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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곱게 물드는 단풍잎처럼- 김춘실

2022-09-21 11:22:59

-너도 이제 늙어봐라! 

외할머니는 생전에 엄마한테 이런 말을 자주 하셨는데 엄마도 늙어가면서 나한테 가끔 이런 김빠진 말을 시도 때도 없이 옮기군 하였었다... 옛날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멋쩍게 한번 씩- 웃으면 그게 다였다. 늙음을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나였으니 그 말이 귀에 들어올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 “늙는다”는 말이 이 세상 그 어느 사람에게나 꼭같이 찾아오는 날이 있다는 것을 인젠 나도 알았다. 달이 가고 해가 가고 세월이 가더니 나도 남편도 어느 사이 환갑이 지나고 6학년 4반, 6학년 5반 하며 60대도 허리를 넘어서고 있으니 말이다. 

40, 50때만 해도 얼굴에 가벼운 선을 그리며 하나 둘 생기던 주름도 환갑을 넘어서부턴 그 얼굴에 매일 열심히 바르고 붙이며 갖은 노력을 다해도 거미줄처럼 늘어만 가고 밭고랑처럼 깊어만 지는 것을 어쩔수가 없고 어느 사이 파뿌리가 된 머리를 덮어보려고 염색을 하면 며칠쯤은 잠잠하더니 금새 뾰족뾰족 흰 것들이 고개를 쳐든다. 그런가 하면 남편의 그 무성하던 머리카락은 언제부턴가 머리 변두리에만 몇오리씩 붙어있을뿐 다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세월은 무정하게 멋쟁이 남편을 대머리 령감으로 만들어놓았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안스러웠으면 갓 걸음마를 타는 어린 손녀애마저 빗을 들고 할아버지의 대머리를 톡톡 쪼아대며 머리카락을 심어준다고 했을가!... 그 뿐만 아니다. 희고 단단하던 아래우의 이도 하나 둘 빠지더니 어느사이 사기로 만든 가짜 이가 그 자리에 들어앉아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이렇게 늙어가니 젊은 사람들이 보면 입을 싸쥘 일도 늘어난다. 소파에 앉아 텔레비를 보다가도 어느 사이 깜빡깜빡 조을고, 화투패를 떼다가도 싱겁게 혼자 중얼중얼거리고, 련속극을 보면서 별일도 아닌 것에 쿨쩍쿨쩍 눈물을 흘리고... 또 하루가 다르게 침침해지는 눈, 조금씩 휘기 시작하는 허리, 그리고 밤이면 아파나는 무릎... 그렇게 우리는 나름대로 몸이 쇠퇴의 길에 들어선 늙음의 변화를 하나 또 하나 실감하고 있었다.  

-늙는다는 게 바로 이런거구나!

