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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엄마와 한복- 박봉화

2022-06-17 14:38:15

우리 외가집의 고향은 조선 함경북도 청진시쪽으로 해변가가 제일 이쁜 곳이라고 한다. 외할머니는 생전에 여름철 새하얀 파도와 해변 대왕게의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엄마는 다섯 남매중의 셋째딸로 태여났으며 우로 언니 둘에 아래로 녀동생과 남동생 각각 한명씩 두고 있다. 두살 때 외할머니 등에 업혀 두만강을 건너 연변을 거쳐 북으로 흑룡강 가목사시 화천현에 정착해 자랐다고 한다. 그뒤로 우리 아버지와 결혼을 하여 수화시 철려현으로 와 지금까지 쭉 계신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 여읜 엄마는 소학교를 겨우 졸업했으며 힘든 동년을 보내셨다고 한다. 키는 비록 작았지만 젊은 시절 가는 곳마다 깜찍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으셨다고 한다. 지금은 칠순을 넘어 동네로인이라는 말을 듣고 있지만 내 기억 속의 엄마는 그 시절 녀성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동네에서 앞장을 섰다. 봄 모내기철에는 누구보다 손이 빨랐고 여름철이면 밭김을 알뜰하게 매여 우리 집 터전은 항상 잡초가 없이 깨끗하고 야채들이 푸르싱싱했다. 가을이면 남성들 못지 않게 벼가을도 척척 잘했고 겨울이면 우리 다섯형제의 솜옷을 맵시있게 지었으며 바느질에 뜨개질까지 다양하게 잘했다. 나는 우리 엄마가 언제 한번 낮잠이나 늦잠을 주무시는 것을 전혀 본 기억이 없다. 항상 부지런하고 민첩해서 뭐든 남에게 뒤떨어져 본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특히 살림을 잘하고 료리 솜씨가 뛰여나 반찬이든 떡이든 순대든 뭐든 맛있게 만들어 동네 대사나 잔치 때는 꼭 불리워 다녔다. 동네사람들은 우리 엄마가 만든 생채무침의 맛을 단번에 알아맞추었다. 엄마의 손이 스쳐간 곳은 언제나 반짝반짝 빛이 났고 가장기물 정리에도 깔끔했으며 년세가 든 지금에도 엄마 집에 가면 먼지 한점 없고 가마목이 반들반들 빛이 난다.

내가 기억이 있어서부터 매년 3.8부녀절이 오면 엄마들은 모여서 음식을 나누어 드셨다. 민족의 전통 한복을 입고 춤 추고 윷놀이도 하면서 일년중에 그 하루만은 녀성들만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복을 입는 날은 유독 그 하루였던 것 같았다. 내가 소학교를 다닐 때 엄마의 한복은 목천으로 만든 푸른색 저고리에 검정비단과 류사한 원단의 치마였다. 우리 엄마뿐만 아니라 동네엄마들의 한복은 거의 다 목천 저고리에 비단이나 목천으로 된 치마였다. 그때 난 한복이 이쁜 줄 몰랐다. 말이 한복이지 비단도 부드러운 느낌이 없었고 목천은 더구나 빛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 엄마의 한복은 한 수준이 올라 연분홍 색상으로 된 비단 한복으로 바뀌였다. 여전히 3.8부녀절이면 한복을 입고 동네 녀성들과 매년 똑같은 놀이를 하였지만 변화된 것은 그때부터 활동이 마무리되면 단체기념사진 한장을 찍었다. 그리고 동네 환갑이나 진갑에 초청되면 한복을 입고 가셨다. 전의 한복보다 재단과 품질이 더욱 좋았으니 입을 만도 하였던 모양이다. 그 시기에 아무리 가정형편이 어려워도 조선족 녀성들은 시집 갈 때만은 무조건 한복을 입었으니 동네 아주머니들은 다 한벌은 가지고 있었다.

그뒤로 나는 고중과 대학에 진학하면서 집에 있는 시간보다 학교와 기숙사에 있는 시간이 더욱 많았으며 동네 대사나 엄마의 한복에 대해 더 깊은 인상은 없다.

남동생이 결혼할 때 엄마는 새 한복을 차려 입으셨다. 예비 며느리가 미리 준비해 놓았던 것이다. 이번에는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근사하고 품질이 고급스러운 멋진 한복이였다. 엄마는 동생 결혼식 날에 한번 입고는 더 이상 한복에 대해 신경을 쓴 적이 없다. 대도시로 이사왔는지라 누구네 대사에 초청되여도 한복을 입고 가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어느덧 엄마도 칠순을 맞이하게 되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는지라 민족의 전통 칠순잔치를 할 생각이 없다고 하셨다.

