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걸 회장(왼쪽)과 필자.
주변에서 자신들의 몸값을 올리기 위한 학력·학위조작, 능력과시와 도를 넘는 신분포장을 일삼는 자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오히려 그러지 못한 소박한 이들을 바보 취급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부류와 달리 한줄기 청량수같은 인물이 있다.
"나는 순수한 농민의 아들이다" "나는 공부를 하지 못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중국말을 제일 못하는 기업인이다"
끝없이 소박한 어조로 자신의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사람, 그는 또한 '위대한 사람보다는 남에게 도움되는 사람이 되여야 한다'는 순박한 신념을 자신의 인생 전부에 쏟으며 창업 신화를 기록해가고 있다. 그는 40년 동안 상업계의 고지를 하나씩 정복하며 뜨거운 열정과 생명력으로 오늘의 커시안그룹을 일궈냈고 그 눈물겨운 간고한 창업사는 수많은 이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다. 그가 바로 현재 홍삼과 온열의료기기 기업을 세계적 굴지기업으로 키워가고 있는 커시안그룹 통솔자 박걸 회장이다.
나는 워낙 박회장과 깊은 인연은 없었다. 같은 연길공업개발구단지에서 길 하나를 사이두고 건물만 마주보고 있을 뿐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인연의 실타래는 10여년 전 한 절친한 지인의 덕으로 이뤄졌다. 당시 그는 귀주의 한 유명주류 기업과 손잡고 동충하초술을 개발하려는 방안을 고려 중이였고 마침 우리가 주류 공장을 운영하던 중이라 서로 교류의 차원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첫 만남에서 나는 그에 대한 기본 이야기를 접하게 되였다.
그는 1960년대 초 흑룡강성 녕안현 발해진 강서촌에서 태여나 14살에 부모를 따라 연길로 이주했다. 가난한 농가의 출신이지만 비옥한 흑토지가 그에게 굴하지 않는 의지와 깊은 의리를 일찍부터 심어주었다. 어릴적부터 그는 가정의 중임을 떠메고 부모를 도우며 녀동생들을 보살피는 '어린가장'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청년시절에는 의리와 인정이 많기로 소문이 났고 어린 나이임에도 천부적인 교제능력으로 '아이왕'으로 불렸다고 한다. 또 학업은 중단했으나 포부는 잃지 않았다. 낮에는 작은 장사를 했고 밤에도 <신화사전> 한권을 붙들고 중국어를 독학했다. 19살 때부터 험난한 상업의 바다에 뛰여들면서 그는 안해본 일이 없었다. 소고기와 명태도 팔아봤고 작은 상점을 열기도 했으며 수리기술을 배우고 쓰레기 처리업무를 도급받는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청춘의 고단하고 치렬한 삶은 그에게 영원히 굴복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을 단단히 심어주었다. 그렇게 수많은 실패의 고비를 넘으며 먹는 것조차 어려웠던 방랑 시절을 보내던 그는 개혁개방의 물결 속에서 무역 개척을 시도했다. 1991년 무역회사를 설립, 온몸으로 부딪치며 시장에서 경영노하우를 터득했다. 불확실한 시장변화와 정책조정 등 영향으로 회사는 문을 닫았지만 포기를 모르는 그는 미약한 자금을 쥐고 북경으로 진출해 새로운 도약을 꿈꿨다. 그때 북경진흥굉업무역유한회사를 설립해 량곡과 서비스업을 주로 했으며 끊임없이 사업의 출로와 방향을 모색해나갔다. 이렇듯 깊이 있고 세련된 사고는 그에게 과감히 도전하는 개척정신을 키워주었다.
운명의 전환은 북경에서 찾아왔다. 박회장은 온열 업계의 기회를 접했고 모 한국회사 관계자를 통해 대건강분야를 깊이 료해하게 되였는데 이것이 새로운 사업의 방향이 되였다. 2003년, 그는 파산위기에 처한 한국계 기업 '커시안'을 성공적으로 인수했다. 그때 누가 상상했으랴, 바람 앞의 초불같던 이 이름이 전국에 600개가 넘는 생활관을 가진 업계의 선두주자로 성장하리라고...매번 좌절하고 넘어질 때마다 자신감이 항상 그를 새로운 높이로 이끌었다고 말하던 박회장의 '슬럼프 반등 리론'이 천애지각 곳곳에서 커시안의 꽃을 피워올린 것이다. 수없던 비바람과 세찬 천둥과 찬 얼음을 뚫고 올라온 생명례찬, 신록의 희망과도 같이 말이다.