실로 늙어보니 이제야 늙는다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나다. 그러노라니 젊은 시절과는 판이하게 마음의 변화도 엄청 크다. 우선 젊은 시절의 랑만과 격정이 어디론가 도망을 가버린 느낌이다. 젊은 시절 우리 부부는 주방에 침실 하나밖에 없는 작은 방에서 아이들처럼 숨박곡질도 곧 잘 했었다. 남편이 퇴근하여 돌아오는 기척만 나면 나는 부랴부랴 방구석 어디엔가 숨었다가 남편이 두리번거리며 찾을 때면 문뒤에서 왁- 하고 뛰쳐나와 깜짝 놀래우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어느 날엔 소 웃다 꾸레미 터질 이야기도 만들어 냈다. 나보다 일찍 퇴근한 남편은 한번 나를 톡톡히 ‘보복’하려고 단단히 숨어버렸다. 그런줄도 모르는 나는 밥상까지 차려놓아도 올 사람이 오지 않자 그이의 핸드폰에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핸드폰 소리가 침실의 침대밑에서 울리는 것이 아닌가! 내가 놀라서 황소눈이 되는데 아니 글쎄 남편이 머리에 먼지를 뒤집에 쓴채 침대밑에서 기신기신 기여나오는 것이였다. 그것도 한손에 한짝씩 신을 들고말이다... 젊은 시절엔 그렇게 웃을 일도 많이 생기군 하였다. 흥분에 자주 취하는 우리다 보니 싸움도 마른 나무에 불이 달리는 그런 뜨거운 싸움이였지만 다투고 난 뒤에는 항상 맥주잔을 기울이며 화해주를 마시고 그러면서 쑥쓰러움도 없이 자신의 잘못을 반성도 하고... 그래서였던지 다투고 난 뒤에는 비온 뒤의 황토처럼 사랑도 굳어졌다. 그리고 그때는 나나 남편이나 예쁜 말을 곧잘 했었다. 언젠가 내가 롱삼아 “부부가 결혼해선 사랑의 콩깍지가 석달밖에 안간대요”라고 했더니 남편이 제꺽 “저런? 그런데 내 눈엔 왜 그 놈의 콩깍지가 아직도 붙어있지?...” 그 소리에 나는 손으로 입을 막고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런가 하면 우리 부부의 젊음에는 술 또한 빼놓을수 없는 이야기거리였다. “이 세상에 술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냐!”는 말을 노래처럼 입에 달고 다니는 남편은 술이 한잔 잘 되였다 싶으면 진종일 싱글벙글이고 좀 과했다 하면 남의 집 출입문도 자기집 문으로 알고 두 주먹으로 두드려대는 그런 사람이였다. 그런 남편을 만나서였던지 나 역시 술재간이 없으면서도 집에 손님만 오면 술잔을 들고 돌아치며 열성을 보이는 그런 분주한 안주인이 되군하였다. 그러다보니 항상 손님 먼저 내가 취해버리군 했다. “다음엔 절대 이러지 말아야지!” 이런 맹세 수백번 내렸지만 또 새 손님이 오면 그 맹세 어느새 사라지고 남먼저 술잔을 높이 들고 축배가를 열창하는 나였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모두 흘러간 옛말이 되였다. 지금은 남편도 나도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끊었다. 그리고 하루에 2곽 이상씩 피우던 담배도 남편은 미련없이 작두질해 버렸다. 예전엔 담배 없이는 글을 한글자도 쓸수 없노라 떼질도 부리던 남편이 지금은 사탕알 입에 물고 돋보기 너머로 제법 글을 잘 써내고 있다. 그렇다. 우리 늙은 세대는 생기 왕성한 젊은 세대들 보다 쌓아온 ‘경험’을 내놓고는 여러면에서 많이 처지고 있는 것 같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은것 같다. 우리는 젊은 시절을 살아왔기에 젊은이들의 마음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지만 젊은이들은 아직 늙어보지 못했기에 늙은 세대를 잘 알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늙은이들로선 우세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우리는 젊음의 삶도 살아보았고 무성한 초록의 길도 걸어보았기에 차례진 오늘의 삶을 보다 소중하게 여겨야 함을 새삼스레 느끼며 하루 또 하루 성숙된 마음가짐으로 익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살펴보면 가끔 다툼을 하고난 뒤엔 옛날처럼 아기자기한 반성은 없어도 말없는 침묵 속에서 따뜻한 커피잔이 오고 가노라면 어느새 대화가 이어지고, 옛날엔 얼굴 붉힌 끝에 문을 차고 밖에 나가면 남편이 데리러 와야만 못이기는척 집으로 들어왔었는데 지금은 그런 꼴뚜기 같은 오기를 내리고 언제 그랬냐싶게 제발로 들어가는 철든 모습도 보이고있다. 

그렇게 젊은 시절의 불같던 사랑 또한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지만 그 사랑이 저도 모르게 끈끈한 정으로 변했음을 몸과 마음으로 실감하고 있다. 퇴직을 한 뒤 우리 부부는 산책하기를 즐긴다. 하긴 젊은 시절엔 두 사람이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걸었던것 같은데 지금 우리는 산책을 해도 나란히 걷기 보다는 남편이 앞서거나 내가 그 뒤를 따라 걷는 그런 모습이 더 자연스럽고 편해졌다. 하지만 그림자처럼 같이 다니는 우리다. 상점도 같이 가고 외식도 같이 하고 영화구경도 같이 하고... 늙은 량주가 전에보다 말수는 퍼그나 적어졌지만 텔레비를 보면서 령감이 가끔 어린애들처럼 엉뚱한 물음도 건네온다. “저기 나오는 저 령감하고 나 누가 더 늙어보여?”, “아마 저 령감이 더 늙어보이지 않을가... ” 그러면 령감의 얼굴은 어느새 보름달처럼 환해진다. 누군가 녀자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소녀가 살고있다고 하더니 남자들도 꼭같이 마음속엔 항상 씩씩한 청년이 들어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조용하던 방안에선 잔잔한 웃음이 흐른다.

