黑龙江日报朝文版
国内统一刊号: CN23-0019  邮发代号: 13-26
흑룡강신문 > 동포

집체경제 살찌워 향촌진흥 이끌어가는 봉황새

할빈시 향방구 조양진 영풍촌 박금순 촌당지부서기 겸 촌주임

2023-04-25 14:10:41

흑룡강성의 성소재지 할빈시 교외의 한 자그마한 조선족촌의 녀성이 촌서기로 18년간 마을을 이끌어가면서 촌의 경제자산을 눈덩이 굴리듯이 굴려 성급 시범촌의 영예를 따내고 본인도 10년간 할빈시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 중앙텔레비전(CCTV)에까지 방영되여 주목을 받고 있다.

그가 바로 할빈시 향방구 조양진 영풍촌(哈尔滨市香坊区朝阳镇永丰村)의 박금순(朴金顺 1961년생) 촌 당지부서기 겸 주임이다.

图片

하남신구 성남수부 아파트 3층에 위치한 영풍촌 촌민위원회 사무실에서 박금순 서기가 경험담을 소개하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마을의 일등처녀 선줄꾼

영풍촌의 개척민들은 1954년 연길 화룡에서 이주해온 7호의 조선족농민들이다. 이들은 하가구(何家沟) 강변에 자라나는 버드나무숲을 찍어내고 허허벌판을 개척하여 문전옥답으로 개변시켰다. 그후 할빈교외 신향방촌에서 8호가 이사와 합계 15호에 인구 64명, 경작지면적이 70여무에 달했다. 1965년 이 마을은 할빈시 동력구 조양향 11대대 제7소대에 편입되였다. 1974년 국가에서 인민공사화를 실행하면서 마을의 이름을 정식으로 영풍대대로 명명했다. 영원히 풍년이 들어라는 소박한 념원이 담긴 마을 이름이다. 현재는 70호에 호적인구가 140명, 집체토지를 2.39만평방미터 소유하고 있다.

박금순씨는 화룡에서 이사온 개척민 중 박동순과 고옥순씨 사이에서 6자매중 유일한 딸애로 1961년도에 태여났다. 오빠가 3명, 남동생 2명, 이들 온집 식구에게 차례진 땅은 한쌍두짐이 전부였다.

물자가 부족하고 생활이 궁핍하던 시기인지라 일년사시절 농사를 지어도 항상 보리고개를 넘기기가 힘들 때가 많았다. 그는 학교를 다니면서도 집안 농사일을 부지런히 도왔다. 봄철에는 차디찬 논바닥에 맨발로 들어가 모내기 하고 가을철에는 뙤약볕에 구슬땀을 흘리기도 하였다. 집안일이 끝나면 또 이웃집 농사일을 도와주는데도 항상 앞장섰다. 어린 나이에도 거의 모든 마을사람들의 농사일을 다 도와주었다. 그는 성격이 워낙 시원시원하고 성품이 강직하며 얼굴에는 항상 웃음기가 어려있어 모두들 그를 마을의 '일등처녀'라고 칭찬했다.

음식점과 인연을 맺다

그가 19세 나던 1980년, 영풍촌에서 할빈시 동력구 행복로에 3만원을 투자하여 영풍조선족식당을 꾸렸다. 금방 개혁개방의 물결이 일기 시작할때인지라 영풍촌의 조선족식당 운영은 당시에도 큰 화제거리로 떠오르기도 하였다.  

그는 첫번째로 복무원(服务员)에 지원해나섰다. 벼농사에만 매달려 구차하게 살기보다는 식당에서 일하면서 돈도 벌고 또 맛있는 음식도 배부르게 먹어보고 싶었다. 그가 나서자 기타 처녀들도 우르르 따라나섰다. 이렇게 그를 포함한 이 마을의 7명 쳐녀들이 영풍조선족식당의 복무원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도 그가 식당업무가 자기와 평생 함께 할줄은 생각지 못했다. 

음식점의 일은 힘들고 끝이 없었지만 언제나 그의 웃음소리를 들을수가 있었다. 처녀아이들과 비좁은 숙소에서 합숙하면서 아침이면 일찍 식당에 나와 깨끗하게 청소하고 채소를 다듬고 하다보면 점심시간이 되였다. 틈만 나면 주방에 들어가 여러가지 료리를 하는 방법을 어깨너머로 배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매일 메뉴 주문받고 음식 나르는 서비스를 하다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그는 옹근 4년을 식당 복무원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그에게 첫사랑이 찾아왔다. 자기보다 2살 이상인 마을의 김광호씨가 청혼을 해온것이다. 실제로 오빠들이 아직 장가를 가지 않아서 눈치가 보여 차일피일 몇년을 미루었는데 그후 광호씨가 군대에 입대하여 편지로 정식청혼을 해온 것이다.

