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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보리자루 - 남옥란

2025-08-28 14:27:21

보리자루란 무엇인가? 검색창에는 아래와 같이 씌여있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무리와 떨어져 혼자 묵묵히 있는 사람 또는 그런 상황을 비유적으로 가르키는 속담이다. ‘꾸다’의 활용 ‘꾸어’를 줄여 ‘꿔다놓은 보리자루’같다고도 한다.

이러한 상황을 보리자루에 비유하는 리유는 조선 연산군 시기의 고사에서 유래되였다.

연산군의 폭정에 반감을 가진 신하들은 중종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늦은밤 박원종의 집에 모여 반정을 모의했는데 여기에 참가한 성희안이 반정에 참가한 인원의 머리수를 세여보니 사전에 알고 있던 수자보다 하나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이에 놀란 성희안이 박원종에게 “모의에 첩자가 들어있다”고 귀속말을 했고 곧 “저 구석에 앉은 자가 아까부터 말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하고 있는데 저자가 첩자가 아닌가?”하고 지목했다. 경내가 시끄러워졌고 사람들이 모두 돌아 살펴보니 사실 성희안이 세였던 마지막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거사에 쓰려고 준비한 보리자루가 사람처럼 놓여있던 것이였다.

이때부터 가만히 앉아서 혼자 묵묵히 있는 사람을 ‘보리자루’라고 불렀고 속담으로 전해졌다.

아마도 별 볼멋 없는 사람이나 쓸모 없은 물건인데 집안 구석을 차지하고 퍼더버리고 앉아있으니 보기에 안좋고 시끄럽다는 이미지인 것으로 리해된다.

그런데 지금 내 자신이 꿔온 보리자루같다는 생각이 수시로 든다. 요즘 각종 문학 행사가 빈번히 진행되여 사회 인사들과 자리를 나누면서 불현듯 그들 속에 끼인 내가 어쩐지 늙은 고목처럼 생기가 없어서 멋적은 감이 나고 구석을 차지하고 말없이 덤덤히 침묵만 지키고 있는 후줄근한 보리자루라고 느껴진다. 확실한 것은 나는 지긋하게 나이를 먹었고 후배들은 갓 피여난 봉선화처럼 야드드하게 젊었다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나이를 먹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어릴 때를 제외하고 어른이 되여서 먹고 싶어서 먹는 나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소털같이 많던 나날들이 내 몸에서 빠져 버리고 허물과 골격만 남았다. 젊은 시절은 자고나면 에너지가 넘쳐나고 정열이 샘솟듯 뿜겨나서 여기저기 뛰여다니면서 열량을 소모하기에 바빴지면 지금은 하루이틀은 에너지를 축적하고서야 하루 활동에 소모되는 열량을 얻는다. 빠져나간 열량을 다시 거두어들이고 또 소모하고 반복적으로 진행되는 신체적 신진대사는 마치도 학습에 게으름없이 노력하며 배우고 진보하는 행보와 비슷하다. 배우고 활용하고 또 배우고 또 활용하고, 사실 배움에는 끝이 없다. 보리주머니에 생명을 불어 넣는 일은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보리자루는 생명의 기상이 존재하지 않기에 꼴기가 없다. 생명이 없는 물질은 죽은 물질이다. 나는 이 후줄근한 보리자루에 생기를 불어 넣고 열량을 넣어 팽팽해지고 싱싱해지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실현되기는 쉽지 않고 자칫하면 헛꿈으로 될 수도 있다. 옛말에 늙으면 어린이로 된다고 한다. 아니 적절하게 말하면 어린애 취급을 받는다. 나는 그것을 느낀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 감수한다. 걸음마를 타는 애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듯 춰주고 칭찬하는 어투에서 느낄 수 있다. 말은 어~ 해서 다르고 아~ 해서 다르다는데 그런 말귀를 못 알아듣는 팔부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아직 후줄근한 보리자루가 되여서 앉은 석동을 할 처지도 아니거니와 그렇게 하기도 싫다. 백세시대도 나를 향해 두팔을 벌리고 그저 오는 것은 아니다. 신체의 기본 바탕과 유전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겠지만 의념과 굳센 의지도 나를 좌우지 하는 중요한 요소다. “후- 나이를 먹을대로 먹었는데 내 이제 무엇을 더 할 수 있겠소.” 그런 마음가짐과 맥빠진 소리가 나를 그렇게 몰아간다. 나는 정신을 바싹 차리고 후줄근한 보리자루안에 문학을, 아름다운 사랑을, 행복한 우리 사회의 이모저모를 채워넣고 싶다. 죽은 보리자루를 산 보리자루로 부활하게 하게 하고 싶다.

인생은 눈 한번 깜짝할 사이다. 내가 어떻게 왔던지 기억조차 없는데 이미 고래희 문턱을 넘은 뒤였다. 새로운 십년을 또 다른 시작의 도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작에는 무한한 희망과 기대가 있다. 시작은 언제나 황홀하고 가슴이 부푼다. 백세 시대에 대비하면 고래희는 아직도 장년인데 나는 할 수 있다.

나이는 흘러간 물이요, 떠나버린 구름이다. 젊다고 뽐낼 것도 없고 늙었다고 비관 할 것도 없다. 늙음 속에 젊음이 있고 젊음 속에 역시 늙음이 있으니 말이다. 남들보다 한세기 앞서 삶과 죽음 체험을 하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나다. 후세들에게 아름다운 생활담과 죽음을 정확하게 대하도록 기록으로 남길 수 있으니 말이다.

정확한 인생관과 철학적 사유로 보면 인간의 생애, 시작과 결말에는 선후가 없다. 인류 력사가 상당히 긴데 반해, 우주가 끝간데 없이 팽창한데 반해, 내가 걸었던 길은 우주공간과 지구우에서 한알의 모래알만큼한 정도의 무게밖에 되지 않으니 말이다. 모래알은 미소한 힘밖에 가진게 없지만 그렇다고 물 밑바닥에 깔린 재수없는 모래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다. 큰 홍수에 순식간에 밀려버리는 모래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모래와 콘크리트가 뭉쳐서 튼튼한 성벽을 쌓듯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하기에 자신이 정확하다고 믿는 꿈을 끝까지 밀고 나아가야 한다. 자신을 믿는 사람은 행동할 때에 필요한 요건들을 모두 갖추어 놓고 있다. 하기에 사소한 문제든 중대한 문제든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 때론 주위 사람들의 충고 혹은 조언에 흔들릴 때도 있다. 그러나 내 인생은 내 자신의 것이다.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다보면 나만의 길이 만들어질 것이다. 자신을 믿어보자. 나는 할 수 있다고 한번 높은 소리로 웨쳐보자. 년령과 문학, 년령과 글쓰기가 무슨 관련이 있으랴. 젊은이들과 늙은이들이 보는 눈은 다르다. 사유와 판단도 다르다. 마치 자연에서 우중충한 소나무, 백양나무와 그 밑에 자라난 꽃과 잡초들이 어울려서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듯 인간세상도 로년, 중년, 청년들이 모여서 조화롭고 완벽한 인간사회를 이끌어 나아가는 것이다.

나는 지구를 딛고 걷는 날까지 후줄근한 보리자루에 무릇 문학이라고 하는 모든 것들을 주어담겠다. 그것이 밴대풀잎이라 해도 좋다. 오늘은 한잎, 래일은 두잎, 그 다음날은 한아름… 미구에 무성한 숲을 이루도록 잘랑잘랑하는 씨앗을 대지에 뿌려 대지가 파랗게 생기있고 희망이 넘치도록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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