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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과 덕을 다하여 교육사업에 헌신

2025-12-03 14:45:25

중앙민족대학 생명과 환경과학학원 전 당위서기 박헌수의 이야기

견지는 초심을 잊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사명은 사회책임에 대한 실천과 공헌을 의미한다. 중앙민족대학 생명과 환경과학원 전 당위서기 박헌수는 대학교 당무사업의 제일선에서 교육의 초심을 잊지 않고 교사의 사명을 명기하며 자신의 고귀한 지조, 고상한 사덕, 집요한 추구로 당무사업을 착실히 리행해 가면서 당건설의 꽃이 교정에 활짝 피여나 사계절 향기 넘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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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3월, 박헌수는 흑룡강성 밀산현 이인반향 련성촌 양목산툰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아버지 박명삼은 해방초기의 공산당원으로 마을의 토지개혁과 합작화운동 및 인민공사화운동에 참가했었다. 60년대 박명삼은 다양한 경영생산을 진행하고 집체경제의 발전과 장대에 큰 공헌을 하였기에 ‘밀산현로동모범’ 영예칭호를 받아 안았다. 어머니 주명선은 도자기 장인의 딸이였다. 선량하고 사리밝고 조선족 료리에 정통했기에 마을에서는 그녀의 집에 식당을 설치하여 하향간부 및 마을에 출장온 손님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군 했다. 자신의 능숙한 재봉솜씨를 리용하여 늘 마을 사람들에게 무료로 옷을 지어주기도 했다. 

1960년 8월, 박헌수는 2인반공사 련성소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공부에 부지런했고 학교의 각항 활동에 적극 참가했으며 선생님, 동학들의 신임과 지지를 받아 매년마다 “3호학생”으로 선정되였다.

부모님들의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근면검소한 영향을 받아 박헌수는 어린시절부터 일찍 셈이 들고 남을 돕기를 즐겨 했다. 1963년 겨울, 련성촌의 전국로동모범, 전국군렬속모범 량금옥이 성도에 회의하러 갔을 때였다. 그동안 집에 남아 있던 어린 두 딸은 장작이 끊겨 추위에 떨고 있었다. 11살밖에 안된 박헌수는 혹한을 무릅쓰고 소수레를 몰고 땔감을 해주어 마을의 미담으로 전해졌다.

해마다 겨울철이 되면 학교는 경비난으로 난방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박헌수는 매일 학교로부터 2km 떨어진 집에서 장작을 등에 지고 등교하군 했다. 그의 행동은 학급의 많은 동학들을 이끌어 장작을 해결하게 했다.

1968년 12월, 박헌수는 흑태중학교에 진학했다. 그해 그는 뛰어난 표현으로 학년에서 처음으로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다. 그후 줄곧 학급단지부 서기를 맡아 하였으며 여러 차례 우수학생간부로 선정되였다.

1969년 3월, 진보도 사건이 발생하여 전국이 전쟁준비 상태에 들어갔다. 학교에서는 상급의 호소에 호응하여 교원과 학생들을 조직하여 방공 벙커를 건설하였다. 반급 단지부 서기를 맡고 있던 박헌수는 낮에는 공사장에서 일 하고 밤에는 집으로 돌아가 쉴 수 있었지만 공사 기일이 매우 급한 것을 보고 련속 며칠 잔업을 계속하면서 방공 벙커가 완성될 때까지 공사장을 한발작도 떠나지 않았다.

1969년 10월, 전쟁준비 요구에 따라 학교는 흑태진에서 10여km 떨어진 북부 산요지에 전시 교사(战备校舍)를 건설하게 되였다. 그런데 교사를 건설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시 형세에 따라 전교 사생들은 또 원래 교사로 돌아가고 전문 인원을 남겨 전시 교사를 보호해야 하였다. 상황을 알게 된 박헌수는 자진하여 남아 교사를 수호하겠다고 신청했다. 당시는 동북의 늦가을 날씨라 매우 추웠다. 게다가 교사에는 생활시설도 없었다. 박헌수와 반급의 다른 한 동학은 간고한 환경속에서 직접 장작을 해서 밥을 짓고 난방하면서 한 달 남짓이 교사를 지켰다.