온열 업종에서 지속적인 경쟁우세를 확보하기 위해 그는 보건 약석(药石)을 중심으로 기술혁명을 벌이고 세차례에 걸친 대규모 제품 업그레이드를 주도했다. 그 이면에 깔린 놀라운 패기와 비범한 리더십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외 또 하나의 웅대한 사업은 홍삼사업이였다. 세상은 "세계의 인삼은 중국을 보고 중국의 인삼은 길림성을 보라"고 말한다. 박회장은 한국 홍삼산업의 번영을 목격하고 인삼대국인 중국이 홍삼산업의 규모와 브랜드 구축에서 부족하며 시장 또한 외국자본시장에 의해 독점되였다는 점을 깊이 인식했다. 그가 홍삼 산업에 진출하기로 결심한 것은 상업적 선견지명일뿐만 아니라 무거운 민족적 책임감에서 비론된 것이였다. 이같은 사명과 소명으로 그는 일찍 <연변인물록>에 선정되였고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련속 <중국품질신용인물상>(中国质量诚信人物奖), <중국의료기기업계10대신용기업가상>(中国医疗器械行业十大诚信企业家奖) 등의 영예를 수여받았다.
우리의 첫 만남으로 돌아가 술을 매개로 한 그 교류를 떠올려본다. 당시 그는 이미 중국 유명 전통 소주 브랜드와 협력할만한 위치에 있었다. 이에 비해 내가 창업한 회사는 이제 막 세상에 고고성을 울린터라 규모는 작았지만 나는 그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을 큰 성적과 영광으로 새겨놓았다. 또 같은 내놓으라 하는 술꾼인 우리는 며칠밤을 새워가며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허나 스스로를 술꾼이라 자부하는 나조차 그에게는 두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자리를 몇번이나 옮겨가며 마셔도 그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으니 말이다.
이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속으로 두가지 념려를 해보았다. 첫째, 이토록 과음을 한다면 대업을 짊어진 그가 건강을 해칠가봐 걱정이였다. 동행한 지인에게 그가 꼭 절제하도록 조언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기도 하였다. 둘째는 사적으로 그가 백주산업에 손 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다. 내가 보기에 중국 전통 소주 산업은 석양산업이였다. 더욱이 인민의 건강은 민족의 번영과 국가부강의 중요표지이며 국민건강정책을 완선화할데 대한 '건강중국행동'이라는 발전전략이 중국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명확히 제기되였을 정도로 국가와 사회는 '대건강'(大健康)을 추구하고 있다. 이 시대적 흐름을 거스르는 산업의 미래는 당연히 어둡다고 보았다. 게다가 중국은 백주의 나라로 큰기업들이 판을 치는 현황에서 우리 기업들이 생존하기가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다…
이후 우리는 서로 형제로 호칭하며 정은 깊었으나 각자 바쁘게 보내는 날들을 지냈고 또 특히 박회장이 사업판도를 꾸준히 넓히고 운영하는 상황이라 련락은 자주 이어지질 못했다.
그러던 2023년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려 모든 산업이 시들고 거리는 텅 비였던 시절, 우리 회사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연길공항개발구에 땅을 사서 신축공장을 건설하게 되였는데 자금 투입이 막대했다. 설상가상으로 해마다 사용하던 은행신용대출 190만원이 만기되여 갚고 새로 융자를 받기로 했으나 국난의 시기에 갑자기 자금 조달처가 막막해졌다. 초조하게 생각을 굴린 끝에 나는 박회장에게 사정해보기로 하고 큰 용기를 내여 전화로 곤경을 털어놓았다. 은행과는 갚는 즉시 새 대출을 내기로 약속했다고 말했으며 길게 잡아 일주일만 돌려쓰면 좋겠다고 했다.
