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직 후에도 병원 일을 이어가던 어느 날, 도쿄의 아들딸이 보내는 전화와 메시지가 이어졌다. “아버지, 이제 그만 쉬시고 일본에 오세요.” 시간이 흐를수록 그 부탁은 마음 속에 그리움으로 자라났다. 마침내 2018년 설날, 아들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나리타공항을 나서자 낯선 공간 속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나 여기에 있어요.” 고개를 돌리니 어릴 적 토끼처럼 뛰여놀던 딸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내 가방을 빼앗아 메더니 짐수레마저 밀려 했다. “아버진 정말 젊은이같은 패기가 넘치시네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떠올랐다. 일본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지낸 세월이 그녀를 어엿한 어른으로 성장시켰다.
딸과 사위는 나를 데리고 도쿄 구석구석을 보여주었다. 도쿄타워의 전망, 아사쿠사의 고즈넉함, 시부야의 활기, 긴자의 화려함까지. 그 모든 풍경 속에서 딸의 성장한 모습이 더욱 반가웠다.
남평(南萍). 딸애의 이름은 오빠 ‘남양(南洋)’의 ‘양’자에 삼수변을 더해 지었다. 부평초처럼 세상의 풍랑을 견디며 잔잔한 물가에서 편안히 살라는 소망이 담겨 있다.
나는 일찍 부모를 잃어 딸이 친할머니 품을 알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 장모님이 그 빈자리를 채워주셨다. 딸이 태여났을 때 병원에서 기다리시던 장모님은 갓난아기를 포대기에 싸안고 “이 세상 최고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셨다. 친손주가 생긴 후에도 항상 우리 딸만 업고 다니시며 “이 아이는 마음씨가 곱고 정이 많다”고 칭찬하셨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은 짧았다. 외할머니가 병석에 눕자 다섯살 남평은 어린 나이에도 할머니의 손발이 되여 가사에 도와나섰다. “제가 크면 꼭 일본에 류학가서 할머니 병을 낫게 하는 약을 많이 사올게요.”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키기 전에 외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심한 식중독으로 앓아 누웠다. 열이 나고 구토에 설사까지 하면서 하루 수차례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로 드나들었다. 어린 딸애는 시키지 않았는데도 랭수에 적신 물수건을 나의 이마에 얹어주고 토사물을 말없이 치워주었다.
아들애는 대입을 앞두고 류행가요에 정신이 팔려 공부가 학급에서 중등 수준으로 밀렸다. 그러나 소학교 2학년인 딸은 학급 2등을 했으며 ‘학습 최우수상’과 ‘3호학생’ 영예를 취득하였다. 당시 남존녀비 사상의 영향을 받아 ‘아들을 먼저 돌봐야겠다’는 생각에 딸에게 제안했다.
“남평아, 한학년 뛰여넘어 볼까?”
딸애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방학 한달간 우리 부녀는 소학교 3학년 과정을 함께 했다. 지성이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고 딸애는 시험에서 놀라운 성적을 받아 4학년으로 월반했고 이 소식은 동네 이야기거리가 되며 중국조선족소년보에 ‘갈대소녀-남평’이란 기사로 실리기도 했다. 이는 그의 오빠에게는 더욱 큰 충격을 안겨 주었으며 그가 명문대학인 할빈공업대학에 입학하는 동력이 되였다.
그러나 영광의 리면에는 고달픔이 있었다. 체육 시간에 키가 큰 한두살 이상인 친구들을 힘들게 뒤쫓는 딸의 모습을 본 안해는 눈물을 터뜨렸다. 얼마 후 남평은 지쳐 병원에 실려 갔고 그제야 나는 내 결정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깨달았다. 병상에서도 공부를 멈추지 않는 딸애의 강인함에 나는 미안함과 자랑스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딸애는 마음이 여렸다. 엄마를 잃고 아빠와 사는 친구를 불쌍히 여겨 집에 데려와 점심을 나눠 먹기도 했다. 내가 퇴근할 무렵이면 아파트 단지 내에서 롤러스케이트를 타면서 웃음으로 나를 마중하였고 설명절이나 생일날에 어른들이 주는 돈을 쓰지 않고 모아서는 엄마 모르게 200원이나 300원, 심지어 500원씩 나의 손에 슬그머니 쥐여주면서 생글 웃고는 내가 도로 주기도 전에 뛰여갔다. 실은 당시 500원은 적은 돈이 아니였다. 그 돈으로 나는 아이들의 학용품도 사고 맛있는 음식도 해주었다. 그 작은 손에 담긴 마음이 고마워 나는 그 돈을 정성껏 사용했다.
남평의 길은 꾸준히 빛났다. 우수한 성적과 피아노 실력, 착하고 성실한 품행으로 매년 ‘문명학생’을 수상하며 중고등 과정을 마치고 할빈리공대학 일본어학과에 진학했다. 입학 시 군사훈련에서 보인 적극성으로 그는 학생회 조직위원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 후 할빈리공대학 학사, 일본 도쿄중앙대학원 석사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지금은 일본의 한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고 있다.
내가 한국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 가장 크게 기뻐해 준 이도 딸이였다. 그리고 지금도 명절이면 꼭 “친구들 모시고 즐겁게 보내세요”하며 용돈을 보낸다. 그 속에는 어린 시절 그녀가 내 손에 쥐여주던 500원의 온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만 같다.
다섯살 아들을 키우며 경쟁이 치렬한 일본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내 딸 남평이. 그녀가 남편과 손잡고 오손도손 행복한 래일을 꾸려가기를, 부평초처럼 잔잔하되 그 무엇에도 꺾이지 않는 강인함으로 빛나는 나날을 보내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