1969년 4월,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조직하여 얼룡산 림장에 가서 봄철 식수조림을 진행했다. 그런데 요옥이라는 반급 학생이 갑자기 병이 도지게 되였다. 림장 위생원에서 급성 맹장염으로 진단을 받아 즉각 현성 병원에 보내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박헌수는 자원해서 몇 명의 동학들과 함께 담가를 만들어 밤새 도보로 5시간 넘게 걸어서 끝내 환자를 20여km 떨어진 현성 병원으로 호송했다.

1970년 여름, 모주석의 ‘5.7지시’ 호소에 따라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조직하여 공업과 농업을 따라 배우는 활동(学工学农活动)을 전개하고 학교에서 십여리 떨어진 곳에 저수지를 건설하고 황무지를 개척하면서 농사를 지었다. 간고한 시련속에서 박헌수는 착실하게 일하면서 완강한 의지와 도덕을 련마했다.

1972년 1월, 박헌수는 9년간의 학업을 마치게 되였다. 많은 동학들이 졸업 기념사진을 찍자고 제기했다. 당시 시골에는 사진관이 없었다. 동학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박헌수와 다른 한 동학은 자전거를 빌려 가지고 현성에 가서 사진 필름을 샀다. 길이 멀기 때문에 그날로 돌아갈 수 없어 그들은 각자 누나 집에 주숙하고 다음 날 일찍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돌아갔다. 이틀 동안 70여km를 왕복하면서 기진맥진했지만 동학들의 웃는 얼굴을 보는 박헌수의 마음은 저도 몰래 기뻤다.

(2)

1972년 2월, 중학교를 졸업한 박헌수는 광신대대로 돌아가 농업생산로동에 참가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대 단지부서기로 당선되였다. 농촌의 어려운 환경과 복잡한 사업에 직면해 박헌수는 묵묵히 열심히 일하면서 산만하고 무력했던 대대 단조직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20세기 60년대 초, 흑태공사 광신대대의 단조직 문체활동은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여 전 현, 나아가 흑룡강성 동부지역에서 이름을 떨치게 되였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후, 단조직의 문예활동은 정체상태에 처하게 되였다. 단조직의 활동경비를 해결하기 위해 박헌수는 머리를 쥐여짰다. 물쥐가죽이 좋은 값에 팔린다는 정보를 알게 된 박헌수는 몇 명 청년들을 이끌고 마을에서 50여 km 떨어진 양목강 강가로 갔다. 박헌수 자신은 특히 물쥐를 두려워했지만 애써 마음속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청년들을 이끌고 물쥐를 잡아 약간의 경비를 모았다. 

박헌수는 문예활동을 단조직 건설사업의 접점으로 삼고 마을의 단원들을 동원하여 다채로운 문예프로그램을 조직했다. 1973년 설날에 박헌수는 일부 로동지들의 지지와 방조하에 농후한 민족특색과 향촌분위기를 지닌 새봄맞이 야회를 성공적으로 조직해 사원들에게 다채로운 시각향연을 선물했다. 1973년 말 광신대대 단지부는 공청단 밀산현 ‘선진단지부’로 선정되었고 박헌수는 목단강지구 빈하중농대표대회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 해 박헌수는 영광스럽게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1974년 8월, 상급조직에서는 박헌수를 청년간부 후보로 흑태공사에 추천하였고 같은 해 8월, 그는 흑태공사 당위원회 위원 겸 혁명위원회 부주임으로 임명되였다.

