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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가계부- 최정옥

2025-08-18 13:50:01

나에게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나만의 수자 속에서 골몰하며 가계부를 적어내려가는 오랜 습관이 있다.

가계부는 단순한 수자의 라렬이 아닌, 삶의 온도가 빼곡히 담긴 내밀한 저금통장이자 가정주부의 살림살이 비법과 능력을 과시하는 일종 유력한 수단이다.

젊은 시절에는 딱히 기록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오랜 시간과 세월이 흘러간 후에도 컴퓨터에 저장하듯이 모든 것을 충분히 기억할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하물며 가정의 수입과 지출같은 구체적인 수자는 오히려‘식은죽 먹기’로 사소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이의 문턱을 넘어서자 삶의 복잡다단한 일상과 생리적인 기억력의 감퇴는 가계부에 대한 필요성이 더 박절해진 나였다. 가계부는 그렇게 나의 절박함에 운명처럼 다가왔다.

우선 크게 총수입과 총지출로 분류하고 소비항목에서 구체적으로 기록하며 그 소비정도와 규률에 근거하여 다시금 주밀한 계획과 예산이 나온다.

그 소비항목으로는 일상생활소비 즉 먹고 쓰고 하는데 필요한 지출, 건강방면에 대한 소비, 교육방면에 대한 소비, 각종 세에 대한 소비, 부조 돈에 대한 소비 등으로 분류하여 도표를 설계하였다.

이렇게 설계된 도표의 빈 칸을 하나씩 채워나가는 과정은 흩어져 있던 삶의 조각들을 제자리에 맞추는 기록이였다. 이 기록을 통해 비로소 가정생활 경험과 가정의 소비 요구에 근거하여 총수입에서 그 소비지출이 각기 차지하는 비례를 대체적으로 굴려보고 되도록이면 가정의 비상금도 어느정도 예산하여 제한된 경제상황에서 선후를 잘 파악하며 살림을 조직하였다.

갓 결혼하여 손에 쥔 것이 거의 없던 시절, 오직 나 자신을 향한 지출을 극단적으로 줄여야만 다른 것을 마련할 수 있었다.

나는 타인과의 관계, 즉 인정의 지출에 있어서만큼은 마음을 여는 삶을 지향해 왔다. 누군가의 기쁨과 슬픔을 나눌 때의 비용은 기꺼이 나 자신을‘푸대접’함으로써 감당해야 할 몫이였다. 수입의 원천이 지극히 제한적이던 그 시절, 내가 베푼 온기는 결국 나 자신에 대한‘랭대’를 앞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단 한번도 그 선택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안의 무언가를 덜어냄으로써 타인에 대한 마음을 채울 수 있다는 사실에 충실감을 느꼈다.

이렇듯 계획적이고 심중에 수자가 있게 살림살이를 영위해 나가니 손에 엷게 쥐여진 제한된 수입일지라도 소비의 선후순서를 잘 배렬해가며 보다 합리하고 여유롭게 생활을 조직해 나갈 수 있었던 것 같았다.

또한 가계부는 살림을 꾸려나가는 우리 가정주부들이 집착소비와 충동구매를 삼가하며 가정생활을‘하루살이’ 신세가 아니라 마음이 든든하게 그리고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가정의 경영방식과 효과적인 대책이 아닌가 싶어진다.

이렇게 가계부를 쓰다보면 자연적으로 가정경제 실제와 분수에 맞게 최대한도로 생활의 질을 보장해가며 소비와 지출에 대한 장기계획과 단기계획을 착상해가며 생활을 보다 여유롭고 윤택나게 영위해 나갈 수 있다고 본다.

“딸은 엄마를 닮는다”는 오랜 속담처럼 나의 이 습관은 어머니의 삶에서 비롯되였다. 알뜰한 살림군이셨던 엄마는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게으른 주부는 아침밥 해 먹고 저녁이 되여 쌀독에 바가지 긁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저녁거리가 떨어진 줄 안단다. 살림은 마음에 수자가 있어야 하는 법이야. 계획 없이 사는 것은 주부의 수치다.” 엄마의 그 말씀은 단순한 잔소리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한 주부의 경건한 자세를 일깨우는 경전과도 같았다. 나는 오늘도 그 어록을 마음 속으로 되뇌이며 풍요로운 삶을 향한 의지를 다지며 가계부의 빈칸을 채워나간다.

