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엽이 우수수 날리는 날씨, 하늘에서는 철없는 비까지 내려 꽤 을씨년스럽다. 이맘때가 되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엄마를 떠나보내고 홀로 고달픈 인생을 걸어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서 마음이 아프다. 구질구질하게 지난날에 연연하며 아픈 상처까지 더듬어야 하는 게 씁쓸하지만 그래도 한때나마 마음의 위로가 될가 싶어 몇자 적어본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의젓하고 씩씩한 군인이셨고 전역 후에는 직장에서 생활하셨다. 하지만 워낙 힘든 세월이라 적은 월급에 의지하기보다는 남들처럼 농사를 짓는 편이 더 자유롭고 먹고사는 데도 나을 것 같아 자진해서 농촌으로 내려가셨다. 장애인이 된 몸으로 대대의 회계일과 가정 살림에 힘겨웠을 고달픈 생활, 세월이 흘러 동네 어른들께서 새어머니를 소개해 주셨을 때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계모의 눈치밥을 먹이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지금 돌아보면 그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속마음이 담겨 있었을가. 어쩌면 아버지는 애초에 부모라는 무거운 짐을 홀로 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셨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마음 아픈 기억이라면 밤이 깊어 외롭고 적적해지실 때면 고향에 계신 가족들이 그리워 애처롭게 노래를 부르시던 모습이다. “기차가 기적 소리 울리는 정거장에서, 난로불 곁에 모여 앉아 고향과 인연을 뒤로한 채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이 마음…” 가슴에 사무친 가사가 바다 건너 선조들이 묻힌 고향땅을 향하고 아버지는 친인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셨다. 그렇게 구슬픈 노래로 마음을 달래시며 몰래 눈물을 훔치셨다. 더우기 그 시절은 온 나라가 어려웠고 집에는 녀자 어른 없이 살림살이가 외로웠기에 가끔씩 아버지의 지친 모습이 보여 측은하기만 했다.
내가 소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어느 여름날, 강가에 살던 강이, 은순이와 같은 반 아이들과 하교길에 강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다가 그만 깜깜해지도록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옷을 흠뻑 적시고 물에 빠진 병아리처럼 후줄근한 꼴로 집에 도착했을 때한참을 나를 찾아 헤매시던 아버지는 내 처량한 꼴에 화가 나셨다. 나무가지로 매 맞고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던 기억이 난다. 잠시 후 아버지는 매 맞은 내 다리를 살며시 어루만지시며 “아프지?”하고 물으셨다. 그 한마디에 나는 모든 설움을 뒤로 하고 마음속까지 따스해지는 걸 느꼈다. 하교하면 곧바로 집에 오라는 당부와 함께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주지 못해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긴 한숨으로 달래시던 그 저녁이였다.
그 시절 아버지 마음의 깊은 골짜기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었을가. 가슴 깊은 곳에서 삼켜야 했던 신음 소리, 아무도 몰랐던 상처, 혼자만 간직해야 했던 많은 사연들. 그나마 당과 정부에서 장애인 무휼금과 살림에 꼭 필요한 물품들을 보내주셨다. 계절에 맞는 옷, 명절 선물로 내려오는 음식들… 그때는 개눈깔사탕, 닭똥과자같은 것들이 참으로 감미롭고 잊혀지지 않는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대가이긴 하지만 그 고마운 배려를 잊은 적이 없다. 추억이란 기쁨과 슬픔을 함께 데려오는 법,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는 데 힘이 되고 위로가 되기도 하는구나 싶다.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외로이 자식들을 키워 내보내고 나니 마음 한편이 텅 빈 듯 허무하다. 이제야 부모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다. 주름진 얼굴, 쇠약해진 몸, 머리에 내린 흰 서리만 남기고 자식들은 제 둥지를 떠나갔다. 바쁜 삶에 치여 효도하지 못한 죄책감이 뒤늦게 뒤돌아보게 만든다. 아버지의 보금자리를 떠난 죄송함, 생전에 더 잘해드리지 못한 때늦은 후회가 꿈속에라도 나타나셔서 이 보고픈 마음을 좀 달래주셨으면 싶다. 부모는 항상 곁에 계실 거라 착각했던 평범한 일상들, 새 구두를 신고 싶다고 하시던 그 무언의 암시를 그냥 흘려보냈던 일들… 그것도 세월이 많이 지난 뒤에야 후회하다니, 참 한심하다. 세월이 약이라고 하지만, 어떤 기억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아 안타까울 때가 있다.
언젠가 한국 텔레비전에서 82세에 재혼한 어르신 부부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당시 84세였던 동갑내기 부부는 서로 물도 떠주고 발도 씻어 주며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황혼을 즐겁게 보내고 있었다. “효자가 악처보다 못하다”는 말이 실감나는 장면이였다. 나는 철없는 자식들을 돌보느라 일생을 무의미하게 보내신 아버지, 그리고 자식들이 다 제 가정을 이룬 뒤에도 주책이라고 권유를 뿌리치시며 외기러기로 남아 계시다가 생을 마감하신 아버지가 떠올랐다.
이 글을 쓰는 지금, 필끝마다 묻은 얼룩진 자국들, 사연마다 맺힌 그늘진 마음에 나는 또 감정의 포로가 된다. 엄마같은 아버지. 오늘도 가슴이 울컥하면서 내 마음속에 비가 내린다. 가을의 허허벌판에 외로이 서 있는 듯한 나의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다. 하얀 코스모스 길 따라 떠나신 아버지의 마지막 길은 부엉이 울음도 뒤로한 채, 조용히 하늘나라로… 생로병사의 길은 어쩔 수 없는 법이며 효도란 부모가 떠난 뒤에 더욱 간절해지는가 보다.
묵묵히 속으로 외쳐본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옛날이야기에 인생사는 새옹지마라 했다. 세상일은 길흉화복이 엇갈리며 그것 또한 하늘이 인간에게 내리는 나름의 뜻일 것이다. 젊은 시절의 인생길이 짐 가득 실은 트럭으로 울퉁불퉁한 길을 힘겹게 달려온 것이라면 황혼의 길은 여유있게 아스팔트우를 걷는 신선놀음일지도 모르겠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며 걸어온 아버지의 걸음걸음, 얼마나 무거우셨을가. 그렇게 힘겹게 걸어온 가시밭길, 그 인생의 길을 나는 늘 가슴깊이 새기며 살아가리라. 아버지는 언제나 내 마음의 우상으로 남아 계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