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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문과 글문은 어떻게 다른가?

2025-08-18 13:50:56

말은 두뇌에서 사유를 거치고 단어와 토를 합성한 후 한구절 한구절씩 성대를 통하여 발성하면서 말하려는 상대에게 전달된다.

글도 역시 뇌에서 사색을 경과한후 집필하는 방식을 통하여 원고지 혹은 백지에 기록되고 또는 핸드폰 키보드에 의해 형광막에 현상한다.

근간에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문화에 길들여지면서 나는 알게 모르게 말문이 막혀 버린다고나 할까, 좌우간 그런 느낌이 때때로 머리에 떠 오른다. 경하게 표현하면 언어가 퇴보되고 있다는 것을 감촉한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간격이 생기고 녀자 셋이면 장마당이라는 설이 옛말로 되였으니 그럴법도 하다. 핵가족이 중심인 시대 아주 큰 터밭에 달랑 오이 두개만 달려있는 상태다. 헐렁한 큰 집에 두 식구가 식사하는 때를 제외하고는 각기 침실에 들어앉아서 손바닥 안에서 세상을 보고 있다.

조그마한 폰 안에60억의 사람들이 활동하고 대형 비행기, 고속 기차가 질주하며 수를 헤아리기에도 아름찬 자가용이 네거리에서 쏜살같이 달린다. 첨단과학, 전자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결과다.

몇년 전에 이런 예언을 본 적이 있다.“앞으로 인류는 인공지능에 의하여 완전히 통제 될것이다” 글을 보면서 나는 피씩 웃었다. 전기 스위츠만 내리면 될 일을 가지고 왜 그러냐고. 어리석고 성숙되지 못한 고작 유치원 애들 정도에 머물은 내 사유가 한심할 정도다.

실지 생활 체험을 통하여 절실히 느끼는 바가 있다. 나는 이미 휴대폰, 텔레비전, 노트북의 포로가 되였다. 그 안에 손발이 꽁꽁 묶이웠으니 뛰쳐 나오기가 힘들다. 인간대 인간의 대화가 적어지고 독단 사유가 많아지니 성격은 과묵하고 괴벽스럽고 의심이 많아졌다.

하기에 지금은 예전과 달리 일상과 세상일을 내 자신이 느끼고 체험하기보다는 남들의 인생 세계를 관람하고 유람하며 완벽하게 각색하고 짜임새가 빈틈없는 리상화 사회를 지향하면서 사는 전자화 기성 시대다.

물론 문화적으로는 향수하고는 있지만 기성 체험 문화에 길들여지고 있고 모든 일이 간단하고 명료하다. 그리고 거의 대화가 없는 언어 무성 시기에 진입하였다.

영아로부터 그런 환경에서 살아간다. 엄마들은 아기와 마주 보면서 입놀림과 눈짓으로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손에 폰을 쥐고 아기를 무릎우에 같은 방향으로 앉혀 놓고 함께 본다. 아기는 과장된 화면과 현란한 몸짓, 폭력, 피가 랑자하고 잔인한 비현실 속에서 사회를 감지하기 시작한다. 후과를 상상해 보시라.

어른들도 처음에는 톡으로 대화를 하다가 차차 그것마저 번거롭게 느끼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문자 전성 시대에 살고있다.“좋아요” 세 글자면 간단하고 편리하니 쓰기 좋아지고 줄임말이 류행되는 형편이다. 그 세글자까지 또 번거롭게 생각하더니 도처에 쌔고버린 담쟁이풀 꽃같은 이모티콘으로 대체하고 있다.

대화가 없는 사회는 랭랭하고 화기롭지 못하다.60년대와2천년까지는 친척 사이에도 래왕이 빈번하고 동네집 부녀자들이 서로 뻔질나게 이웃집 나들이를 하였다. 정보를 교환하고 기쁨과 슬품을 함께 나누었지만 현재는 고독에 파묻히고 자아세계에 도취되여 자페증 환자처럼 살아간다. 다른 사람이 간섭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싫어한다.

