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나는 오래 닫아두었던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 속에는 지난 삼십여년의 시간이 편지 묶음으로 잠들어 있었다. 누렇게 바랜 봉투들은 종이가 아니라 한 시절의 체온 같았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두툼한 봉투 하나가 손에 걸렸다. 결혼 후 안해가 타향에서 보내온 편지였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봉투를 열었다. 봉인을 푸는 순간, 오래 잠들어 있던 시간이 조용히 깨어났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 녀인의 삶이 걸어 나왔다.
“애아버지, 새해 안녕하세요. 아이들도 잘 놀겠지요.
어제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더니, 오늘은 눈보라가 휘몰아칩니다. 손님도 뜸해 식당 문을 닫고 앉아 있으니 집 생각이 나 이렇게 펜을 들었습니다.
그날 저는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글쪽지만 두고 집을 떠났습니다. 버스를 타고 심양역에 도착하니 오후 세시였습니다. 넓은 대합실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저는 그 속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순희가 적어준 주소를 쥔 채 역전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저녁 무렵에야 서탑에 닿았습니다.
그날 밤은 근처 려관에서 뜬눈으로 지새웠습니다.
이튿날 새벽, 저는 ‘서탑 로무시장’으로 나갔습니다. 광장에는 이백여명의 녀인들이 서 있었습니다. 아낙네와 색시, 처녀들… 모두 우리처럼 산골에서 나온 사람들이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사람은 사람이 아니였습니다. 값이 매겨지는 것은 물건 뿐이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젊은 처녀들은 하나둘 불려 나갔지만 나같은 녀인은 아무도 찾지 않았습니다. 점심을 굶고 저녁까지 서있었지만 돌아오는 길은 빈손이였습니다.
려관에 돌아와도 밥은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소리없이 울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에도 상황은 같았습니다. 입술은 마르고 가슴은 타들어 갔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빚 때문에 밤마다 술과 담배로 버티고 있을 애아버지를 생각하니 발걸음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다문 얼마라도 벌어 짐을 덜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날 저녁, 한 식당 주인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아지미, 밥점일 하겠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날부터 일이 시작되였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랭채를 만들고 고기를 썰며 손님들의 고함과 취기를 견뎌야 했습니다.
밤이 깊어 설거지를 마치고 나면 그제야 고향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애아버지 얼굴이 꿈마다 나타났고 다섯살 딸 생각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새벽마다 찬물에 손을 담그며 쌀을 씻고 있을 애아버지, 사람들 눈을 피해 밤마다 부엌에서 빨래를 하고 있을 그 모습이 눈에 선했습니다.
우리 팔자는 왜 이렇게 사나운가요. 열심히 살아도 왜 생활은 풀리지 않는 걸까요. 그래도 저는 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이 죄는 아니니까요.
애아버지는 제게 세상에서 하나뿐인 사나이입니다. 집에 돌아가면 더 좋은 안해가 되겠습니다. 그날에는 못다 한 말을 천천히 나누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1990년 1월 22일
안해로부터”
나는 한참 동안 편지를 내려놓지 못했다.
종이우에 적힌 것은 글자가 아니라 한 사람이 견뎌낸 시간이였다. 사십년 전의 그 겨울이 지금 막 내 앞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 같았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국의 아침은 이미 밝아오고 있었지만 그 빛이 모두에게 같은 온도로 닿는 것은 아니였다.
안해가 서있던 그 시장은 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자리는 다른 이름으로, 다른 모습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오늘도 많은 동포 녀인들이 간병인으로, 가정부로 하루를 시작한다. 누군가는 병실에서 밤을 지새우고 누군가는 낯선 집 부엌에서 조용히 하루를 연다. 그들의 손은 남의 삶을 돌보느라 바쁘고 그들의 마음은 늘 고향과 가족 곁에 머물러 있다.
집은 타인의 것이고 시간 또한 자신의 것이 아니다. 자식의 성장도, 남편의 늙어감도 화면 속에서만 확인한다. 주말이 되여야 겨우 얼굴을 마주하는 ‘주말부부’의 삶…
함께 살면서도 함께 살지 못하는 세월이 그렇게 흐른다.
그들은 묻지 않는다. 왜 내가 이곳에 와 있는지. 묻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묻고도 답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묻지 않는 것이다. 안해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다. 가정을 지켜낸 것은 큰 성공이 아니라 이름 없이 버텨낸 한 사람의 시간이였다는 것을.
나는 그 편지를 다시 서랍에 넣는다. 그러나 그날의 새벽까지 함께 넣을 수는 없다.
서랍은 닫혔지만 이국의 새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도 어딘가에서 한 녀인이 다시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