1976년 10월, 박헌수는 밀산현 이인반공사 변강대대 당의 기본로선교육공작대 부대장으로 되여 변강대대에 진주했다. 이번 당의 기본로선 교육운동은 이왕의 사회교육운동과는 달랐다. 그 주요 임무는 ‘개인자본주의의 꼬리를 잘라내는 것’과 ‘사회주의 집체경제를 발전시키는 것’ 이였다. 많은 사원들은 과거 운동에서 극 ‘좌’적 방법에 대해 매우 반감을 느꼈지만 공작대에 대한 태도는 비교적 진지했다. 

당의 기본로선 교육운동의 제1단계가 시작되자 공작대에서는 사원대회를 소집하고 선전동원사업을 했다. 박헌수는 당의 사회주의기본로선 교육운동을 전개하는 중요한 의의와 필요성, 목적, 목표와 임무에 대해 전문 강의를 진행했다. 회의장에서 대부분 사원들은 침묵을 지켰고 개별적으로 건담배를 피우던 로인들이 박헌수를 노려보며 이따끔 고개를 저었다. 

두 번째 단계에서 공작대는 조사 연구를 진행해 대대의 기본상황을 파악했다. 변강대대는 중국과 쏘련의 경계에 위치해 있으며 6000여무 경작지와 2000여무 림지 그리고 720여명 인구가 있었다. 주로 옥수수, 콩을 재배하였다. 대대에서 운영하는 공업과 수공업이 없었기에 2인반공사에서 종합경제실력이 비교적 락후한 대대에 속했다. 많은 사원들의 생활은 막대기 휘둘러도 거칠 것 없이 빈곤했고 집집마다 초라한 초가집에서 살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식량 수확이 좋지 않아 사원들은 생산대의 현금 분배를 볼 수 없었고 일상 생활지출은 전부 자류지와 닭, 오리, 거위 몇 마리를 기르는 수입에 의존할 뿐이였다. 

당의 기본로선 교육운동이 제3단계에 들어간 후, 현위원회 사회교육지휘부의 지시에 따라 자본주의의 꼬리를 베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꼬리를 베는 주요 내용은 사원들의 자류지를 측량하고 각 농가의 가정부업 수입을 조사하는 것이였다. 자류지는 1인당 분배 토지를  규정하고 논두렁을 개간하여 농작물을 재배하고 경제작물을 심는 등 자류지 면적을 초과한 부분의 청묘는 없애 버리게 했다. 이것은 아직 실행되기도 전에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박헌수와 대대간부들은 측량기구를 가지고 각 집의 자류지에 가서 측량했다. 자류지 주인들은 매우 긴장해 했다. 필경 이것은 모든 가정의 일상생활과 관련되기 때문이였다. 농촌에서 태여나 자란 박헌수는 농민들의 생활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생존 현황에 깊은 동정심을 느꼈다. 그의 마음은 혼란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류지 측량을 앞두고 박헌수는 대대장에게 ‘우리는 분촌을 장악하고 관엄을 상제(宽严相济)해야 한다. 일을 너무 극단적으로 해서 백성들의 삶의 뒷길을 끊어서는 안 된다’고 조용히 말했다. 대대장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측량이 시작되자 논두렁과 밭머리의 뙈기밭들은 아예 관계치 않았으며 전체 자류지를 측량할 때도 가능한 죽자를 늦추어 느슨하게 재였다. 자류지의 주인들은 찌푸렸던 미간을 풀고 하나같이 미소를 머금었다. 측량 결과 규정면적을 초과한 자류지는 하나도 없었으며 어느 농호의 청묘도 파괴되지 않았다.

당의 기본로선 교육운동이 끝나고 변강마을을 떠날 때, 생산대의 간부들과 많은 사원들은 박헌수를 환송하기 위해 대대부에 왔다. 그들은 “박대장, 다시 오실 걸 환영합니다.” 라고 외쳤다.

박헌수는 흑태공사로 돌아온 후, 분공에 따라 흑태공사 소속 춘광대대를 도맡았다. 춘광대대는 전 현에서 이름난 조선족 빈곤촌 이였다. 다년간 식량은 반소량에 의거했으며 돈은 구제에, 생산은 대출에 의지했다. 촌급조직이 산만하고 빈약했으며 사원들의 생산적극성도 높지 않았다.

