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한 카페에 먼저 와 기다리던 리동훈, 연극배우 출신답게 정확하고 흡인력 있는 목소리로 자신의 연극인생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럴수가, 질문의 무게가 대답의 무게에 턱없이 미치지 못한 기분이였다. 연극배우 리동훈 선생에게 ‘연극의 무게’를 묻자 1, 2 분가량의 ‘작은 공연’이 펼쳐졌다.
국가1급 배우, 데뷔 43년차, 그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데뷔작인 '변장련애'의 대사를 술술 풀어놓는다. 몸짓 하나, 눈빛 하나에도 흔들림이 없다. 대사도 막힘 하나 없다.
40년도 더 지난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긴 대사를 지금까지 다 외우고 있는 걸가?
“어디 가서 누가 ‘연극을 왜 하니’라고 물으면 작품의 대사를 해요. 남들은 나를 별 볼일 없게 보더라도 나 스스로는 귀한 일 한다는 생각에서요.”
그의 얼굴에선 예술인으로서의, 직업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묻어난다. 연극, 드라마, 영화를 종횡무진 오가면서 우리 연극의 전성기를 지내온 그에게 그 열정의 비결을 묻자 또 묵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다 하고 싶어하는 일 아닌가요? 기회를 준 사람들에게 감사할 뿐이죠.”
“올해 내 나이 꼭 일흔입니다. 살면서 가장 귀한게 감동이더라구요.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연극을 한 겁니다. 이는 돈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오롯이 무대에서 살아온 인생이였다.
자치주가 창립되던 해에 태여나, 안도현 장흥향(현재 장흥촌)에서 스물일곱까지 농사일을 했던 그는 연극과는 영 거리가 멀어보이는 듯 싶었다. 하지만 마을에서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고 이야기를 맛갈지게 잘해 마을의 ‘웃음보따리’였던 리동훈은 막연히 연극배우를 동경하던 청년이였다. 마침 1979년 3월에 최수봉 선생이 연길에서 연변구연단을 창단하면서 소속 배우를 뽑는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주저없이 면접길에 나섰던 청년 리동훈은 수백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구연단 1기 연극배우로 뽑혔다. 그때 맡았던 데뷔작이 장미옥씨와 합을 맞췄던 장막극 '변장련애'였다. 작품은 단번에 성공을 거뒀고 리동훈 이름 석자도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떼떼부부’의 시작은 1985년에 동료배우 오선옥과 함께 했던 작품 '통졸임 사건'에서부터 였다. ‘떼떼’ 역 역시 리동훈의 아이디어였다. 그뒤로 리동훈 이름 석자보다도 ‘떼떼’로 더 많이 불려졌다.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아기자기한 이야기로도 얼마든지 관객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작품이였어요. 그런 무대에 설 수 있어 얼마나 행복했던지 몰라요.”
젊음 하나면 두려울 게 없던 시절이였다. 밥 대신 군고구마를 점퍼 호주머니에 늘 넣고 다녔다. 연극은 원래 배고픈 건 줄 알았고 고생을 즐겁게 여기던 시절이였다.
80, 90년대는 그야말로 연극의 전성기였다. 표 한장에 20전, 25전을 했던 시절, 하루도 쉬지 않고 무대에 올랐다. 누이동생이 암으로 돌아갔을 때도, 장인어른이 돌아간 날에도, 무대를 설치하다 다쳐서 발이 빵처럼 부풀어 올랐을 때도, 오십견으로 팔을 움직일 수 없을 때도, 그 전날 넘어져 생긴 상처를 바늘로 꿰매고도 어김없이 무대에 올랐다. 연변 지역 곳곳은 물론 동북3성 조선족 산재지역까지 장소를 막론하고 이들이 짐을 푸는 곳이 곧 무대가 됐고 관객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여름이면 로천무대를 설치했고 겨울이면 시골 외양간에서도 공연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한국, 일본, 독일에서도 이들을 찾는 공연요청이 이어졌다.
분장도, 무대설치도, 짐군도 모두가 배우들이 직접 역할분담을 했던 시기, 하지만 고달픔도 잠시, 무대 우에 올라서면 배꼽 잡고 쓰러지는 관객들의 모습에 다시 힘을 내군 했다.
리동훈이 되기 위해서 연극을 했고 리동훈 자체가 연극이라고 했다. 그는 연극이 아니였다면 리동훈이라는 이름 석자는 있지도 않았다고 했다.
묵직한 작품부터 경쾌한 작품까지 다양한 작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배우가 직접 표를 팔았던 시절, ‘이런 열정과 시간을 다른 데 투자했더라면 아무리 멍청이라도 지금보다 부자가 됐을 거’라며 마음속으로 끙끙거리기도 했지만 누구보다 앞장섰다. 그만큼 무대는 그에게 특별했다. 무대 우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다.
40년 넘게 '떼떼부부', '좋은 세상', '보증서', '회초리', '경사났네', '록용주사', '자가용과 주유소', '동창생' 등 400여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무대를 지켜온 희극배우인 리동훈이 생각하는 배우는 ‘기다림을 버텨내야 하는 직업’이다.
“천직이고 감사하다는 생각만 들어요. 연극을 한다는 것은 한평생도 모자라는 작업이 아닐가요? 얻은 것은 많아요. 지금까지 지탱해준 것도 연극이였으니. 다음생에 인간으로 태여나도 다시 이 길을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그만큼 내 인생에서 연극은 최고의 가치를 지닌 보물입니다.”
무대 이야기만 나오면 그의 눈빛은 생기로 빛났다.
“좋은 대본을 보면 힘이 절로 솟거든요. 참 예술이란 어려운 거예요. 연극이 왜 예술인지도 모르고 덤볐지만 나이가 들면서 무대가 보이더라구요. 참 어렵고 힘든 작업을 무슨 용기로 버텼는지 스스로가 대견하다는 생각이 가끔 들어요.”
현역 은퇴 후에는 거의 10년을 뿌리조각에 파묻혀 살기도 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사고로 잃은 뒤였다. 그 고통을 잊으려고 시작한 뿌리조각은 이제 그의 삶의 일부가 됐다.
“평생을 배우로 산 내 인생에는 울고 웃었던 흔적 만큼 많은 추억들이 쌓였어요. 후회없이 살았고 행복했어요. 아픔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묵묵히 버텨내야죠.”
전성기 시절의 그 가슴 뛰던 무대가 다시 있게 된다면 그때 그 시절의 자신보다 더 화려하게 무대에 오르고 싶다는 그를, 파트너로 늘 곁을 함께 했던 동료 배우 오선옥은 “평범하지 않고 튀는 배우였다. 그러나 튀면서 어울리고 조화를 이루는 배우”라고 평을 했다.
/연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