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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가장 뜻 깊었던 그 날 - 장영주

2025-11-19 16:04:03

1944년생인 내가 금년에 여든한살로 파파 로인이 되고보니 세월이 참 빠르다는 실감이 난다. 청춘의 열기로 넘친 20대에 연변대학 조선어문계 3학년을 다니면서 1966년 국경절에 있었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눈깜작할 사이 59년이나 흘렀으니 말이다.

이 반세기 넘는 사이 매번 국경절만 돌아오면 평생에서 가장 뜻 깊었던 그날의 모든 것이 눈앞에 삼삼이 떠오르며 기분이 엄청 좋다…

1966년 9월 23일, 국경절을 며칠 앞두고 우리 연변대학 학생들은 주은래 총리의 부름에 따라 북경에 가서 국경절 대시위 경축모임에 참가하게 되였다.

백문불여일견(百闻不如一见)이라고 그날 아침, 자나깨나 수도 북경을 외우고 그리워했지만 직접 내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였다. 하여 북경역에서 내린 우리 시골 대학생들의 눈이 화잔등 같았다. 백미터 경주해도 될만큼 넓은 거리가 온통 빨간색으로 물들었고 그렇게 수많은 빨간 기대를 꽂은 차들이 실북 나들 듯이 오갔다.

이윽고 특별이 우리를 마중나온 버스가 도착했다. 우리는 그 차에 앉아 천안문광장을 지나게 되였는데 그때 누구도 말 한마디 없이 뚫어지게 쳐다 보기만 하였다. 지금처럼 휴대폰이나 있으면 사진이라도 찍으련만 그저 교과서나 그림에서 보아오던 천안문이 생각보다 굉장히 더 높아 보여 감탄하며 눈자욱으로 새겨 넣었다. 그정면에 모셔져 있는 모주석 초상도 더욱 생동하고 엄숙해보였다. 버스가 인민대회당, 혁명렬사기념비, 력사박물관, 천단을 지나서 북경민족학원 울안에 도착하였다.

우리 일행은 전문 우리를 안내하는학생을 따라 학생 기숙사로 들어가 여러 침실에 나누어 들었다. 장족 학생들과 각지에서 온 소수민족 학생들이 들어왔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이번에 우리가 북경에 오게 된 것은 주은래 총리께서 소수민족 대학생들에 대한 나라의 관심과 배려를 전달하고 또한 우리의 가장 큰 소원을 실현시켜 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9월 25일, 주은래 총리께서 환한 웃음을 띄우시고 체육관에 오셨다. 우리 각지에서 온 소수민족 대학생들은 너무 격동되여 련속 끊임없이 열렬한 박수로 환영했다. 주은래 총리께서는 일일이 우리들의 손을 잡아주시며 학습을 잘 하라고 당부하시고 마지막으로 직접 박자를 치시며 “대해 항행은 키잡이의 힘”이라는 노래를 시작하시는 것이였다. 우리도 따라서 다 같이 목청껏 불렀다. 이윽고 주은래 총리께서 퇴장하려고 손을 흔드시였다.

학생들은 일제히 기립하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는 모주석을 만나고 싶어요!”라고 일치하게 높이 외쳤다. 주은래 총리께서는 손을 높이 드시며 앞으로 저으셨다. “알겠으니 돌아가시오”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불과 몇분 안되는 짧은 만남이였지만 우리의 가슴은 흥분으로 들끓었다.

10월 1일, 우리는 천안문 앞의 거리 장안가에서 모주석의 접견을 받았고 모주석께서는 오른 손을 들어 환영한다는 뜻의 손짓을 하시였다. 그런데 그만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여 질서를 문란시켰다. 장족 학생들이 모주석을 보고 너무 기쁜 탓에 그 자리에 멈춰서더니 땅에 넙적 엎드리고 주석대를 향하여 절을 하는 탓에 횡대로 앞으로 전진하던 대오가 헝클어졌던 것이다. 그 바람에 뒤에서 따라오던 대오가 갑자기 물결처럼 밀려오며 앞으로 넘어졌다. 얼마후 겨우 대오가 수습되여 우리가 모주석의 자애로운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10월 22일 새벽 두시에 통지가 와서 우리 소수민족 대학생들은 숙사 운동장에 집합하였다. 저녁에 준비한 흰 만두 두개와 노란 배 두개를 가방에 넣고 우리는 2행대로 줄을 서서 약 두시간 정도 걸어 어떤 교외의 길가에 도착하였다. 량쪽에는 논밭이였는데 논밭의 푸른 벼들이 바야흐로 이삭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때는 동방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춤노래를 좋아하는 위글족 학생들이 박수를 치며 큰길 중간에 원을 짓고 신나게 춤을 추었다. 소수민족 옷을 화려하게 입은 다른 민족 학생들도 손북을 치며 흥이 나게 춤을 추었다. 우리 조선족들도 가만이 앉아있을리 없었다. 조선민족 복장을 입은 녀학생들이 둥기당기 새장고 울리며 옹헤야를 추고 도라지에다 노들강변 춤을 추니 곁에 있는 각 민족 학생들이 눈이 휘둥그래서 박수를 쳐주었다. 이렇게 각 민족이 어울려 춤사위를 한창 벌이고 있을 때 호각소리가 울리며 “조용! 조용!”하면서 총책임 학생이 모두 앉으라고 손짓했다.

드디여 기다리고 기다리던, 보고싶고 또 보고싶었던 위대한 모주석을 만나뵙게 되였다. 대오는 조용하게 앉은 자세로였지만 우리의 심장은 쿵쿵쿵 높이 뛰였다. 드디여 부릉부릉 소리와 함께 다섯대의 선발대 오토바이가 인자종대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일제히 벌떡 일어서서 “모주석 만세!”를 높이 외쳤다. 가슴아 높뛰지 말아, 눈물아 흐르지 마라! 경애하는 모주석을 똑똑히 보아야지 하면서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고 서서히 다가오는 뚜껑을 연 장갑차를 주시하였다. 제일 첫 차에는 주은래 총리께서 장엄한 표정으로 지나가고 두번째 차에 모주석께서 오른손을 들고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웃음으로 맞아야 할 이 천재일우의 시각에 심장은 딱 멈추는 것 같았고 장족 학생들의 격동된 울음소리가 높아졌다. 모주석께서는 우리를 향해 손짓하시면서 자애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시였다.

나는 숨을 죽이고 이 시각의 감격을 가슴깊이 새겼다. 모주석께서 주신 이 은혜, 이 영광, 이 에너지들은 그 어떤 위험도 곤난도 극복해나갈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였다. 불바다에라도 뛰여들 담대함이 불쑥 치솟았다. 나는 나의 청춘도 일생도 조국이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갈 준비가 되였다. 모주석께서 타신 차는 천천히 앞으로 전진하였다. 눈물은 그냥 둑 터진 물마냥 줄줄 흘러내렸다. 장족학생들은 좀 더 보고싶어 앞으로 달려나다가 홍위병들에게 제지당하여 엉엉 통곡을 하였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이제 해방된지 8년밖에 되지 않은 서장은 금방 노예의 쇠사슬에서 벗어나 대학이란 전당에서 행복하게 공부하고 있으니 그 감격이 얼마나 컸으랴!

나도 후에 학습에 더 노력하였고 일터에서도 그때를 떠올리면 용솟음치는 열정이 북받쳐올랐다. 그날의 그 감격을 힘으로 바꾸어 영원히 생명이 다 하는 그날까지 조국에 충성하고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리라 다짐하였고 또 그렇게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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