남동생이 결혼한 후 엄마는 동생이랑 함께 대련 금주구에서 살았고 나는 개발구에서 살았다. 동생 내외는 한국회사에 취직하여 성실히 근무하면서 애 둘을 낳고 잘 살았다. 엄마는 신체가 건강하셨고 동네의 많은 조선족 할머니들과 친구로 사귀였으며 마음씨 착한 올케와도 잘 지내셨다. 그런데 한국회사가 경기가 좋지 않아 철수하게 되자 동생 내외는 한국 제주도로 해외 창업의 길에 나서 려행사를 경영하였다. 엄마는 당분간은 한국에 갈 생각이 없어 혼자 지내셨고 나는 주말이나 평소에 시간이 되는대로 엄마 보러 자주 들렸다. 살림도 깔끔히 잘 하셨고 정신상태도 말끔한 엄마가 어쩐지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면서 병원을 자주 찾는 신세가 되였다. 엄마는 고향이 남은 인생에 더 편할 것 같다며 일단은 고향으로 가셨다.

동생은 대련시 금주구에 있는 집을 팔고 제주도에서 새 집을 마련하겠다고 하였다. 엄마와 형제들은 애들도 커서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니 집을 바꾸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동생이 한국에서 공증서를 보내여 집 파는 일과 집 정리하는 일을 나한테 맡겼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엄마가 고향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돌아가실 때 입는 옷을 장롱의 웃쪽에 올려놓았는데 그것을 잃어버리면 절대 안되니까 순풍택배로 잘 챙기라는 것이였다. 전화를 받고 나는 속이 덜컹했다. 막 버리지나 않았는지 해서 정신없이 달려가 장롱의 웃쪽에 놓인 비단천으로 잘 싸놓은 보자기를 떨리는 손으로 열어보았다. 순간 눈물이 핑 돌고 서러움이 폭발해 오래동안 엉엉 울었다. 코로나로 부모 형제들 얼굴도 못보는 데다가 엄마가 떠나신다는 소리에 얼마나 무섭고 당황했는지 몰랐다. 정서가 조금 안정된 후 나는 엄마한테 조용히 전화를 했다. “돌아가실 때 입는 옷이라고 해서 내가 가슴이 얼마나 떨렸는지 아세요”라고 투덜거렸다. 그러자 엄마는 죽을 때는 한복을 입어야 한다며 이제는 나이가 많아서 뭐든 미리 준비해 놓아야 자식들한테 부담주지 않으니 혼자 알아서 한번 입었던 한복을 준비해두었다고 하셨다. 나는 외할머니께서 97세까지 앉으셨으니 엄마도 무병장수할 수 있다며 안심하시라고 했다. 말로는 안심하시라고 했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코로나 시기라 건강이 안좋은 엄마가 잘못 될가봐 안절부절 못했다. 그리고 이튿날에 순풍택배로 한복을 엄마한테 보내면서 우리 엄마가 소중히 여기는 물품이니 잘 부탁한다고 여러번 고객서비스센터에 전화했다.

중국 국내에서 코로나가 통제되기는 했지만 완전히 끝나지 않은 이상 시름놓고 언니, 동생들과 함께 엄마 보러 못떠나고 있다. 고향에 황금물결 파도치는 가을이 다가오자 엄마는 또 바삐 돌아쳤다. 요즘은 빨강 고추를 말려서 고추가루를 내고 당콩, 가지, 고추, 오이 등을 해볕에 말리느라고 바쁘다고 하셨다. 우리 형제들이 그렇게 힘들게 하지 않아도 좋다며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아직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때 자녀들을 위해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냐며 힘든 줄 모르고 시간도 빨리 흘러가서 좋다고 하셨다.

부모가 살아 계셔야 비로소 집이 있고 엄마가 계셔야 형제들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엄마가 아니지만 우리 다섯형제를 원망 하나 없이 열심히 키워주시고 젊은 시절 화장품 한번, 비싼 코드 한번 챙기지 못하고 오직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만을 우리한테 보여주셨으며 또한 늘 부지런해야 한다고 교육한 덕분에 우리 형제 모두가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잘 살고 있다. 이쁜 한복을 화려하게 차려입고 자녀들과 손주들의 축복 속에서 팔순상 받으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엄마의 건강도 점점 좋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코로나19 사태가 하루 빨리 종식되여 흩어져 사는 우리 형제들이 엄마를 모시고 오손도손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기를 진심으로 기대하면서 늘 평안과 기쁨이 가득 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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