1977년 춘광대대는 2100무의 논과 200무의 밭을 경작하였는데 벼의 무당 산량은 291근 정도였다. 사람이 많고 땅이 적은 반면에 창업 능력이 약하고 소득이 낮았기에 사원들의 생활은 특히 어려웠다.

박헌수의 도래에 춘광대대 사원들은 별로 시답지 않게 여겼다. 왜냐 하면 과거에도 향간부들이 자주 대대에 상주했지만 며칠이면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헌수는 춘광대대에 온 뒤 조사 연구를 통해 춘광대대의 문제는 력사적 원인과 현실적 원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제를 해결하자면 반드시 실사구시적이고 실제로부터 출발해야 했다. 춘광대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중의 하나는 바로 과학기술 흥농전략을 실시하는 것이였다. 즉 농업과학기술 력량에 의거하여 단일 생산량을 높이고 로동생산률을 높이며 농업풍년을 쟁취하고 사원들의 수입을 제고하는 것이였다.

박헌수는 자신의 사업목표를 확정한 후, 현의 과학기술 흥농전략에 따라 추진강도를 높이고 벼의 한육희식기술(旱育稀植)을 대면적으로 보급시켰다. 처음에 일부 사람들은 벼의 한육희식기술을 보급하는 것에 대해 겁을 먹었다. 박헌수는 대대 간부들을 조직하여 연변지역에 가서 벼의 한육희식기술을 배워 왔다. 박헌수의 강력한 추진하에 춘광대대에서는 90% 논에 한육희식기술을 실시했다. 1978년 춘광대대의 무당 벼생산량은 535근에 달하여 1977년보다 45.6% 증산했다. 그해 사원들의 1인당 소득은 처음으로 전 현 농촌사원들의 평균수준을 초과했다.

박헌수에 대한 사원들의 태도는 반신반의로부터 완전한 신뢰로 바뀌였다. 그의 사업에 대한 책임감과 착실한 사업작풍, 사원들에 대한 깊은 애정은 춘광대대 사원들을 감동시켰다.

(3)

1982년 2월, 박헌수는 조직의 수요에 따라 흑태공사를 떠나 공청단 밀산현위 부서기로 취임하였고 년말에 현 단위서기를 인계받게 되였다. 이 해는 중국 농촌이 농호별생산량도급책임제로 총진군하는 첫해였다. 기회를 틀어쥐고 도전을 맞이하기 위해 그는 허세를 내려놓고 학생이 되여 열심히 공부하면서 문제를 깊이 사고하고 실천했다. 

전 현의 개혁발전의 큰 국면과 승진의 목표를 긴밀히 둘러싸고 전반 국면을 돌보며 사회와 청년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취지로 농촌, 기업, 학교, 기관, 지역사회를 주선으로 교육흥단(教育兴团), 인재흥단(人才兴团), 봉사흥단(服务兴团), 과학기술흥단(科技兴团), 활동흥단(活动兴团) ‘5대전략’과 청년인재공정(青年人才工程), 청년문명공정(青年文明工程), 청년치부공정(青年致富工程), 청년봉사공정(青年服务工程), 단체건설공정(团队建设工程)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광범한 청년단원들을 단결인솔해 밀산경제와 사회발전에 적극적인 공헌을 했다.

사업중 조사연구에 중점을 두고 시간을 짜내 기층단조직을 방문하면서 청년단원들을 관심하고 청년단원들과의 련계를 밀접히 했다. 1년도 안돼 박헌수는 전현의 21개 향진, 220개 촌과 120개 광산, 기업, 사업 단위와 학교를 돌아다녔다.