1983년 12월 23일 그와 광호씨의 결혼식이 요란한 폭죽소리속에서 진행되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는 가난의 짓눌림에 쉽게 웃을수가 없었다. 3년전에 시름시름 앓던 친정아버지가 돌아가면서 가정 형편이 더 어려워져 친정집의 손을 빌릴수가 없었다. 결혼식을 위해서 일하던 식당에서 150원을 빌렸다. 그의 혼수선물로는 시집올때 가져온 이불 3채가 전부였다.

금자호(金字号) 조선족 음식점의 사장

결혼 하고 아이를 낳고 농사를 짓고 그는 여느 농촌 녀성들과 별반없는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1987년부터 마을에서 운영하는 산업단지내 기업의 출납을 맡기도 하고 마을의 부녀주임직을 10년간 맡기도 하였다. 마음 곱고 성격이 시원시원하며 언제나 남을 도우려 나서는 박금순씨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신임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마냥 이렇게 마을에서 빈곤하게 살수만은 없었다. 어떻게든 자기 손으로 가난의 고리를 끊어보려는 욕망이 그를 창업의 길로 떠밀었다.

시집의 도움을 받아 식당을 차린 곳이 할빈시 동력구 동력조선족소학교 부근, 식당이름을 금자호(金字号)조선족음식점으로 지었다. 그해가 1998년도이다.

개고기와 랭면에 몇가지 무침채소로 시작했는데 시작부터 대박이였다. 점심부터 손님들이 밀려들기 시작하였는데 저녁늦게까지 만석이였다.

전에 4년동안 음식점에서 복무원으로 배워온 노하우가 빛을 발한 것이다. 우선 신선한 식자재를 사용하였는데 새벽이면 본인이 직접 도매시장에 나가서 구매해 오군 하였다. 음식맛 개발을 위하여 여러가지 료리책을 사서 연구해보기도 하고 또 여러 집 음식맛을 보면서 금자호 식당 특유의 맛을 개발해낸 것이다.

할빈시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금자호조선족식당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별반 없을 정도이다. 2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할빈시 모 조선족단체의 박씨 회장은 "그때 그집 식당이 참 잘되였어요. 매일 손님들이 차고 넘쳤는데 식당에 들어서면 녀성 '로반'이 항상 웃는 얼굴로 맞아주고 서비스도 잘 올려주고 할인도 잘해주고 했지요"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중국에서 소품배우로 유명한 료녕성의 조본산(赵本山) 배우가 할빈행차에 세번이나 식당을 찾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 일년수입이 50만원을 넘기기도 하였다.

효녀 그가 마을로 돌아왔다

평생 못벌어본 돈도 벌어보고 이제 식당을 더 확장하여 사업을 벌려가려 할때 그를 낳아주고 키워준 마을에서 전갈이 왔다. 할빈시 도시개발로 인해 몇년후에 마을 전체가 이사를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중국말도 잘하고 마을 상황도 잘아는 그가 와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图片

마을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이 문제로 고민이 전혀 없었던것은 아니였다. 잘 나가던 식당을 접고 마을로 돌아가면 당장 본인 수입부터 줄어들것이 뻔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돈문제가 아닐수도 있지 않는가. 50여년전에 부모님들이 허허벌판에 개척해놓은 농촌마을이 이사를 가야 하는 또 그만큼 보상을 받아내야 하는 중차대한 문제앞에서 그는 결연히 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순박한 고향마을 사람들의 리익을 위해 무엇인가 할때가 왔다는 사명감이 앞선 것이다.

图片

당해인 2005년에 그는 마을의 지부서기 겸 주임으로 선출되였다.

그때로부터 그에게는 '박서기'라는 칭호가 오늘까지 18년동안 불려오고 있다.

그가 마을로 돌아오자 마을이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图片

전에 10년간 부녀주임으로 근무한적이 있었던지라 마을 일 어느 하나 막힘이 없었다. 한어가 변설인지라 향진이나 구에 올라가 상황을 반영 할때에도 항상 당당한 박서기였다. 마침 그때는 한국바람이 불어서 마을사람 60여명이 한국으로 돈벌러 나간터라 밖으로 나가는 대신 마을로 되 돌아온 그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믿음은 끈끈했다.