이에 박회장은 자신도 투자만 계속 하니 형편이 넉넉치 않고 빌려준 돈을 갚지 않는 사람들때문에 애를 먹는다고 말하면서도 “형님께서 일주일이면 된다고 하니 자금을 돌려드리겠습니다”고 흔쾌히 대답하는 것이였다. 자신 역시 어려운 처지에서 상대방의 말 한마디만 믿고 그 어떤 담보도 없이 거금을 맡기는 신뢰의 무게는 나를 놀라게 했고 마음 깊이 감동으로 가득 차오르게 했다.
그런데 뜻밖의 사고가 터졌다. 받은 돈으로 대출금을 갚고 재융자를 신청했으나 조건 미달로 거절당한 것이다. 리유는 코로나기간 우리 회사의 납세액이 이전보다 크게 감소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였다. 이 말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고 심장이 멎는 듯했다. 평생 신용으로 살아온 내가 이런 실수를 할 줄이야! 갑작스러운 변고에 나는 망연자실하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박회장에게 큰 빚을 진 것이였다. 마치 사기를 친 것 같은 죄책감에 온몸이 달아올랐다. 이를 어쩌면 좋나? 당장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약속한 기한 내에 해결하기 어려웠기에 사정을 솔직하게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한번 큰 용기를 내여 전화를 걸어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이야기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박회장의 답변은 간결하면서도 따뜻했다.
"형님 괜찮습니다. 일하다보면 그런 일을 당할 때도 있어요. 너무 속 썩이지 마시고 천천히 해결하세요"
"아! 과연 인물이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는 커시안이 장대해질 수밖에 없는 진정한 리유를 확연히 깨달았다. 인생을 살거나 기업을 운영하며 순조로운 사람이 따로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따로 있다. 리유는 다양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해답은 사람의 마음가짐과 기개에 달려있다. 즉 타인을 위한 봉사의 마음이 얼마나 넓은가에 따라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복도 그만큼 넓다는 것이다. 례를 들어 농부가 자기 쌀을 남보다 비싸게 팔고 싶다면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유기농 쌀을 생산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쌀을 생산하려면 퇴비로 땅을 기름지게 하고 자주 김을 매야 하는 등 보통 이상의 수고와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잘 되려면 반드시 먼저 남을 리롭게 해야 한다(自身欲成事 必先利他人)'는 봉사 정신의 실천이 아닌가!
커시안은 이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최근 연변룡정커시안축구단이 홈장 9련승의 기적을 창조하며 화제가 되였다. 기업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적극적으로 짊어지고 민족정신을 드높이기 위해 거대한 에너지를 불어넣는 커시안그룹의 이번 성과는 그들이 이뤄낸 또 하나의 장거요, 기적이다.
오늘날 커시안은 당당히 세계 건강산업을 선도하는 거목으로 성장했다. 한편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홍삼 산업의 글로벌화를 추진 중에 있다. 제3자의 립장에서 나는 확신한다. 커시안은 건강과 복지를 위한 신성한 커시안제국으로, 더 나아가 글로벌건강산업을 선도하는 중국 100년 브랜드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 이면에는 '리타주의(利他主义)' 경영 철학의 혼이 스며들어 있기때문이다. 박회장의 그 질박하면서도 굳건한 명언이 자주 떠오른다.
"내가 안심하고 먹을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는 제품만 만들면 된다."
박회장의 사회적 책임은 상업을 훨씬 넘어선다. 그는 연변대학 명예교수, 연변대학교육기금회 리사, 중앙민족대학 <민족교육발전기금회> 고문, 전국조선족골프협회 명예회장, 중국아세아경제발전협회 부회장, 조선족련합발전공작위원회 회장 등 수많은 직책을 맡고 있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박회장의 인솔 하에 커시안그룹은 최근 몇년간 국내외에 1250여만원에 달하는 현금 및 물품을 기부했다는 점이다.
이 모든 선행과 의로운 발걸음은 이미 금전적 차원을 초월했다. 그것은 세상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넓고 거대한 흉금에서 우러나온 것이였다.
/리동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