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단순한 자연현상이지만 때로는 사람의 마음에 막연한 우울을 내려 앉히고 때로는 모든 존재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단비가 된다. 나의 첫사랑도 그랬다. 하늘의 뜻이였을까, 공교롭게도 나는 쏟아지는 비속에서 실련의 쓴맛과 사랑의 황홀을 모두 맛보았고 또 그 비속에서 그녀와 재회하였다.
대학시절 여름의 어느 날이였다. 제비가 낮게 날아다니는 것을 보니 비가 올 듯 싶었다. 강의실에서 우산을 들고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비가 쏟아졌다.
비가 내리자 분주하던 일상도 잠시 멈춘 듯했고 마음에는 뜻밖의 여유가 스며들었다. 비방울이 가로수 잎과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는 경쾌한 음악처럼 들렸다.
그때 한 녀학생이 조심스럽게 내 우산 속으로 들어왔다. 비에 젖은 옷은 몸에 밀착되여 싱그럽고도 고혹적인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났다.
“우산, 같이 써도 괜찮지요?”
까만 눈으로 생긋 웃는 그녀를 거절할 남자가 어디 있을까. 그 온유한 미소가 내 마음을 비처럼 촉촉이 적셨다.
그녀는 평소 나를 마주칠 때마다 얼굴을 살짝 붉히며 다이얼 비누 향기를 남기고 말없이 스쳐 지나가던 후배였다. 우산 안의 공간은 작아졌고 그 의미도 달라졌다. 그녀가 팔짱을 살짝 끼고 걸을 때 매혹적인 녀성의 아름다움이 온몸으로 전해졌고 감미로운 목소리는 위스키처럼 나를 취하게 했다.
비가 바닥에서 튀여오르며 만들어내는 풍경은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비가 그치지 않고 우산을 쓰고 계속 걷기를 바랐지만 아쉽게도 비는 멎었다. 우리는 공원 귀퉁이, 파란 플라스틱 지붕이 덮인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서로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서서히 밀착되었다. 비방울을 한껏 머금은 작은 풀벌레와 나무들은 촉촉한 기운 속에서 더욱 싱싱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우리는 깊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현실은 늘 사랑보다 앞서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기업의 고위 간부였고 얼마 전 유럽의 한 지점장으로 부임했다. 농부의 아들인 나와 그녀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사람들이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온유했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녀자였다. 때로는 주장을 세우지 못하는 나약함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오히려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사회적, 경제적 격차는 관계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자격지심과 불안감을 솔직히 털어놓을 때면 그녀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도 농부 출신이예요. 오빠도 노력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그 말 한마디에 나는 늘 깊은 감동을 받았다.
봄이 가고 장마철이 돌아왔을 무렵, 그녀는 달라져 있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시간이 잦아졌고 침묵은 부자연스러울 만큼 길어졌다. 어느 날, 우리가 자주 가던 카페에서 만나자는 쪽지를 받았다. 오래전부터 느껴오던 불안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날 오후, 먹장구름이 몰려오더니 장대비가 쏟아졌다. 거리는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었다. 그녀는 이미 카페에 와 있었지만 얼굴은 하루 사이에 눈에 띄게 초췌해져 있었다.
“오빠, 나… 엄마랑 아버지 계신 유럽으로 가게 됐어요.”
그녀의 아버지는 외국에서 물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북경 청년을 예비 사위로 정해두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에서 폭풍이 몰아쳤다.
우리는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절벽 앞에 선 듯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만이 분명했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은 채 밖으로 뛰쳐나갔고 나 역시 비를 맞으며 뒤를 따랐다.
소낙비는 채찍처럼 우리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비물과 눈물이 뒤섞여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날 이후, 그녀는 편지 한장과 달고도 쓴 추억만을 내게 남긴 채 떠났다.
시간이 흘러도 나는 여전히 실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해 학업을 중단하고 휴학까지 했다. 그러나 결국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나의 유전자는 나를 농업대학으로 이끌었고 졸업할 즈음 정부가 우리 집 앞에 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뜻밖의 목돈을 손에 쥐게 되였다. 나는 그 자금으로 농업대학에서 개발된 최신 기술을 도입해 약재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사업이 점차 확장되자 주변에서는 자연스레 혼인에 대한 관심과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해가 지나 봄비가 내릴 듯한 어느 날, 맞선을 보러 가던 길에 사고가 났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였다. 상대 차에서 우산을 들고 나온 녀인을 보는 순간 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오빠!”
그녀였다. 예전보다 더 성숙했지만 이전처럼 눈빛에 가장 맑은 영채가 사라졌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손만 잡고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봄비가 내리는 송화강변에서 우리는 기적처럼 다시 만났다. 우산 우로 내리는 비소리는 여전히 정겨웠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나의 현재를 물었고 나는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비는 어느새 잦아들었다. 송화강변의 공기는 맑고 투명해졌고 물빛은 한결 푸르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봄은 제 몫의 얼굴을 되찾고 있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비랑 참 인연이 깊은 것 같아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말 한마디가 이 순간을 깨뜨릴 것만 같았다. 우산 우로 떨어지던 비방울은 멎었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대학 시절 처음 데이트하던 날처럼 천천히 걸었다. 말은 많지 않았고 침묵은 어색하지도 않았다. 지나간 시간과 엇갈린 운명 그리고 다시 마주한 지금까지– 그 모든 것이 말없이 발걸음 사이에 스며들었다.
그날 이후 우리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 인연이 어디까지 이어졌는지는 굳이 적지 않으려 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어떤 사랑은 함께 살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비는 그날도 예전처럼 우리를 잠시 같은 우산아래 묶어 두었다가 아무 말 없이 흩어졌다. 그리고 나는 안다.
그날의 비 속에서 우리는 다시 사랑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끝내 지워지지 않을 인연임을 확인했을 뿐이라는 것을.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문득 우산 속 풍경이 떠오른다.
젖은 거리, 낮게 드리운 하늘 그리고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
그 그림은 여전히 내 마음 어딘가에서 조용히 비를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