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께 효도를 하느라 부모님 앞으로 시내에 아빠트를 산지도 어언 20년이 가까와 오지만 부모님은 여전히 농촌생활을 고집하고 계신다.
"아직 터전을 심을 힘이 있는데 시내생활은 몇해 후로 미뤄야겠다."
"헛간의 땔나무들이 아직 많으니 저 땔나무들을 다 쓰면 시내로 이사해야지."
"아빠트에서 열공급 전후로 추운 고생할 것 있니? 그래도 따뜻한 온돌이 제일이야."……
가지가지 리유로 아빠트 생활을 거부하는 부모님의 심사는 알고도 모를 일이였다.
그러한 부모님이지만 해마다 섣달 그믐날만은 "앞뒤로 뛰여다니며 고생하는" 우리들을 위하여 마지못해 아빠트에 올라오셔서 설을 쇠군 하신다.분주한 그믐날을 보내고나면 정월 초하루부터 마음이 고향집에 가있는 부모님을 못이겨 결국 초이튿날 짐을 꿍져 시골집으로 모셔가는 수밖에 없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버지는 부엌에서 재를 쳐내고 불을 일구며 어머니는 앞치마를 두르고 가마에 물을 붓고 군불을 때신다.
내가 보다못해 "참, 아버지 어머니는 왜 복을 누릴줄 모르시나요? 불을 때지 않아도 뜨뜻한 아파트에서 폭신한 쏘파에 앉아 춘절만회를 보면 얼마나 좋으세요? 하필이면 이런 고생을…"하고 핀잔삼아 한마디 하였더니 어머니는 어줍게 웃으신다. "우리는 그래도 추우면 불을 때고 따끈따끈란 온돌에 잔등을 덥히면서 티비를 보는 우리집이 더 좋단다." 어느새 아버지는 마당도 깔끔하게 쓸어놓으시고 난로불도 활활 지피셨다. 이러는 부모님을 바라보면서 나는 속으로(참 못말리는 성격들이셔)하고 감탄할 뿐이다.
사실 부모님의 속셈을 나는 다소 알고 있었다. 부모님이 농촌생활을 즐기시는 원인은 평생 농촌일이 몸에 배인데도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리유는 바로 그 ‘땅’에 대한 애착때문이라는 것을.
필십고개를 훌쩍 넘기신 부모님은 올해도 한국 간 이웃집 채마전까지 부치신다. 사불땅이여서 가물을 무척 타는 척박한 땅이지만 새벽부터 어스름이 질 때까지 씨뿌리고 지게로 날라다 물을 주고 김을 매고 밭이랑을 쳐줘 북을 돋우어주는 부모님의 손길아래 터전노릇은 그런대로 하고 있는 터였다. 그러다보니 부모님의 손은 항상 터실터실 갈라터지고 늘 쟁기에 맞히고 긁히워 상처투성이였다.남편이 보다못해 올해만 부치고 래년부터는 그만두라고 권고하면 "그건 명년에 가봐야 알지…"하고 건성으로 대답하신다. 이듬해가 되면 또다시 밭을 갈아엎고 씨붙임을 시작한다.터전도 터전이거니와 집주변 도랑을 쳐내고 길옆 풀 매는 일 또한 만만치 않다. 어머니는 풀 한포기 날세라 알뜰하게 매군 하였는데 장마철이 되면 새벽에 어스름한 달빛을 빌어가면서 풀을 뽑으신다.
부모님의 땅에 대한 사랑은 극진하다못해 집착에 가까왔다. 개혁개방초기 밭을 농호에 떼주고 생산책임제를 실시하자 직공호인 우리집에도 세식구 몫으로 7~8무의 수전이 차례졌다. 그런데 그 수전들은 지세가 높은 곳은 물이 잘 올라갈 수 없고 지세가 낮은 곳은 땅이 랭하여 씨붙임도 잘 안되는 와지여서 아버지가 아침 출근 전이나 주일날에 논물을 보고 농약을 치고 비료를 쳐주고 어머니가 손가락끝이 터지도록 김을 마주었지만 첫해 농사는 징구량 임무를 바치고나니 우리 식구의 일년 량식밖에 남지 않았다.