그렇게 인생의 2모작을 시작한지도 여러해가 되여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그 2모작에 너무 많은 욕심을 걸지 않는다. 거기에서 건강을 줏고 즐거움을 수확하면 더없는 행복으로 생각한다. 그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멋대로 여유롭게 살아가는 삶, 이제 남은 인생의 그라프를 절로 설계하고 그려간다는것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지금 우리는 퇴직금도 있고하니 먹고 싶은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사먹고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지 가보고 만나고 싶은 친구는 언제던지 만나면서 로년의 ‘특유의 향수’를 마음껏 누릴수 있는것이다.   

우리는 려행을 즐긴다. 단거리 려행이든 장거리 려행이든 , 시골려행이든 도시 려행이든, 국내려행이든 해외려행이든 우리는 간단히 배낭을 하니씩 메고는 어디든지 떠난다. 그래서 국내는 서장과 신강을 제외하고는 많은 곳을 돌았고 외국도 손을 꼽아보면 여러 개 나라를 다녀온 것 같다. 그런 려행을 우리는 단독으로 다니기도 하고 또 친구들과 짝을 무어 여럿이 함께 다니는 즐거움도 만끽하고 있다. 언젠가 우리는 ‘환갑려행’도 가졌었다. 한국에서 할빈에서 연길에서 대련에서 동갑내기 다섯이 부부동반으로 조직된 ‘환갑려행’은 시작부터 들끓기 시작했는데 서로가 선물을 준비하고 옥이네 부부, 란이네 부부 하며 이름이 박힌 굉장한 플래카드를 만들어 어디 가면 그것부터 펼쳐들고 사진을 찍었다. 

려행뿐만 아니라 곁에 친구들이 있다는것 역시 늙어가는 나에겐 보약같은 존재임을 알게 된다. 남은 여생을 함께 할수 있는 말동무, 웃음동무... 그런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언제나 마음이 편하고 즐거워 시간가는줄 모른다. 손녀 보러 아들집에 와있는 요즘에도 핸드폰에는 친구들 때문에 매일 불이 일 지경이다. “언제 오냐?”, “빨리 와!”, “너 없으니 재미 없다!” 하면서 성화를 부린다. 그러면 나도 그 장단에 맞추어 어화라 둥실을 불러대며 춤까지 너울너울 추는 영상을 보낸다...  

얼마전부터 나는 또 아침, 저녁 손녀를 학교 보내고 데려오는 한편 짬을 내서 아파트 구역 무용팀에 다니고 있다. 내가 춤을 좋아하는것도 있겠지만 늙어가는 나의 몸매를 보다 잘 다듬기 위한데 그 속셈이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기인 셈이다. 무용팀에 들어가 춤을 추면서부터 나는 또 많이 변했다.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니 멋도 부려야 하기에 파마도 자주 하고 매일 같이 화장도 진하게 하고 옷도 새로 사입고... 그랬더니 말수가 적은 며느리도 “호호... 60대 할머니가 50대 이모로 변했네요!” 하며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인다. 그럴때면 기분이 짱이다. 그러는 나를 보고 승벽심이 생겼던지 남편도 요즘은 자기도 악기 일종인 후르쓰를 사서 배운다고 란리다. 오선보도 볼줄 알고 옛날엔 간단한 악기도 조금씩 다루어본 사람인지라 나도 두손들어 찬성이라고 바람을 잔뜩 넣어주었다. 

그렇게 자기가 즐기는 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면서 사는것이 만년에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가끔 엄마가 외우던 “너도 늙어봐라”는 그 말을 다시 새김질해보군 한다. 엄마때와는 달리 많이 좋아진 요즘 세상, 이 세상은 우리의 황혼길에 화려한 꽃길을 깔아주고 있다. 그 꽃길을 즐겁게 걷노라면 나도 남편도 늙어가는것이 아니라 빨갛게 빨갛게 익어갈것이다. 저 곱게 물드는 단풍잎처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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