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73세인 상해 지식청년 요조당과 그의 안해 림소란은 작고한 조선족 로인 리생금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날이 갈수록 짙어진다고 한다.
지난 1969년, 18세인 요조당과 림소란은 ‘지식청년들 농촌으로 향하자’는 호소를 받들고 다른 14명의 상해 지식청년들과 함께 당시 연변주화룡현 서성진의 한 편벽한 산간마을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당시 67세였던 조선족 독거로인 리할머니와 인연을 맺게 되였다. 10년 동안의 하향시절 리할머니와 두터운 정을 쌓은 이들은 도시로 돌아갈 때 로인을 상해에 모시고 가 함께 생활하면서 심금을 울리는 조선족과 한족의 ‘모자 정’을 22년간이나 이어갔다.
지식청년을 친자식처럼
1969년 3월 요조당, 림소란과 14명의 지식청년은 상해로부터 화룡현 서성진에 와 이곳의 한 산간마을에 정착했다. 갓 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생산대에 들어간 젊은이들은 생활과 로동 면에서 많은 어려움에 봉착했다. 밥을 지을 줄 몰랐던 이들에게 있어 식사는 첫번째 고비였고 끼니를 거르기가 일쑤였다. 같은 촌에 거주하는 리할머니는 대도시에서 온 젊은이들이 매일 밭에서 고된 농사일을 하면서도 식사를 거르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때로부터 리할머니는 매일 지식청년들의 숙소에 찾아가 밥 짓는 방법을 알려주고 그들을 도와 새끼돼지 한마리를 키우기도 했다.
리할머니는 또 여가시간에 지식청년들에게 조선말을 배워주어 이들이 더 빨리 당지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게 했다. 리할머니의 도움으로 지식청년들은 밥 짓는 방법을 터득했으며 차츰 조선말을 알아듣고 간단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였다. 집을 떠나 타지에 온 이들은 리할머니를 가족처럼 여기고 걱정거리가 생기거나 어려움에 봉착하면 할머니에게 속마음을 터놓았다.
1970년, 요조당과 림소란은 상해에 돌아가 가족을 방문하면서 련애관계를 확정한 후 조직의 간증하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 얼마 후 림소란이 아이를 가져 계속 지식청년 숙소에 머무르는 것이 불편하게 되자 선량한 리할머니는 주동적으로 이들을 자기의 집에서 지낼 수 있게 하였다.
할머니는 이들 부부를 친자식마냥 살뜰하게 보살펴주었다. 이들의 아이가 출생을 앞두었을 때 일흔에 가까운 리할머니는 자기 딸이 곧 출산하듯 기쁨에 겨워 시중을 들었고 천기저귀와 임산부 음식을 준비해주기도 했다. 어느 날 밤, 림소란이 갑자기 출산 기미를 보이면서 난산을 겪게 되자 리할머니는 울퉁불퉁한 산길에서 어둠 속을 더듬으며 몇리 길을 걸어가 산파를 데려왔다. 동틀 무렵에 이르러서야 림소란은 산통 끝에 안전하게 아이를 출산했다. 리할머니는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자기의 친손주를 보듯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희소식을 알렸다. “소란이, 포동포동한 사내아이야, 인물이 어찌나 준수한지!” 림소란이 감격에 벅차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할머니가 없었더라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몰라요!” 곁에 있던 요조당도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아이가 연변에서 태여났으니 ‘연민’이라고 부릅시다!” “연민이… 나도 좋아!” 리할머니는 거듭기뻐하며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금방 출산한 림소란에게 몸보신을 시켜주기 위해 리할머니는 씨암탉 두마리를 잡고 나서 또 인차 눈코 뜰 사이 없이 림소란과 아이를 돌봐주었다. 아이가 조금 성장한 후 칭얼댈 때면 리할머니는 사탕물을 먹이면서 달랬고 사탕이 부족하면 갖은 방법으로 사탕표를 구했다. 산후조리가 끝난 림소란이 지식청년들과 함께 농사일을 나가게 되자 리할머니는 아이를 돌보는 중임을 떠맡고 매일 아이를 업은 채 부부의 ‘후근’을 자처하여 이들이 힘든 로동을 끝내고 돌아오면 뜨끈하고 맛갈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게 했다. 리할머니는 또 이들 부부가 저녁에 충분히 휴식하지 못하면 이튿날 밭에서 일할 때 힘이 딸릴 것을 념려해 밤마다 아이를 자기 곁에 두었다. 밤낮으로 아이를 돌보면서 지칠 법도 하지만 아이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시선에는 사랑이 넘쳤다. 연민이도 늘 할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할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을 가졌다. 할머니의 가르침으로 연민이는 사리에 밝을뿐더러 조선어를 류창하게 할 수 있게 되였다. 요조당 부부는 아들이 조선어를 류창하게 구사하는 모습을 보고 롱담조로 말했다. “상해 지식청년의 후손이 상해 방언을 모를 줄이야!”순간 집안은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요조당 부부, 리할머니를 상해로 모셔가 평생 모셔
행복한 날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느 하루, 갑자기 무력감을 느낀 요조당은 검사를 거쳐 황달성 간염을 진단받았다. 그 당시 향촌위생원은 간단한 치료만 할 수 있고 특효약이 없어 가족들은 애간장만 태웠다. 리할머니는 날이 갈수록 야위여가는 요조당의 모습에 가슴아파하면서 사방에서 치료방법을 수소문해 중약 처방을 얻었다. 할머니는 일흔을 넘긴 고령에도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산속에서 하루종일 처방 약초를 찾아다니다가 배가 고프면 나무 아래에서 건빵으로 대충 배고픔을 달래고 다시 약초를 캤다. 집에 돌아오면 그날 캔 약초를 요조당에게 달여 먹였는데 한달 후 기적같이 요조당의 병이 가신 듯이 나았다.