언어는 서로 교류하고 래왕하는 생산 활동 가운데서 발전되고 완미화되였다. 아주 어릴 때에 나는 벙어리는 말하는 성대 즉 발성기관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오해했는데 사실은 청각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한다. 이 발견은 나로 말하면 콜롬보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획기적인 것이였다. 오! 언어 즉 소리를 접수하지 못해서 말을 못하는구나! 그러니 어린애들이 말을 배우는 것은 부모와 교환하고 따라하기고 흉내 내기고 모방이다. 모든 앎이 그렇다.

일정한 시기가 지나서 두뇌에 상당한 단어량이 축적되고 언어 정보와 판단, 언어조합 능력이 완벽하게 발전하여야만 새로운 어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대화가 없는 시대에 휴대폰에만 매달려 사는 아이들이 독창적인 언어를 만들고 구사할수 있을까? 심히 걱정된다. 앵무새 따라하기다. 말소리가 또랑또랑한 앵무새는 흉내는 일품인데 제 두뇌에서 만들어 내는 언어는 한마디도 없다. 즉 말을 하고도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모르는 판국이다.

나도 그렇다. 청각과 성대가 제대로이지만 내 두귀에 들리는 소리는 전부 영어 직역이 아니면 혀 꼬부라진 소리다. 하여 나는 점차적으로 내 본색인 모어를 망각하고 반응이 늦어지고 류창하게 구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기자 취재가 있을 때면 우리 연길 시민들의 발언이 가장 순통하지 못하다. 장기적으로 두가지 언어 환경에서 살다보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성 언어 수준으로 된 것이다. 찰떡이 목에 걸린 것처럼 꺽꺽거린다. 시청하는 사람들이 답답하다 못해서 속에서 방망이 같은 것이 욱하고 치민다.

근간에 나도 문자와 친구하고 글문 안에서만 자맥질하면서 살다보니 마치도 말하는 벙어리처럼 되였다.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을 때도 발언을 할라치면 먼저 문자가 떠오른다. 소리는 목젖이라는 문턱에 걸려서 오락가락 자맥질하다가 한고개 넘어로 되넘어 도망간다. 글을 쓰는데는 거의 막힘이 없는데 글문만 트고 말문이 막히면 이건 또 어떻게 해석하라는 것인가.

나는 글문이 텄지만 우리 자손들은 읽을줄을 모르고 해독을 못한다. 여러가지 객관적인 요소로 하여 지금 각일각 그렇게 되여가고 있다.

거기에다가 내 말문까지 쇠퇴해 버렸으니 나는 마치도 사품치는 강물에 빠져서 허우적 거린다는 착각에 괴롭다. 물론 본가집이 있으니 기둥은 튼튼하다. 글문과 말문은 두갈래 철길처럼 영원히 병존하고 발전하여야 하는데 손군 세대들은 문자부터 거의 백지다. 언어도 모른다. 조사한데 의하면2020년도부터 오늘까지 소학교에 입학한 애들이 모음과 자음관을 넘지 못하였다고 한다. 보충 수업도 없다고 한다.

대세가 그러하니 무의식이 사람을 그렇게 몰아간다. 글을 쓴들 또 어쩌랴, 보아줄 사람이 없는데. 이것이 사회 발전의 퇴보일까, 아니면 진보일까. 차차 내 글문도 막히려는 기미가 보인다.

전례없던 그 세월에 우리 세대는 문맹퇴치 정도에 그쳤다. 나는 밴대풀처럼 강한 생명력으로 지금 요만큼 정도의 문자에 숙련되였다. 우리 세대와 차세대 손군들 세대까지 쭉 이어진 련관성이 없고 사다리가 없는데 하늘로 오를 수가 있을까. 이일을 어찌하랴! 안타깝기만 하구나!

저 하늘의 밀려오고 밀려가는 검은 구름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내가 무덤에 들어가는 날 순장품으로 함께 묻힐 나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작품이여, 숨이 막히고 답답할 것인데 구세주는 없을까?

아기별이 총총한 밤하늘, 비록 컴컴한 밤이지만 희망으로 넘치누나. 저 별들을 따다가 내 가슴에 쌓아두자. 답답할 때에 하나씩 꺼내보고 희망을 가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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