음력설을 쇠고난 부모님은 지게를 지고 삽과 곡괭이를 들고 여우도 눈물을 흘린다는 초정월 매서운 바람을 맞받아 밭으로 나갔다. 곡괭이로 높은 곳의 흙덩이를 깨서는 지게에 담아 와지로 날라다 ‘정지’하러 간 것이였다. 한삽, 두삽, 한지게 또 한지게… 이렇게 흙덩이를 깨고 지게에 지여 나르고 또 날랐지만 높은 밭은 여전히 높았고 일은 좀처럼 축나지 않았다. 점심에는 보온병의 더운물로 꽁꽁 언 누룽지를 씹어삼키며 시장기를 달래고 계속 일에 달라붙었다. 두다리가 휘청거리고 눈앞에 별찌들이 날아다녔지만 새해 농사를 생각하며는 두다리에 힘이 불끈 솟아올랐다. 오후 네시쯤이 되여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질 무렵, 얼굴에는 땀에 반죽된 흙먼지를 푸욱 뒤집어쓰고 눈섭이며 눈초리며 입언저리에 하얗게 성에를 쓰신 부모님이 기진맥진하여 집에 들어오시던 그 모습이 오늘 이 시각까지 내 눈언저리를 따갑게 자극하군 한다. 이렇게 4~5년 고생한 끝에 부모님은 생산대로부터 분배받은 수전을 옥답으로 만들었으며 또 밭머리의 억새풀과 당나귀풀이며 쟁피를 뽑아내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수전 면적을 한쌍 이상으로 늘이는데 성공하였다. 아버지는 흑룡강일보에서 농업생산기술에 관한 기사를 꼭꼭 읽어두고 과감히 실천하면서 농사일을 익히셨고 나와 어머니는 초복까지 논김을 맸는데 김을 어찌나 알뜰하게 맸는지 쟁피 한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렇게 알뜰경작(우리집은 밭면적이 적은 직공호여서 알뜰경작만이 수입을 늘이는 유일한 방법이였다)을 고집한 덕분에 우리 집은 해마다 마을에서 무당 생산량이 최고로 손꼽혀 한다하는 실농군들도 "참, 직공호가 어쩌면 해마다 무당 생산량이 최고를 차지한다니? 참 알고도 모를 일이군"하며 탄복하군 했다.
"한치의 땅도 소중히 다뤄야지, 어떻게 일군 땅이라고…" 혼자말처럼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에는 땅에 대한 더없는 경의와 사랑이 깊이 스며있다. 나의 눈앞에는 20세기 40년대 초, 어린 자식들을 업고, 손에 이끌고 저 멀리 조선반도에서 살길 찾아 만주땅을 찾아오신 할아버지 할머니,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모습들이 우렷이 떠오른다.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아성에 도착하여 이사짐을 풀려 했으나 결국 마적들에게 모든 것들을 빼앗기고 또다시 땅이 넓고 인가가 드물다는 북대황을 찾아 동으로, 동으로 향하였다는 할아버지네 일행이였다. 그러다가 승자하진을 거쳐 이인반, 신중, 흑태로 집단이주를 하셨다는 나의 친가집과 외가집의 깊은 인연 역시 ‘땅’이 맺어준 인연이였다.
땀흘려 가꾼 덕분에 우리 가정은 아버지의 빈약한 로임과 책임전에서 나온 수입으로 친척들에게 손 하나 내밀지 않고 나와 동생의 대학공부 뒤바라지를 빠듯하게 할 수 있었다. 땅은 우리 가정의 명줄이였고 희망이였으며 행복의 원천이였다.
나와 동생이 대학을 마치고 호구를 시내에 붙이게 되자 생산대에서는 량식전을 회수하였고 수전농사도 환갑을 바라보는 아버지로 말하면 많이 버거웠다. 어머니의 량식전 3무를 농호에 도급준 부모님은 또다시 새로운 ‘땅’을 발견하게 되였다.
마을에서 맨 남쪽에 위치한 우리집 앞으로는 작은 물도랑이 흐로고 있었는데 강가의 공지는 마을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버려두는 쓰레기와 재더미로 주변환경을 어지럽혔고 우리집 울바자는 수시로 불려오는 재먼지를 덮어쓰기가 례사였다. "쓰레기 금지"라는 패말을 써붙여도 늘어나는 재무지와 쓰레기무지는 막을 길이 없었다. 의논끝에 부모님은 쓰레기무지와 재무지 우에 강냉이를 심어 환경정돈을 하기로 하였다. 밀차로 남들이 버리는 구들고래를 훑어낸 쓰레기와 낡은 벽을 허물어낸 건축쓰레기 등을 실어와서 웅뎅이를 메우고 쓰레기무지를 강냉이밭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5~6년간 노력한 끝에 쓰레기무지는 어데론가 자취를 감추었고 우리 집은 늦강냉이와 줄당콩이 키돋움하는 자그마한 문앞터전을 한뙈기 가지게 되였다.
어느덧 한국바람이 불어 마을사람들은 하나둘 한국나들이를 나가게 되였고 터전을 맡아 다뤄줄 ‘지킴이’가 필요했다. 그때마다 마을사람들은 땅 사랑이 지극한 부모님을 찾아왔으며 한해 농사를 마친 겨울철이 되면 나는 고추가루며 찰옥수쌀, 팥, 열콩같은 특산물을 그분들에게 부쳐주는 임무를 맡아야 했다. 혹시 그분들이 고향에 오시면 부모님은 감자, 배추나 무우 그리고 찰강냉이쌀을 넉넉히 주셨고 된장이나 고추장까지 주셨다. 부어도 부어도 끝없는 땅사랑이였고 나누고 나눠도 끝없는 시골인심이였다.
세월은 흘러 나도 어느덧 정년퇴직을 맞아오게 되였고 부모님댁에 자주 드나들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였다. 봄에는 부모님을 도와 하우스를 씌우고 배추씨랑 시금치씨도 뿌려주고 여름이면 가지모, 고추모도 해주고 가을이 오면 빠알갛게 익은 고추들을 썰어 따가운 가을볕에 말리면서 부모님의 땅사랑을 알아가고 있다.
래년에는 이웃마을 양돈장에서 똥거름을 실어다 흙냄새 구수한 유기농채소들을 달달하게 심어낼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