물론 가계부를 쓰는 행위를 향한 세상의 시선이 늘 고운 것만은 아니다. 누군가는“좁쌀을 톱으로 켜는 피곤한 삶”이라며 혀를 차고 또 다른 누군가는“감기조차 남에게 베풀지 않을 옹졸하고 리기적인 사람”이라는 선입견을 가질 것이지만 나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결코 타인에게 등을 돌리는 린색한‘좁쌀’로 살아오지 않았다고, 오히려 필요할 때는‘통 큰’ 주부였다고 자부하기도 한다. 가계부를 쓰는 것은 돈을 움켜쥐기 위함이 아니라 돈의 흐름을 명확히 파악함으로써 삶을 더욱 유연하고 합리적으로 조률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우리는‘기록’과‘인심’의 관계에 대해 깊이 사색해볼 필요가 있다. 가계부를 쓴다고 하여 인심이 박약해진다는 것은 크나큰 오해이자 편견이다. 오히려 제한된 경제래원을 계획적으로 운용할 때 비로소 우리는 실속있게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진정한 여유를 갖게 된다. 단 가계부를 적으며 그 수입과 지출에 근거하여 생활을 보다 계획적으로 예산하고 영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계획없이 감정과 기분에 따라 돈을 쓰는 이들은 정작 자신의 삶조차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 허덕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 진퇴량난의 상황속에서 타인을 돌아볼 마음의 겨를이 과연 생겨날 수 있을가?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계획된 살림속에서라야 비로소 이웃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구체적인 나눔이 가능하다.

물론 생활이 윤택해진 오늘날, 나의 계획과 예산에도 변화가 동반한다. 과거처럼 오직 나 자신만을 다그치고 희생시키는 방식에서 벗어나 이제는 나 자신에게도 너그러워지는 법을 배우고 있다. 머리를 유연하게 굴려 나를 위한 소비에도 기꺼이 지갑을 열며 후회없는 여생을 가꾸어 가려한다.

지난 세월, 내가 적어내려온 가계부가 버팀목이 되여주었기에 우리 가정의 돈고생을 견디고 이만큼의‘볼 장’을 볼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래서 가계부는 가정살림을 안받침해준 저금통장의 기능을 갖고 있어 우리 가정의 대소사의 비바람도 막아줄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일을 처리하든 사전에 마음속‘수자’가 있어야 원만하게 진행할 수 있듯이 가정살림도 마찬가지다. 조리있게 가계부에 적어놓은 수자를 바라볼 때면 복잡했던 마음이 한결 후련해지고 웬지 모를 충실함이 차오른다.

눈에 비벼 넣어도 표가 나지 않을 만큼 적은 수입으로 어떻게든 살림을 꾸려가려 머리를 치약짜듯 짜고 굴려가던 그 시절의 나, 그 치렬했던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었을 것이다.

가정도 사회의 한 세포로서 그 규모와 범위가 다를 뿐 그 안에도 엄연히 재무관리의 원리가 작동한다.한 기업이 비전과 경영방침을 필요로 하듯 가정도 통일적이고 계획적인 관리방식이 필요하다.

우리 가정의 균형잡히고 윤택한 삶을 위하여 나는 누가 임명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이 가정의‘재무총감’이라는 직무를 자처했다. 그 누구의 투표도, 선거도 필요 없는 종신직이다. 때로는 아픈 머리를 싸쥐고 로심초사하며 남편의 지청구를‘깍쟁이’라는 역할로 감내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더 좋은 래일을 위한 가정주부인 나의 직책일 것이다.

어느덧 반세기가 된 주부의 삶, 색바랜 옛 가계부들을 펼쳐볼 때, 단순히 수입과 지출의 기록을 넘어 나의 청춘과 열정, 한 가족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갓난 아이의 배내저고리 값, 가족 려행을 위한 적금, 남편의 넥타이 값, 아이의 등록금, 년로하신 부모님의 병원비… 그 수자들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며 나에게 자신의 삶을 비추는 가장 정직하고 깊이 있는 거울로 되였다.

가계부를 적는 과정은 시종일관‘기록’을 동반한다. 나는 이 행위를 통해 기록의 중요성을 온 몸으로 실감한다. 기록은 모든 것의 시작을 증명하는 원시적인 근거이자 미래를 설계하는 디딤돌이다. 기록을 통해 과거를 분석하고 현재를 진단하며 비로소 미래를 향한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이는 가정뿐 아니라 기업경영, 더 나아가 한 나라의 운영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의 성패에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미리 계획도 없이‘헛막대기질’을 하며 요행을 바라는 이에게 성공이라는 열매가 주어질리 만무하다. 아무리 많은 돈이라도 면밀한 계획과 타산도 없이 쓰다 보면 결국‘하루살이’ 신세를 면치 못한다.“버는 것만큼이나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옛말은 그래서 단순한 격언을 넘어선다. 쓸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한 가정주부의 지혜와 능력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기록을 통해 총화하고 그에 따라 계획을 세우며 실속 있고 주밀하게, 마음 속에 늘 수자있게 일을 처리한다면 이루지 못할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기꺼이 가계부에 아라비아 수자를 열심히 적어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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