图片

어르신들과 부모님에 대한 박서기의 사랑은 극진하다. 마을사람들은 그를 '효녀'라고 부른다. 마을독보조에 촌 명의로 매년 5000원씩 지원해주고 촌 간부들을 동원하여 매사람이 매년 1000원씩 지원해주고 있다. 이외에도 독보조의 활동장소 마련, 관광행사때마다 지원과 협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图片

16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26살에 아버지를 저 세상에 떠나보낸 그는 시집부모를 깍뜻이 모시고 살아왔다. 김씨가문의 맡며느리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한치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장병에 효녀가 없다지만 그는 뇌출혈로 쓸어져 마비된 시어머니를 12년, 병환으로 침상에서 생활하는 시아버지를 7년간 모시고 살았다. 마을의 촌장으로 존경을 받으면서 꿋꿋하게 살아온 시아버지도 림종시 그의 손을 꼭 잡고 한마디 하였다. "딸애야 그간 고마웠어…"

'하남속도(哈南速度)' 실현의 장본인

드디어 운명의 기회가 왔다. 2010년 할빈시 도시재개발의 수요로 인하여 원래 할빈시 남부 평방구 변두리에 위치해 있던 영풍촌이 전체 이사하여 평방구에 새롭게 들어서는 남성수부(南城首府)아파트 단지에 집단이주하게 되였다. 이주시간은 3년, 정부에서는 매호의 건축면적에 따라 동일한 면적의 층집아파트를 배분해주기로 약정하였다.

한두집도 아니고 70호가 되는 마을 전체 140여명이 이사가는데는 너무나 할 일이 많아졌다. 그의 발길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매일마다 촌민집을 방문해 애로사항을 료해하고 또 발이 부르터지도록 정부를 찾아가서 문제를 반영하고 최대한 리익을 쟁취해야 했다. 새집에 들때까지 걸릴3년동안의 정부임대료도 두둑이 챙겨왔다. 누구 보아도 몇달이 걸릴 것이라고 하던 이 일을 그는 28일만에 깔끔이 해결하였다. 매개 촌민들이 정부와 계약을 쓰고 도장을 찍은 시간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집도 방문분쟁을 일으킨적이 없었다. 28일, 이 시간은 지금까지도 할빈시 최단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 일로 현지 정부에서는 그를 보고 '하남속도(哈南速度)'를 기록한 장본인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图片

3년후 전체 촌민들이 층집아파트에 이사를 간후 모든 촌민들에게 단체로 양로보험과 의료보험에 가입시켰다. 이로서 촌민들의 기본 보장이 이루어지게 되였다.

图片

전체 촌민들과 정부의 이사계약이 끝나는 날, 그는 대대 사무실 마당에 만남의 장소를 마련했다. 마을터에 새롭게 들어서는 하남공업신성개발건설(哈南工业新城开发建设)을 지원하기 위하여 동네가 이사를 가면서 마지막 송별연을 차린 것이다. 입주하는 사람들과 이사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서로 리익다툼을 위하여 낯을 붉히는 반면 화기애애하게 쌍방 모두를 한자리에 모이게 한 것이다. 한국에 일하러 가고 남은 촌민들과 향 진 구정부 공무원들을 모셨다. 녀성 촌민들은 모두 한복을 입게 하였다.

图片

"존경하는 령도들과 사랑하는 촌민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 부모세대가 반세기넘게 개척하고 살아온 정든 고향땅을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로 떠나게 됩니다. 그사이 저를 도와 협조해주신 모든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영풍촌이 낳아 기른 딸입니다. 저 또한 당이 배양한 민족간부이기도 합니다. 정부와 현지 경제발전에도 리롭고 우리 조선족촌민들도 만족하는 그 길을 저는 끝까지 달려가겠습니다…"

图片

그의 발언에 장내에는 열렬한 기립박수가 터졌다. 적지 않은 이들이 눈굽을 훔치기도 하였다.

영풍촌을 성급시범촌으로 키우다

2015년 할빈시에서 '할빈시농촌집체경제조직재산권제도개혁시범추진방안'이 발표되였다. 전체 할빈시 33개 시범촌으로 선정되였는데 영풍촌은 개혁성과가 돌출하여 성급시범촌으로 승격하였다.

그는 촌지도부 성원들과 손잡고 정부의 신임과 촌민들의 중임을 떠메고 '자산이 주식으로 변하고 농민들이 주주로 되는(资产变股权,农民当股东)'개혁을 힘있게 추진해나갔다.