요조당의 병이 완쾌되였다는 소식을 들은 림소란은 감격에 겨워 리할머니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았다. “다 할머니 덕분입니다!”
리할머니는 요조당 부부를 살뜰하게 보살폈을 뿐만 아니라 연민이를 애지중지 키워주었다. 연민이가 유치원에 다니게 되자 할머니는 조선족유치원에서 업신여김을 당할가 봐 아이와 함께 수업에 참가했다. 아이가 수업을 들을 때면 할머니는 교실 모퉁이에 앉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아 적잖은 사람들로부터 아이의 친할머니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렇게 리할머니와 요조당 일가는 근 10년을 함께 오붓하게 생활했다.
1979년, 지식청년들이 도시에 돌아간다는 소식에 촌의 지식청년들은 흥분해마지않았지만 요조당 부부는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상해에 돌아가면 의지할 데 없는 리할머니는 어떡하지? 며칠간의 론의을 거쳐 부부는 리할머니를 모시고 함께 상해에 돌아가 친어머니를 모시듯 돌아갈 때까지 봉양하기로 결정했다.
결심을 굳힌 부부는 그제야 마음이 놓여 상해에 돌아가면 마주하게 될 문제를 고려하고 상해에 있는 부모에게 이 상황을 설명했다. 량가 부모들은 이에 한결같이 찬성했고 은인이 상해에 와서 생활하는 데 환영을 표했다.
1979년 4월, 상해복귀 신청을 비준받은 요조당 부부는 네식구가 함께 상해에 돌아갈 생각에 기쁨을 금치 못했다. 상해에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특별히 리할머니를 모시고 북경 관광도 했었다.
상해에 돌아간 후, 요조당 부부 로임은 36원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최선을 다해 리할머니가 쾌적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했다. 이들은 로인에게 새 옷, 신발과 편안한 침구를 마련해주었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면 먼저 리할머니의 그릇에 집어드렸다. 그리고 리할머니가 적적해할가 봐 라지오를 준비해 수시로 조선어 방송을 청취할 수 있게 했다. 이들은 또 백방으로 돈을 마련해 14촌짜리 색텔레비죤을 갖추었다. 매일 저녁, 식구가 오손도손 모여앉아 텔레비죤을 시청하는 시간은 리할머니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였다. 요조당 부부의 가족들 또한 리할머니를 존중하고 부부를 도와 함께 리할머니의 생활을 보살펴주어 로인으로 하여금 가정의 따뜻함을 느끼게 했다.
1991년 여름, 상해에서 12년간 생활한 리할머니는 89세의 고령에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로인의 념원에 따라 온 가족은 함께 할머니의 유골을 고향인 연변에 모셔가 고향땅에 묻었다. 로인이 세상을 떠난 후 요조당 부부는 2, 3년에 한번씩 연변을 찾아 로인의 묘지에서 제를 지냈다.
“올해 연변에 가 할머니를 뵙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건강이 갈수록 나빠져 한번 돌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올해 타산을 말하면서 요조당은 감개 무량해하며 “저희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 리할머니는 친어머니처럼 사심 없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니 할머니에게 효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효도할 수 있었던 시간이 너무 짧은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고 눈시울을 적셨다.
보답을 바라지 않은 할머니와 평생을 다해 보답한 요조당 부부,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조선족과 한족의 이 ‘모자정’은 장장 22년 동안 이어진 가운데 연변과 상해에 이르면서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인간세상의 가장 진실하고 깊은 정감을 전달했다…
/류설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