 건넜다. 은은한 달빛에 세 식구는 긴 그림자를 뒤에 남기며 살길을 찾아서 개산툰 종이공장 부근에 정착하였다.
아버지는 강하면서도 엄청 부지런한 사나이셨다. 공장에서 삼직제로 출퇴근하시면서도 종이공장에서 내버린 석탄재를 쇠구르마로 우공이 산을 옮기듯이 옮겨 흙에 거름을 내여 밭을 비옥하게 살찌웠다. 한짐 되나마나한 밭에서 하얀 메밀꽃이 피여나고 새노란 조이삭, 기장이삭이 넘실대는 모습은 아버지가 땀으로 걸군 보람의 결실이였다.
당시에 부자꿈은 엄두도 못내였다.그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식량을 해결하여 자식을 굶기지 않는 것이 부모님의 소박한 소망이였고 그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켰다. 하기에 한 구들이 넘쳐나는 애들이 무탈하게 자랄 수 있었고 부모님은 그 애들을 바라보며 생의 희망과 보람을 느꼈다. 물거미처럼 자신의 몸뚱이를 통째로 자식들에게 맏기고 달갑게 희생하는 그 정신, 세상의 부모님들은 모두가 그렇다지만 우리 부모님들이 생활을 대하는 지혜와 그 헌신은 조금은 남들보다 다른 데가 있었고 특별하셨다.
60년대 초였는데 백년에 한번 있을가 말가하는 홍수가 터졌다. 홍수가 두만강을 휩쓴 뒤 아버지는 물우에 떠내려 온 백양나무와 이깔나무 발판들을 건져서 집에 실어왔다. 이런 일을 할 때면 어린 내가 늘 아버지의 유력한 조수였다. 이 재료들로 출근 외의 여유시간이면 아버지는 창고와 사랑채를 지었다.
사랑채를 짓는데 진흙에 벼짚을 썰어 함께 짓뭉개서 토피를 만들었다. 토피를 토피틀에 넣고 쭉 미는데 장시기 일에 망가진 아버지 새끼손가락이 구불어져 있어서 유난히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런 아버지가 나의 우상이였다. 출근하면서 여가가 있으면 집일에 한시도 쉬지 않는 아버지, 하기에 우리집 사랑채와 창고는 가축들의 보금자리였다. 하학하고 돌아오면 길옆 돼지굴에서 돼지가 두발을 쳐들고 먹이를 달라고 꿀꿀거리고 노란 삽살개는 멀리서부터 반갑다고 꼬리치며 깡충깡충 춤을 추며 내앞에 달려온다. 창고에 들어서면 또 십여마리 토끼들이 다리에 매달려 쇠투리를 달라고 설쳐댄다. 아버지는 통이 크게 가축을 잘 키웠을 뿐만 아니라 돼지, 염소도 통채로 잡아서 김치움에 넣고 자식들이 배불리 먹게 했다.
여름이면 나는 아버지를 따라 줄 낚시로 황어를 잡고 통발로 모래무지, 버들개, 붕어 등을 한 바게쯔식 잡았다. 집에 오면 밸을 따고 널려 말리는 것도 품이 많이 들었다. 둘째 누이 결혼식에 김치, 감자국수, 두부, 콩나물 외에 말린 황어고기가 한몫을 크게 막았다.
생활이 힘들고 늘 지쳐있었지만 랑만적인 아버지였다. 애주가이고 풍류였다. 명절이면 한상 푸짐하게 차려놓고 저가락으로 장단을 치시며 옛노래를 부르고 팔남매를 순서대로 노래시켰는데 연길에서 한어교원으로 사업하는 형님의‘산천가’는 그렇게 성수나고 멋졌다. 아버지의 걸작이고 우수제품인 우리 팔형제는 부모님의 우산아래 비바람을 피하면서 이렇게 무난하고 행복하게 살았다.
아버지는 항시“남에 신세에 살지 말라”,“남의 풍에 놀지 말라”는 교훈적인 말로 교육하였다. 경우 시비가 밝아서 동네에서 다투거나 싸움이 벌어지면 적극 나서 말리고 화해시켜 사이좋게 지내게 하였다. 하여 우리 부모를 법이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칭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버지는 기분이 좋거나 술에 취하면 언제나 옷장우의 검은 가방에서 두툼한 상장들을 꺼내놓고 형님을 자랑했다. 그 대부분은 형님이 소학교로부터 중학교까지 줄곧 반장으로 활약하면서 받은 개근생, 최우등생, 위생모범생 등 상장이였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어머니 김정희씨 역시 강한 분이였고 말수가 적었다. 한마디 말을 하여도 간단명료하게 중점을 쿡 찍어 말한다. 항상 사람은 깨끗해야 하고 남에 물건에 손을 대지 말라고 가르치군 했다. 내가 소학교 다닐 때 세수수건 반을 적셔 대충 씻으면“무엇이 그리 바빠 수건 꼬랑대로 세수하냐? 넥타이도 똑바로 매지 않고”하며 꾸중하면서 무슨 일을 하든지 차근차근 하라고 일깨워 주셨다.
