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추석련휴, 나는 마누라와 함께 마트에 갔다. 남새와 구운 고기를 사야 했고 그래야 이 추석이 조금이나마 정감이 있을 것 같았다. 마트의 계단 앞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네살쯤 된 아이가 계단 중간에 누워 뒹굴며 징징 울고 있었고 그 리유는 엄마가 업고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아이를 살살 얼려 엄마에게 데려다 주었다. 아이는 나에게 환하게 웃으며 “할부지 일등이다!”라고 외쳤고 그 말에 나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아이의 눈망울은 맑고 맑아서 마치 내가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모습 같았다. 그 기분으로 남새를 사고 집에 돌아왔을 때 마누라가 타준 커피를 마시려던 순간 밖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올 추석은 정말 이상했다. 흐린 날씨에 비가 내렸고 지방려행 계획도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냥 집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창문을 바라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안해가 옆에 와서 “당신, 비가 오니 또 생각나나?”라고 묻자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응, 그래, 어쩔 수 없구나.”
나는 이제 70세가 다가왔다. 하지만 내가 태여난 고향이 어디인지 정확히는 모른다. 어렴푸레하게 기억나는 건 깊은 산골에서 아빠와 엄마 세 사람이 초막에서 살았던 모습이다. 벽은 수수장으로 둘러싸이고 천정은 벼집으로 덮여 있었다. 그때는 이부자리란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엄마와 아빠의 중간에서 잠들 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였다.
비가 와서 추울 때 아빠는 나에게 벼집을 두툼하게 덮어주며 “우리 아들 잘 생겼다. 아버지 꼭 닮았다”라며 다독였다. 그 말을 들으며 천정에 난 구멍을 통해 하늘을 보았고 문도 없는 이 집이 오히려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눈을 감고 달콤하게 잤지만 깨여나면 배고픔이 쓴맛으로 나는 건 잊지 못한다.
내가 태여났던 1957년에 중국은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식량이 부족해 사람들은 산나물을 뜯어먹거나 나무껍질을 벗겨 먹었다. 우리 집도 례외는 아니였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아빠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엄마에게 “아빠 왜 안 와?”라고 울며 묻자 엄마는 말끝을 흐리며 “아빠는 못 온다. 먹을 것을 찾다가 비탈에서 떨어졌어…”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엄마는 매일 울었다.
나는 그 때 죽음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엄마의 슬픔이 나에게도 전해졌다. 그렇게 울며 잠들었다가 깨여보니 엄마가 나에게 밥 한공기를 주었다. 수박색에 흰 점이 박혀 있는 이쁜 밥공기에 밥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걸 게눈감추듯이 먹어버리고는 더 먹고 싶어 공기를 높이 쳐들고 엄마를 쳐다보았다. 엄마는 “래일부터는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말하며 울었다. 나는 무서워서 “엄마, 난 밥 안 먹어. 엄마 울지 마”라고 말했고 엄마는 나의 눈물을 닦아주며 “리밍아, 엄마가 나쁜 엄마다”라고 말했다.
엄마는 키가 작았지만 언제나 머리를 깨끗하게 빗어 뒤로 묶고 비가 와도 옷을 깨끗하게 입고 다녔다. 어느 날 엄마는 나를 업는 띠와 보따리를 껴안고 나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갔다. 산골에서 본 적 없는 층계를 보았을 때 엄마가 나를 안고 올라가려 하자 나는 고집스럽게 엄마를 밀어버리고 나절로 올라왔다. 그곳은 기차역이었다.
어떻게 기차에 앉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깨여났을 때 엄마가 없어서 크게 울었다. 렬차장들이 나에게 엄마와 아빠의 이름, 나이, 출생지를 묻자 나는 그냥 서럽게 울었다. 옆에 승무원들과 다른 승객들이 나를 보고 눈물을 흘렸고 차안은 그야말로 눈물바다였다.
렬차 승무원들의 도움으로 나는 도문역에 내렸고 도문 향상가 파출소로 갔다. 파출소에서 토론한 끝에 나를 애가 없는 가정에 입양시키기로 했다. 이틀 뒤 여섯 집이 찾아왔는데 그들은 나를 귀엽다고 서로 입양하겠다고 했다. 파출소에서 나에게 어느 집에 가겠는가고 묻자 나는 얼굴이 예쁜 엄마를 보고 그 품으로 달려갔다. 그날부터 나는 조선족 가정에서 살게 되였다.
