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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파 도 (외 7수)- 김문

2025-06-04 10:13:22

수천마리의 백마가 달려온다

붉은 노을을 등에 싣고 질주한다

유람선을 뒤흔들고

갈매기떼 헤치며

태평양 한가운데를 누비던

힘센 백마들

고래의 등을 후려치고

날치의 뼈를 으스러뜨리며

연대까지 달려왔으리라

어깨를 나란히 한 말들은

모래톱에 일제히 코를 처박고

밀물과 썰물 속에 몸을 숨긴다

부드러운 물결이 되여

내 발목을 휘감는다

그리고 저 멀리

또 한무리의 백마가 달려온다



슬픈 가계


가로 누우나 세로 누우나

정수리와 발바닥이 벽에 붙기는

마찬가지다

창밖으로 별을 보던 아버지 입가에

반디불로 보이는 권연

추운 밤이나 흐린 낮이나

여린 가슴 감싸주던

때깔로 빛나는 담요

그리고 새우처럼 돌아눕는

아들 녀석의 못난 더벅머리는

숨소리 죽이고

베개만 적시고 있다

마른 나무가지 같은 손으로

아들의 머리를 만지며

아버지는 말한다

“봄이면 우리 집이 생긴다.”

“언제가 봄임까?”


“우리 모두가 잘되는 날이지.”



짝사랑


그대는 내게 폭탄 하나를

던지고 갔습니다

나를 믿지 않았기에

폭탄을 던진 것입니다

나도 그대를 믿지 말아야 할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내가 그대를 사랑한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독한 밤


단맛이 빠진 껌을 씹 듯이

하루를 지냈다

주말이 되면

고려대학교 기숙사는 고요하다

잠자리에 들기에는 너무 고요하다

창밖에서 크리스마스트리가 깜빡이고 있을 뿐

그 무엇도 나에게 말을 걸지는 않는다

텅 빈 고요함 속에는

나를 끌어안는 힘이 있다

고독의 한가운데서만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사막의 원주민이 되여보지 못한 나에게

어둠은 고독이다 리별이다

그리움이다

한밤중 코고는 소리 들려 기웃거렸다

아무도 없는데 어디서 코고는 소리 들릴까

그 누구도 내편이 되지않는 밤에는

코고는 소리마저 반갑게 느껴진다

알고 보니 코를 골았던 건 바로 

나 자신이였다

그리고 그날 밤 잉잉 울었던 것은

밤하늘의 별이지 내가 아니였다



9월 16일의 바람


부산 앞바다를 누비던 바람이

세차게 학교 기숙사를 휩쓸었다

밤새 유리창을 흔들어댔다

엔진 소리를 내면서 질주하다가

베란다의 옷걸이들을 날려버렸다

옷걸이에 매달려있던 옷들은

바람을 피해 여기저기 도망하다가

기숙사 옆문이 열리자 곧바로

복도에 투신해버렸다

오토바이에서 내린 폭주족들은

옥상에서 쇠파이프를 휘둘러댔다

아침에 창밖을 보니

바람은 야행성 짐승처럼

어딘가에 숨어 잠들어 있었고

바람이 지나간 아스팔트 위를

오토바이 몇대가

바람처럼 질주하고 있었다



쌍절곤


돌아 돌아 돌아간다

근육을 핥으며 배암처럼 감기고

독수리같이 휘날린다

세상이 당신이 휘날린다

류학생활이 외로울 때

우리 몫으로 남겨진 아픔을

삭이기 위해

쌍절곤을 돌리자

내가 죽고 당신이 죽고

우리 모두가 죽어야 숨쉴 수 있는

이 시대의 위선을 벌하기 위해

나는 홀로 옥상에서

쌍절곤을 돌린다

세상을 돌린다 나를 돌린다



석류


석류를 보면 따고 싶다 아니

따고 싶지 않다

우리 집 앞마당의 석류는 저마다

상처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비료를 주지 않아서 그런지

석류는 빨리 늙는다

열매의 입술에서 피가 흐른다

멍이 든 것은 석류의 마음이였다

며칠 전 나의 첫사랑이

리혼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말에 집에 돌아와 보니

석류나무에 석류는 없었다

안해에게 물어보니

엊그제 이웃집 아줌마가

다 따갔다고 한다

석류로 술을 담그겠다나

내 앞에서 초췌하던 석류야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달콤하게 발효되여다오



은수


새벽 3시가 되면 어김없이

나를 깨우는 옹알거림

은수가 휘두른 고사리 손이

내 잠 속을 비집고 들어와

희미한 꿈을 지우고 있다

필름이 끊긴 나의 잠은 행복하다

안해가 분유를 타고 있는 동안

열심히 손가락 빠는 은수

언제 아빠의 잠을 깨웠냐는 듯

태연한 우리 아기

손바닥이 발바닥 되도록

달려온 내 인생은

은수가 있음으로 인해

부끄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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