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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신문 우리가 지키자” 전영실 작가의 문학적 열정과 인생 드라마

2025-12-30 12:27:28

2025년 11월 중순, 연변작가협회 회원인 전영실(69세) 작가가 문학상을 수상한 상금으로 흑룡강신문 구독을 지원한다는 소식이 퍼졌다. 그녀는 자신이 소속된 우리봄빛동네 위챗 단톡방에서 "우리말 신문은 우리가 지키자"고 호소했다.

그녀의 호소에 사람들이 너도나도 신문을 주문했다. 이처럼 그녀는 신문 구독을 지지한 리유에 대해 "나는 흑룡강신문 애독자인데 정말 취미성이 있고 재미있게 잘 꾸려진다", "신문 부수가 하락하는 상황에서 우리 신문이 소실될가봐 걱정되고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시상식 자료사진.

어린 시절 신문으로 위로받은 아이

1956년 도문에서 태여난 전영실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신문을 읽는 것을 특별히 좋아했다.

어린 시절,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도 그녀의 어머니는 해마다 신문을 주문했다고 한다. 신문은 그들이 세상을 내다보는 창구였고 힘든 령혼을 위로받는 정신적 식량이였다.

"엄마의 영향을 받아 저도 신문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신문을 기다리는 재미에, 읽는 재미에 푹 빠졌지요"라고 그녀는 회상했다.

그녀는 "신문을 읽으면서 글쓰는 재간도 익히고 사회에 대한 인식을 넓혔으며 인생의 리치를 터득했습니다"고 말했다.

장애 딛고 일어나 작가의 꿈 키워

그녀는 9살 때 골질괴사에 걸려 소학교 2학년 후학기부터 6학년까지 학교를 못 다녔다. 엄마와 할머니의 등에 업혀 천진골과병원을 다니며 꾸준히 치료를 받은 덕분에 다리가 기적적으로 나아 다행히 장애자로 되지 않았다.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였으나 학교 관계자가 "소학교 2학년도 졸업 못한 아이를 어떻게 중학교에서 받겠는가"며 입학을 거부했다. 그녀는 엄마와 함께 교도처 주임을 찾아 "열심히 노력하여 모르는 부분을 채워갈테니 제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하여 입학을 허용받았다.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곤난이 첩첩했다. 초중 1학년 시험에서 제일 높은 조선어문 점수가 57점이였다. 선생님이 하는 강의도 리해할 수가 없었다. 수학시간에 얘기하는 A, B가 무엇인지, 플러스, 마이너스가 무엇인지, 약분, 곱하기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같은 학급 아이들에게 너무 자주 물어보니 아이들이 귀찮아서 슬슬 피했다.

그녀는 겨울방학에 학교에서 조직하는 소학교 기초 보충수업에 신청했다. 코흘리개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며 소수점, 곱하기, 약분 등 기초를 열심히 배웠다.

초중 2학년 때 입단을 하여 단지부 선전위원이 되였다. 그 때 그녀는 "산골로 농촌으로", "조국이 부르는 곳으로", "혁명이 가장 수요하는 곳으로", "전등불도 없는 곳으로"… 이런 당시 시대적 풍모에 어울리는 글들을 쓰면서 작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그 후 도서관에 다니면서 많은 신문과 잡지를 접촉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흑룡강신문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한다.

"'녀성의 궤짝에는 항상 옷 한벌이 모자란다', 이러루한 기사들이 참으로 좋았어요"라고 그녀는 회상했다.

통신원 양성반에서 시작된 문학려정

그녀는 연변일보 통신원 양성반에 참가하여 소식보도와 통신을 쓰는 법을 배웠다. "장백산에 6평방미터 되는 무전소가 섰다"라는 짧은 글을 쓴 것이 그녀의 첫 작품이였다. 

이후 점차 긴 글을 써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1997년에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제목으로 다단계판매에 관한 글을 써 장백산 잡지에 발표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이 글은 장백산 잡지에 발표되자마자 연길 서점에서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사람 잡는 다단계판매"라는 포인트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글쓰기 그리고 엄마와 함께 하는 행복

어린 시절 아픈 딸애를 업고 가산을 털어 병원을 다니던 어머니, 그 등우에서 그녀는 "이제 커서 꼭 엄마에게 효도해야지"라는 생각을 가졌다.

자식들이 성장하여 어른이 되였지만 힘든 나날들을 견디여오느라 고달팠던 어머니는 드디여 몸져 눕게 됐다. 다섯 자식이 서로 엄마를 돌보겠노라고 다툼이 일어난 가운데 엄마가 둘째 딸인 자기와 함께 살고 싶다고 해서 매우 기뻤다고 그녀는 말했다.

전영실씨는 90여세 고령인 엄마를 11년째 돌보고 있다. 병환이 심하여 음식을 씹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매일 음식을 갈아 튜브로 섭취시킨다. 그리고 머리를 깎아드리고 옷을 갈아입혀드리고 목욕 시켜드리고 안마를 시켜드리는 등 매일 바쁘게 보내고 있다.

"나는 계속 시간이 모자랍니다. 매일 밤에 한시나 두시에 잡니다. 그리고 아침에 네시반이면 깨납니다. 먼저 엄마 숨소리부터 들어봅니다."

엄마는 그녀의 불우한 동년을 지켜주었던 산과도 같은 존재였고 그녀의 정신적인 기둥이였다. 그녀는 엄마와 함께 하는 모든 시간들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엄마와 하루라도 더 많은 시간을 가지기 위해 늘 기도하고 최선을 다한다.

그녀는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 동안 많은 글을 많이 썼으며 엄마로부터 수많은 창작 령감을 얻었다. 그리고 엄마는 언제나 그녀의 첫 독자가 되여주었다.

올해 한해만 해도 그녀가 쓴 "엄마와 함께하는 행복"이 로인세계 2기에서 발표됐다. "당신은 어떤 꽃이고 싶은가"라는 글은 로인세계 3기에서 발표되였고 "우리 집 화분꽃"이라는 수필은 길림신문에 실렸다. "끝까지 엄마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라는 수기는 로년세계 9기에서 발표되였으며 "빨래줄"이라는 글은 청년생활 수기 우수상을 수상했다. "엄마의 물동이"라는 수필은 료녕신문에 실렸고 수기 "인생 드라마"는 전국애심협회 장려상을 수상했다. 수기 "내사랑 조선어"는 한민족 체험수기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해란강여울소리에 7수의 가사를 발표했다.

1987년에 글쓰기를 시작해서 30여년간 그녀는 1200여편의 각종 장르의 글을 써서 연변녀성, 청년생활, 로인세계, 연변문학, 장백산, 연변일보, 흑룡강신문, 료녕일보, 길림신문, 해란강여울소리 등에 발표하였고 여러편이 선후로 문학상 동상, 은상, 금상을 수상하였다. 그녀가 쓴 "결혼등기"란 영화극본이 영화로 상영되였다.

요즘 글쓰기와 각종 문학행사에 바삐 보내고 터밭가꾸기 등 취미생활에 푹 빠진 그녀는 "하루가 너무 짧아요, 하루가 26시간이였으면 좋겠어요!"라며 매일 충실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리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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