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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순국 추모식 할빈기차역에서 뜻깊게 거행

​동북3성 한국인회 대표, 류학생 및 동포사회 인사 40여명 동참

2023-03-27 15:33:23

지금으로부터 113년전인 1910년 3월 26일 려순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의사를 기리는 추모식이 3월 26일 유서깊은 할빈기차역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뜻깊게 개최되였다.

추모행사에 참가한 일동이 할빈한인회 심민수 회장의 인사말을 들으며 안중근의사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오전 9시, 할빈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국인들이 속속 할빈기차역광장에 집합하기 시작했다. 할빈한인회에서 조직한 이번 추모행사에는 할빈한인회 심민수 회장, 치치할시한인회 전권 회장, 길림성 장춘 한인회 김회훈 회장 정세명 부회장, 료녕성 영구한인회 홍성수 회장 및 할빈공업대학 20여명의 류학생이 참석했다. 할빈시조선민족사업촉진회 박태수 회장, 김태현 비서장을 비롯한 조선족단체 대표들도 동참했다.

할빈기차역 남쪽광장 왼쪽에 위치한 안중근의사기념관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가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원흉인 이토히로부미를 격사한 현장을 바로 볼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맞은켠에 안중근의사 동상이 세워져있었는데 하단에는 동북3성 한인회에서 기증한 하얀 국화꽃바구니 3개가 원형으로 놓여져있었다.

할빈한인회 심민수 회장은 인사말에서 "일제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위험에 처했을 때 안중근의사가 침략의 상징인 이토히로부미를 이곳에서 쓰러뜨리고 대한의 민족성을 세계만방에 알렸다"면서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안중근의사를 암살자 테러리스트라고 격하하는 등 망발을 쏟아내며 그의 명예를 더럽히고 있기에 우리 민족영웅의 명예는 우리손으로 지켜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면서 "구국의 별이자 평화의 횃불이였던 안중근의사의 일대기 참관을 통해 현시대를 살아가는 국민들의 역사의식을 다시한번 일깨우고 무뎌져 있던 애국심을 고취시킬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뒤이어 박태수회장의 인사말이 있었다. 그는 "100여년전 이곳 할빈기차역에서 세계를 진감했던 안중근의사의 의거정신을 잊지 말고 학습하며 단합해서 중한관계를 돈독히 하고 나아가서 세계평화를 위해 저그마한 힘이나마 기여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뒤이어 국화꽃 증정식이 있었다. 참가자 한사람씩 숭엄한 자세로 하얀 국화꽃을 제단에 가져다 바치고 묵념하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이어서 일행은 흑룡강성예술문화원 예술평론부 리대무 주임의 안내로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흑룡강신문사 기자 출신의 리대무 주임은 흑룡강성예술문화원에 전근하여 안중근의사에 대한 연구를 수년째 이어가고 있다.

전시관에는 안중근의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사진들과 기록물들이 년도별로 차례로 액자틀에 진렬되여 있었다.

19세기중엽부터 군국주의길을 걷기 시작한 일본은 점차적으로 조선반도를 정복하고 아세아의 패주가 되는 '대륙정책'을 제정했다. 1894년 갑오전쟁이후 일본이 조선반도를 침략하는 보폭을 다그치니 1897년 조선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기에 이른다. 1905년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박하여 '을사조약' 체결하고 한성(지금의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조선반도에서 온 항일의사 안중근이 할빈기차역에서 당시 일본추밀원 의장 이토히로부미를 격살한 사건은 세계를 경악케 하였다. 할빈지방사에 중대한 력사 사건으로 기재된 이번 장거는 당시의 일본침략항쟁과 반파쑈투장에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주은해총리는 "중일 갑오전쟁이후 본세기초 안중근이 할빈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격살하였다. 량국 인민이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공동투쟁은 이때로부터 시작되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기념관의 제일 안쪽에는 당시 안중근의사의 격사 현장장면을 볼수 있는 유리벽이 설치되어 있다. 투명한 유리 밖을 내다보니 위에는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격사한 사건발생지 1909.10.26' 안내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땅바닥에는 당시 안중근의사과 이토히로부미가 서있던 자리표시 2개가 유표하게 안겨왔다.

10월 26일 거사후 안중근의사는 일본과 러시아 헌변에 압송되여 할빈에서 려순감옥으로 압송되였다.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은 안중근에 대해 6차의 공개심판을 진행했다. 옥중에서 안중근은 이토히로부미의 15가지 죄목을 렬거하며 의거의 정당한 이유와 목적을 진술하면서 투쟁하였다. 그는 "나는 개인자격이 아니고 한국 의병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행한 것이다"고 당당하게 맞서 싸웠다. 1910년 2월 17일 안중근은 사형판결을 받았으며 3월 26일 려순감옥에서 어머니가 보내온 한복을 입고 장렬하게 순국하였는데 향년 31세이다. 안중근의 모친 조씨 역시 독립운동에 헌신한 위대한 여성이였는데 아들 안중근에게 편지를 보내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죽으라"는 그 유명한 말을 전했다.

안중근의사는 옥중에서 아시아 각국은 단결하여 자주 독립을 쟁취하고 아시아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동양화평론'을 저술하였다.

안중근의사는 뛰어난 서예가이기도 하다. 사료에 의하면 그는 감옥에서 200여폭의 서예작품을 남겼다고 하는데 현재 발견된 유묵은 58폭이다.

안중근의사는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할빈공원 곁에 묻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일본정부는 의사의 유언을 집행하러 간 두 동생을 강제 귀국시키고 의사의 시신을 암매장하였다. 그후 중한조 3국에서 유해발굴에 대한 노력을 수차례 해왔지만 의사의 유해는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기념관을 둘러본 할빈공업대학 2학년 인공지능학과 반창훈 한국인류학생회 회장은 "오늘 처음으로 이런 뜻깊은 자리에 참석하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한다"면서 "안중근의사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유학생들과 함께 더 많이 공부하고 민족과 민족정신에 대해 더 배워가겠다"는 소감을 밝혔다.

안중근의사기념 추모식이 끝난후 심민수 회장을 비롯한 할빈, 장춘, 영구, 치치할 한인회 회장들은 조린공원으로 이동하여 공원 남쪽에 설치된 청초당(青草塘) 기념물을 찾아 의사에 대한 추모행사를 이어갔다. 청초당 이 글은 안의사가 서거하기 이틀전에 쓴 휘호로 고국의 산하가 푸른 풀로 뒤 덮인것을 생각하며 그런 독립의 날을 소망하여 적은 것으로 전해진다.

/박영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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