이들의 공동노력으로 영풍촌의 촌민들은 농사에 의해서 살아가던 전통방식에서 점차 벗어나 집체자산의 증식에 따른 리윤 배당금을 받아가는 주주로 탈바꿈하였다.

2016년 촌에서는 1500만원을 투자하여 공장건물 1731평방미터와 국유토지 3만평방미터를 확보하였다. 2021년에는 또 1300만원을 투자하여 6300평방미터에 달하는 공장건물을 지어 임대를 주었는데 임대료는 매2년마다 10%씩 상승, 2023년에는 70만원의 임대료를 받게 되였다. 이는 2020년과 비해 집체자산이 60%이상 가치 상승한것이다. 농민들의 수입도 20% 상승하였다.

"농촌에서 공장건물과 토지의 확보는 알을 낳는 거위를 확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평소에 자주 강조하고 실행하던 그의 주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였다.

올해 촌에서는 또 500만원을 투자하여 2000평방미터에 달하는 공장건물을 지어 임대주는 계획을 실해하고 있는데 공장임대료수입만 90여만원에 달한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이 한가지 항목만으로도 촌에서는 매년 30만원의 순수익이 생기게 된다. 당해 수익에서 30%의 공익공적금을 떼내어 생산발전, 자본전입, 결손미봉, 집체 및 주주 복리, 문화교육위생 등방면의 지출에 사용하게 된다. 나머지 70% 즉 20여만원은 주주배당으로 매개 촌민에게 돌아가게 된다.

그의 코기러기 역할로 영풍촌의 촌경제자산규모는 해마다 증식하여 촌에서 투자한 3000여만원이 현재 6000여만원으로 가치증식 되였다. 촌민들의 배당주식 리윤분배도 2017년에 년간 최소 2000원에 달하던것이 점차 증가하여 앞으로 1만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영풍촌의 촌민들은 대부분 한국에 가서 돈을 벌고 있는데 이사할때 배분받은 아파트의 현재 가격이 평당 6000여원에 달하고 있다.

이런 하나하나의 공장건물 성공운영뒤에는 그의 피타는 노력이 깃들어 있다. 기획부터 계약체결, 토지 확보, 건물 건축, 자금 조달에서 계약실행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흐름을 누구보다 제일 잘 알고 실행해온 그녀이다. 쌍성개발구(双城开发区)의 공장건물 프로젝트를 위하여 그는 옹근 2년이라는 심혈을 기울였다. 이 프로젝트는 촌에 매년 70만원의 임대료 수익을 안겨주고 있다.

전에는 촌에서 할빈시내로 가자 해도 반나절 걸렸는데 현재는 할빈시 지하철 1호선이 마을앞까지 통하고 있다. 지하철이 마을앞까지 통하면서 마을사람들의 취직기회도 늘어났다. 코로나가 끝난후 그도 1호선 지하철 종점역 신강대가(新疆大街)역 부근에 아들 명의로 박씨누나 조선족식당(朴姐朝鲜族风味饭店)을 차렸다. 100여평방미터 되는 식당은 현재 성업을 이어가고 있는데 하루 매출이 5000원을 훨씬 웃돈다. 손님들이 많거나 일손이 딸리면 박서기가 직접 주방에 들어가 썩썩 두팔을 걷어올리고 신속하게 료리를 만들어냈다. 19살부터 맺어온 음식점 인연을 이제는 끊을수도 없으니 40년 만들어온 우리민족의 음식 노하우를 세대로 전해 내려가고 있는것이다.

图片

그는 여러차례 시, 구의 로동모범, 우수공산당원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할빈시 '3·8'모범, 할빈시 제13, 14기 인민대표대회 대표, 할빈시농민공모범 등 영예칭호를 받았다. 2018년 2월 12일에는 중앙텔레비전 삼농시공(三农时空)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경험을 소개하였는데 흑룡강성내 조선족 마을 및 전국 각지의 농민대표들이 견학을 오기도 하였다.  

图片

영풍촌에서 배출한 걸출한 박금순 서기, 오늘도 그는 한마리의 아름다운 금봉황마냥 마을사람들을 거느리고 향촌진흥의 탄탄대로에서 힘차게 날개를 저어가고 있다.

/박영만 기자

관련 기사
版权所有黑龙江日报报业集团 黑ICP备11001326-2号,未经允许不得镜像、复制、下载
黑龙江日报报业集团地址:黑龙江省哈尔滨市道里区地段街1号
许可证编号:23120170002   黑网公安备 23010202010023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