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홍규 《목단강 합수목에서》
리홍규의 《목단강 합수목에서》는 단순한 강물의 합류를 묘사한 자연시를 넘어 존재의 소멸과 재생, 언어의 한계와 침묵의 의미 그리고 생명의 근본적인 흐름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시인은 목단강이 더 큰 강물에 합류하는 지점에서 벌어지는 '죽음과 신생'의 순간을 포착하고 이를 통해 개체와 전체, 상실과 획득, 일시와 영원의 변증법을 날카롭게 조명한다. 본 시평은 이 작품을 시어의 선택과 배렬, 이미지의 구조 그리고 궁극적으로 표출되는 철학적 사유의 층위로 나누어 집중적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1. 시어의 중첩과 변주: '잃음'과 '흐름'의 변증법
시의 출발점은 "할 말을 잃었는가"라는 물음이다. 여기서 '말을 잃음'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거대한 존재의 흐름 앞에서 언어의 표현 기능이 무너지는 경험, 즉 숭고(sublime)의 체험을 암시한다. 강물은 단순히 소리를 잃은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근본적인 변환점(합류)에 직면하여 기존의 정체성('랑랑하던 말', '명창같던 말', '절창 같던 말')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 상실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죽음과 신생이 함께 하는 이곳"이라는 진술이 보여주듯 여기서 '잃음'은 더 큰 전체에의 'dissolution'(해체)이자 새로운 차원의 'becoming'(생성)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이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은 흐른다"는 사유나 동아시아 철학에서 말하는 '생생불식'(生生不息)의 우주관 즉 끊임없는 소멸과 생성의 과정으로 세계를 보는 관점과 맞닿아 있다.
시인은 이 '잃음'의 변증법을 '굽이굽이', '달리고 달려', '흐르고 흘러'와 같은 중복과 반복의 리듬으로 강렬하게 구현한다. 특히 "지렁이처럼 꼬리를 잘리우고 허리를 끊겨도/ 청룡인듯 꿈틀꿈틀 꿋꿋하게 살아났어라"에서 '지렁이'와 '청룡'이라는 대비되는 이미지는 생명력의 근본적인 형태가 단순한 련속성이 아니라 단절과 고통을 통한 변형과 도약임을 보여준다. 이는 들뢰즈(Gilles Deleuze)의 'become-animal'(동물-되기) 개념 즉 고정된 정체성을 해체하고 타자의 흐름에 동화되여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련상시키며 생명의 저력이 억압과 단절 속에서 오히려 강력하게 발현됨을 시사한다. 이러한 변용의 과정은 '해해년년', '천년만년', '시시각각', '순간순간'이라는 시간어의 대조를 통해 더욱 립체화된다. 즉 강물은 거대한 지질학적 시간 속에서도 순간순간 죽고 다시 태여나는 미시적 과정의 련속체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시간성은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말한 '지속(durée)' 즉 과거, 현재, 미래가 분리되지 않고 중첩되여 존재하는 질적인 시간 개념을 련상시킨다.
2. 이미지의 구조: 대립과 융합의 풍경
시의 공간적 배경인 '합수목'(合水目)은 그 자체로 강력한 상징이다. 이 지점은 두개의 흐름이 만나 하나가 되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원래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죽음의 장소'이자 새로운 정체성이 시작되는 '탄생의 장소'이다. 시인은 이 공간을 "세찬 파도는 묵묵히 유유한 강물에 합류한다" 또는 "한줄기 맑은 물이 서서히 탁류의 혼돈에 퍼져간다"와 같이 대립적인 이미지의 조화로 표현한다. '세찬'과 '유유함', '맑음'과 '탁류', '혼돈'과 '퍼짐'의 대비는 합류 과정의 에너지와 복잡성을 가시화한다. 이는 단순한 대립이 아니라 대립되는 힘들이 상호 침투하고 변형되여 새로운 질서를 생성하는 '대립적 통일'의 과정이다.
이러한 이미지 구조는 시인의 시선과도 깊이 련결된다. 시인은 "나도 너처럼 할 말을 잃었거늘"이라고 고백하며 강물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는 객관적인 관찰자가 아닌, 존재의 흐름 속에 동화된 참여자의 시선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시에서 강물은 외부의 대상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내면 풍경이자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조건을 은유하는 매개체가 된다. "네가 살찌운 기름진 옥토", "품어준 울창한 수림", "수태한 호수와 물길" 그리고 "하나의 왕국"은 강물이 단순한 물리적 흐름이 아니라 생명과 문명을 잉태하고 키우는 생성의 근원임을 보여준다. 강물의 '말'은 노래나 언어 그 자체를 넘어 생명을 창조하고 문명을 탄생시키는 '생산적 힘(potenza)'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3. 침묵의 미학과 생성의 철학: '초혼곡'에서 '영월곡'으로
시의 종결부는 결정적인 전환을 보여준다. 강물은 더 이상 "검푸른 강물에 애절한 초혼곡"을 푸는 것이 아니라 "청청 하늘에 초생달 높이 걸어놓고 비장한 영월곡 한마당 또 한마당" 뽑는다. '초혼곡'이 죽은 령혼을 부르는 애도의 노래라면 '영월곡'은 영웅적이거나 비장한 흥겨운 노래를 의미한다. 이 전환은 상실과 죽음을 애도하는 단계에서 그것을 생명의 필수 불가결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그 과정 자체를 장엄하고 힘찬 흐름으로 승화시키는 인식의 전환을 의미한다. "침묵보다 더 깊은 말"이라는 최종적 선언은 모든 표층적인 언어를 초월한 존재자체의 '말함'(Sagen) 즉 침묵 속에 내재된 더 근원적인 '말'의 차원을 가리킨다. 이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말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명제를 뒤집는 듯한 표현으로, 오히려 '침묵'이야말로 존재의 가장 본질적인 '말'이 이루어지는 공간임을 시사한다.
결론적으로 리홍규의 《목단강 합수목에서》는 한편의 서사시이자 철학시이다. 시인은 강물의 합류라는 자연 현상을 통해 개체성의 소멸이 곧 더 큰 전체로의 편입이며 죽음이 새로운 생명의 전제 조건임을 노래한다. '잃음'은 결코 무(无)가 아니라 새로운 '얻음'을 위한 생성의 순간이다. 시인이 구축한 이미지의 구조와 리듬은 이러한 생성의 변증법을 감각적으로 구현해낸다. 이 시가 던지는 메시지는 생태적 위기와 개인적 소외감이 팽배한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고정된 정체성에 대한 집착을 넘어 끊임없는 흐름과 변용의 과정 속에서 자신을 열어가는 용기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맞이하는 수많은 '작은 죽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더 풍요로운 생성의 계기로 삼을 수 있는 지혜에 대한 초대이기 때문이다. 시의 마지막 련에서 강물이 뽑는 '영월곡'은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자만이 들을 수 있는 생명 자체의 장엄한 합창인 셈이다.
(《장백산》 위챗 공중계정 공동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