딸들의 생리 때에도 자상이 가르치시면서 녀자답게 행동하고 아무렇게나 생리대를 처리하지 말고 식구들이나 타인의 눈에 띄우지 않게 하라고 따끔하게 가르쳤다. 그런 기초적인 인생 교육이 먼 후날 자식들이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훌륭한 밑거름으로 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다투거나 싸우지 않았다. 도덕 소양이 깊은 분이셨다. 불평이 있으면 새벽에 솥가마를 드렁드렁 끓이면서 노여움을 삭이군 했다. 어머니는168센티미터 키에 날씬한 몸매를 가졌다. 두부 앗은 초물로 감은 까마반질반질한 머리카락을 가리마 내서 뒤로 빗어 쪽지면 너무가 아름다왔다. 어머니가 평생 파마 한번 하지 않고 화장품 한번 쓰시는 걸 나는 본적이 없다. 그래도 목욕을 자주 하고 손톱과 발톱을 깎아서는 종이에 정히 싸서 버리는 모습이 너무도 인상적이였다. 이렇게 기질이 다분한 멋진 모습을 간직하여 자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어머니는 년세가70이 돼도 꿋꿋하고 흰머리 한오리도 없었다. 어머니도 가속공장 림시공으로 삼직제 일을 하였다. 밤12시에 출퇴근할 때 가족들을 깨울가봐 조용히 나가고 살그머니 들어왔다. 자식들에게 배고픈 고생을 안 시키려고 가을이면 주변 농촌을 돌아다니면서 이삭주이를 하였다. 어머니가 이삭주이를 해온 콩을 매돌에 갈아 두부를 앗아 먹는 것으로 며칠 건너 생활개선을 했다.
내가 소학교6학년 때 일이라 생각된다. 한번은 집의 창문이 깨져 비닐로 씌운 것을 보게 되였다. 마침 학교 유리창이 집창문 사이즈와 같으니 가만이 떼다가 집 창문에 끼워 넣었다. 이를 발견한 어머니는 당장 원래 그 자리에 갖다 맞추라고 호통쳤다. 어머니는 직통배기였고 마음은 항상 깨끗하였다. 내가 가을걷이 농촌지원을 갈 때도 물병에 마시는 물을 담아서 들고 가게 하였다. 갈증이 나도 농민들이 심어 놓은 무우에 손을 대지 말라는 것이다.
경우가 밝은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연길에 있는 네 형제들이 서로 모시려 해도 도시 집들은 아래웃집 옆집도 서로 모르고 살고 인정이 없어 재미없다며 오래 있지 않으셨다. 아예 개산툰의 집 터전에 오이, 배추, 고추, 마늘, 상추, 줄당콩이랑 심으며 사는게 편하다고 하셨다. 심심하면 동네 할머니들과 화투치기도 하고 되놀이도 하는게 즐겁단다.
거둔 채소와 김치, 된장, 고추장도 외지에 있는 딸과 연길에 있는 사형제네 집에 똑같이 보내줬다. 어머니는 위하수병이 있었는데 여러 의사를 보였어도 이병은 치료약이 없다고 하니 안타까웠다. 내가 일본에 있을때 어머니는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이름만 부르다가 눈을 감으셨다고 형수가 전해주었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내 가슴은 미여서 터지는 것 같다.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부모님 그 은정을 언제가면 다 갚으리까! 갚을 여지도 없이 별나라에 입적하셨으니 너무도 안타깝다.
오늘 부모님이 낳아주고 반듯하게 키워준 덕분에 자식과 손주들은 사회의 일원으로 교사, 의사, 인민경찰, 공무원, 료리사로 되였으며 증손군들은 박사, 연구생, 공부를 하고 있다. 더욱 기쁜 일은 나의 외손녀 전령이가 일본 피아노 콩클에서 상을 받고 명문대학에 붙은 것이다.
나도 지금 열심히 문학공부를 하고 여러 문학지에 작품을 발표하며 불우이웃 돕기와 사회 자원봉사 활동에 참가하면서 여생을 즐기고 있다.
만약 래세가 있다면 다시 부모님의 아들로 태여나 이 생에 다 못한 효도를 해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