양엄마는 조선 천진예술단의 무용배우였고 양아버지를 만나 결혼했다. 전쟁이 끝난 후 양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왔지만 결혼한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없었고 양아버지가 3대 독자였기 때문에 나를 입양한 것이다. 처음엔 언어 장벽으로 소통이 힘들었지만 나는 그들의 행동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를 정말 아꼈다. 하지만 양엄마만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양엄마는 나때문에 집에서 모든 사랑이 나에게 쏠리는 것에 적응하지 못했고 애를 못낳는 자신을 저주했기 때문에 그 모든 심리 부담을 나에게 돌렸다. 그래서 양엄마와 혼자 있을 때는 자주 매를 맞거나 욕을 먹었다. 학비도 주지 않아 어린 나이에 석탄을 운반하는 일을 해서 학비를 마련했다.
그때마다 나는 구석진 곳에서 친엄마를 생각하며 울었다. 그래서 빨리 커서 집체호에 가거나 군대에 가고 싶어 신청했지만 가정에서 독자였기 때문에 두곳 다 갈 수 없어 그냥 한탄만 했다. 양엄마와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였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양아버지는 이를 알았지만 병으로 일도 못하고 양엄마 혼자 가정을 이끄는 것이 안타까워 알고도 모른척 했다.
나는 이 가정을 빨리 떠나기 위해 일찍 결혼했고 따로 살림을 차렸다. 나가기 전에 엄마의 방을 정리하다가 조선글로 사인한 오래된 칼라사진을 발견했다. 사진 속 엄마는 조선 천진예술단 무용배우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옆에는 미남 양아버지가 서 있었다. 사진 뒤에는 “1950년, 평양”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때 나는 엄마가 왜 그렇게 아파했는지 조금 리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양엄마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안타까워 정기적으로 돌아가 보았다. 얼마 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할아버지는 죽기 전 양엄마의 손을 잡고 “리밍에게 친엄마의 주소를 알려주어야 해. 그래야 그가 친엄마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여러번 당부했다. 양엄마가 할아버지의 말에 그렇겠노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고 나는 큰 기대를 하면서 마음이 설레여 며칠밤 잠도 제대로 못 잤다.
하지만 양엄마는 그 이후로 아무리 기다려도 친엄마의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게 허무한 날들이 지나고 양아버지도 돌아가셨다. 나는 그동안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사업을 하면서 혼자 살아가는 양엄마가 불쌍해서 우리 집으로 모시려고 했지만 양엄마가 동의하지 않아 양로원에 모셨다. 일년에 두번씩 방문했고 그때마다 양엄마는 나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어느 날 양로원 원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양엄마가 돌아갈 징조가 보인다고 했다. 나는 직장에서 한달 휴가를 맞고 양엄마를 간호했다. 나를 보자 양엄마는 매우 기뻐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내 아들이 북경에서 왔다”고 자랑했다. 양엄마의 병이 조금 호전된 것 같아 직장으로 돌아가려 하자 양엄마는 나를 붙잡고 “죽기 전에 꼭 함께 있자”라고 극력 말렸다.
그 말을 듣자 나는 지금까지 느꼈던 모든 미움과 슬픔이 눈녹 듯이 사라져버렸고 오직 양엄마가 불쌍하게만 느껴졌다. 사실 나도 생활의 핍박으로 친부모를 떠났고 양엄마도 아버지 하나를 믿고 혈혈단신으로 중국에 왔지만 불쌍하게도 친혈육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직장을 잃어도 양엄마의 마지막 순간을 지키고 싶어졌다.
양엄마는 그 이후로 매일 행복해 보였고 나를 옆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어느 날 양엄마는 나의 손을 꼭 잡고 “사랑하는 리밍아, 너는 나의 아들이다. 네에게는 친모란 없다. 엄마는 오직 나뿐이다”라고 말하면서 웃음을 짓고 세상을 떠났다. 나는 식어가는 양엄마의 손을 잡고 울며 “엄마, 나는 엄마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했다.
양엄마가 살아있을 때는 그렇게 미웠지만 오늘 이 추석비를 보며 그녀가 더 그리워진다. 어느 무명작가는 “정은 피보다 진하다”라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 나는 친엄마와 아빠를 잃었고 양엄마에게서 고통을 받았지만 결국 그들 모두는 나를 사랑해주었고 그 사랑은 나의 삶을 지켜주었다.
양로원에서 엄마가 돌아간후 나는 도문 파출소에 찾아갔다.
오랜된 기록을 번지다가 1962년 “산골 한족 녀자가 아이를 기차에 맡기고 사라졌다”는 보도를 발견했다. 기사에는 “녀자는 병으로 죽을 것 같아 아이를 살리기 위해 이렇게 했다”고 적혀 있었다.
오늘 밤 비는 계속 내리고 있다. 창문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니 친엄마와 아빠, 양엄마,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이 하나씩 떠오른다. 그들과 함께 살았던 시간은 짧고 힘들었지만 그것이 바로 나의 전부다. 추석비는 그리움을 더해 주지만 그 그리움 속에서 나는 그들에게 받은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으로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