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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눈에 묻은 향기 - 남태일

2026-07-16 13:49:02

그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았다.

성주산 릉선은 며칠째 내린 눈에 묻혀 있었고 산 아래 빌라촌의 지붕들도 하얀 이불을 뒤집어쓴 듯 고요했다. 세상은 눈이 내리면 잠시 착한 얼굴을 한다. 허물어진 담장도, 벗겨진 페인트도, 오래된 상처도 눈 아래에서는 모두 비슷하게 보인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까지 눈이 덮어주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무렵 컴퓨터를 배우고 있었다. 젊었을 때는 먹고사는 일에 치여 배우지 못했던 것들을 뒤늦게 익히는 재미가 제법 컸다. 강의실에서 돌아오면 강사가 내준 숙제를 하느라 밤을 새우곤 했다. 문제는 집에 있는 낡은 컴퓨터였다.

전원을 누르면 한참 동안 검은 화면만 멍하니 바라봐야 했다. 마우스를 움직이면 늙은 소가 쟁기를 끌 듯 느릿느릿 반응했다. 문서 하나 저장하는 데도 인내심이 필요했다. 새 컴퓨터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 나이가 되도록 나는 돈의 속성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돈은 늘 필요한 사람에게 부족하고 필요 없는 사람에게는 넘쳐났다.

12월 어느 날이였다.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함박눈이 쏟아졌다. 가로등 불빛 속에서 눈송이들은 마치 하늘에서 팔락이며 떨어지는 무심한 메시지들 같았다. 나는 목도리를 고쳐 매고 천천히 걸었다. 그때 눈길 한복판에 검은 물체 하나가 보였다.

처음에는 누군가 버린 담배갑인 줄 알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집어드는 순간 손끝이 묵직해졌다. 지갑이었다. 나는 본능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은 없었다. 눈만 내리고 있었다. 지갑을 열었다. 순간 심장이 세게 뛰였다. 5만원권 지페가 두툼하게 들어 있었다. 먼저 컴퓨터가 생각났다. 그 돈이면 낡은 컴퓨터를 바꾸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반짝이는 새 노트북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버벅거리지 않는 화면. 순식간에 열리는 프로그램.

마음껏 영상을 편집할 수 있는 자유. 나는 지갑을 품 속에 넣고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집에 도착한 뒤에도 심장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난생 처음 큰돈을 주은 것도 아니건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인간은 가난할수록 돈의 무게를 더 크게 느낀다.

돈은 종이인데 왜 사람의 량심보다 무거운 것일까. 나는 지갑을 다시 열었다. 현금카드와 대학병원 진료카드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외국인등록증 한장.

사진 속 남자는 놀라울 만큼 야위여 있었다. 눈은 움푹 꺼졌고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그물처럼 얽혀있었다. 마치 오랜 병이 사람의 살과 시간을 함께 갉아먹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때 안해가 퇴근해 돌아왔다. 나는 돈지갑 이야기를 했다. 안해는 등록증 사진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작은 한숨을 내쉬였다.

“여보, 이 사람 교포네요, 많이 아픈 사람 같아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수술비일 수도 있잖아요.”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을 찔렀다.

수술비.

그 단어는 새 컴퓨터보다 훨씬 무거웠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창밖에서는 눈이 계속 내렸다. 나는 이불 속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한쪽에서는 새 컴퓨터가 손짓했다. 다른 한쪽에서는 등록증 속의 야윈 얼굴이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욕심은 달콤했고 량심은 불편했다. 인간은 누구나 선하게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막상 선택의 순간이 오면 선함보다 가난이 먼저 말을 걸어온다. 새벽녘이 되여서야 나는 결심했다.

다음 날 아침.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나는 주소를 들고 길을 나섰다. 집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낡은 주택의 반지하. 해빛도 제대로 들지 못할 것 같은 곳이였다. 문을 두드리자 잠시 후 문이 열렸다. 곰팡이 냄새가 먼저 나왔다. 그 뒤로 술 냄새와 눅눅한 겨울 냄새가 따라 나왔다. 문 앞에 선 남자를 보는 순간 나는 숨을 삼켰다.

사진보다 더 수척했다. 머리카락은 거의 빠져 있었고 피부는 누렇게 말라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기보다 날아가려는 가냘픈 숨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 사람 같았다. 방안에는 젊은 남자가 다리에 깁스를 한 채 밥을 먹고 있었다. 상우에는 반찬 몇가지와 소주 한병이 놓여 있었다.

아마 아들일 것이다. 그 젊은 얼굴에도 겨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가난은 집안의 공기까지 바꾸어 놓는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집에는 이미 큰 불행이 지나갔거나, 지금도 머물러 있다는 것을. 나는 조용히 물었다.

“혹시 어제 지갑을 잃어버리지 않으셨습니까?”

남자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잃어버렸습니다.”

나는 시간을 끌지 않고 지갑을 꺼내 건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지갑을 받았다. 그리고 갑자기 내 손을 붙잡았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마지막 동아줄을 잡듯이.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은 단순히 지갑을 찾은 기쁨 때문만은 아니였다. 그는 안해를 먼저 떠나보냈다고 했다. 중국에서부터 계속된 복통과 무기력 때문에 한국에 와 검사를 받았는데 대장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보험도 없었다.

수술비는 산처럼 높았다.

게다가 아들은 건설 현장에서 추락사고를 당해 다리뼈에 금이 갔다. 어제 잃어버린 돈은 친척들에게 어렵게 빌린 수술비였다. 그 말을 듣는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상은 늘 공평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건강한 몸으로 돈을 걱정하고 누군가는 돈 때문에 목숨을 걱정했다. 아들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남자는 지갑에서 5만원 한장을 꺼내 내 손에 쥐여주려 했다.

“커피라도 한잔 하십시오.”

나는 그 돈을 다시 그의 손에 접어 넣었다.

“수술 잘 받으십시오.”

그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집을 나서자 눈이 그쳐 있었다. 구름 사이로 해빛이 비쳤다. 눈 덮인 세상이 눈부시게 빛났다. 나는 한참 동안 눈길우에 서있었다. 어제밤까지도 그 돈은 내게 새 컴퓨터였다. 그러나 오늘 그 돈은 한 사람의 생명이였다. 돈의 가치는 금액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절박함이 담겨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눈을 한줌 집어들었다.

차가운 눈이 손바닥에서 천천히 녹아내렸다. 눈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국화꽃 향기가 나는 듯했다. 아마 그것은 눈의 향기가 아니였을 것이다. 욕심을 내려놓고 나서야 비로소 맡을 수 있는 인간의 향기. 세상은 결국 돈으로 움직인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내가 살아오며 배운 것은 조금 달랐다. 세상을 마지막까지 떠받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사람이다. 누군가의 절망을 외면하지 않는 마음.

그 마음이 있기에 인간은 아직 인간으로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성주산우로 겨울해살이 번지고 있었다. 눈은 모든 것을 덮었지만 사람의 마음만은 덮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돈지갑 하나를 돌려준 것이 아니라 눈 속에 잠시 묻혀 있던 내 량심을 다시 주워 들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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