1982년 12월, 박헌수는 중앙단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중국공산주의청년단 제11차 전국대표대회에 렬석하여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1983년 10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2기 2중전회에서는 ‘정당에 관한 결정’(关于整党的决定)에서 ‘공청단은 당의 조수이자 후비군이며 단원들을 조직하여 정당문건을 학습하고 그들의 사상정치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당중앙의 지시정신에 근거하여 공청단 11기 2중전회에서는 ‘정당문건을 학습하고 단의 전투력을 제고할데 관한 결정’(关于学习整党文件,提高团的战斗力的决定)을 내렸다. ‘결정’은 정당기에 2년간의 시간을 들여 전국에서 보편적으로 정당문건을 학습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교육활동을 전개하여 단원의 각오를 제고하고 조직생활을 건전히 하며 단의 규률을 강화하고 독립활동을 전개하는 것을 ‘학습교육활동’의 기본요구로 삼을 것을 제기했다. ‘학습교육활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공청단중앙에서는 전국적으로 밀산 등 5개 시와 현을 시범단위로 확정해 ‘학습교육활동’의 길과 경험을 탐색했다.

밀산이 ‘학습교육활동’의 시범현으로 되자 박헌수는 상급 공청단위원회의 지도하에 주밀한 ‘학습교육활동’방안을 제정해 광범한 단원들에게 당의 로선, 방침, 정책에 대한 재교육을 진행하고 단원들이 개혁과정에서 부딪히는 난제에 대해 정면 해답을 주었다.

‘학습교육활동’에서 광범한 단원들에게 정면교육과 리론학습을 진행하는 동시에 형식상의 혁신을 진행했다. 례하면 단수업(上团课), 보고청취(听报告), 사회조사 전개, 심포지엄토론, 참관방문, 독서강연, 혁명노래 부르기 및 교육적 의의가 있는 영화, 연극 관람 등을 진행했다. 특히 전 현의 각급 단체조직은 본 업계의 특징과 결합하여 활동을 전개했다. 

전현의 423개 단지부의 95% 이상이 ‘청년의 집’(青年之家)을 건립하고 단지부가 조직이 있고 장소가 있으며 활동이 있도록 했다. 버스계통공청단위원회는 청년단원들을 조직해 의무로동을 진행하고 도로변에 60여개의 편민버스정류장을 건설했다. 위생계통공청단위원회는 순회의료팀을 조직해 향촌에 내려가 50여 차례 의무진료를 진행했다. 문화계통공청단위원회는 문화하향활동을 전개하고 기층에 내려가 도서실을 건설하며 영화를 상영하고 문예공연을 조직했다. 교육계통공청단위원회는 공청단 특색을 갖춘 명품활동과 주제활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했다. 향진공청단위원회는 광범한 청년단원들을 조직해 농촌개혁에 적극 참여시키고 농호별생산량도급책임제를 완선화 했다.

‘학습교육활동’중, 단중앙에서는 청소년들을 조직하여 풀씨와 나무씨를 채집해 감숙성을 지원하라는 통지를 하달했다. 박헌수는 즉시 전현의 10만 청소년들을 동원해 ‘채종지감’(采种支甘)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각급 단간부들의 공동노력하에 전 현의 ‘학습교육활동’은 주제가 두드러지고 방법상 융통성 있고 형식이 다양하며 성과가 현저했다. 전국 ‘학습교육활동’ 총결대회에서 박헌수는 밀산 ‘학습교육활동’ 경험을 전국에 소개했다.

1984년말, 공청단 밀산현위원회는 단중앙으로부터 ‘전국선진단조직’의 영예칭호를 수여 받았다.

(4)

1985년 9월, 박헌수는 전국성인대학입시를 통과해 중앙민족대학에 입학했다.

1988년 박헌수는 중앙민족대학에 취직해 선후로 멜로포회사(美乐福公司) 경리, 간부훈련부 당무비서, 생화학과 부주임, 생화학과 당위서기, 력사학과 당위서기, 생명과 환경과학원 당위서기 등 직무를 맡았다.

간부훈련부 당무비서로서 사업할 때, 그는 자신의 업무에 대해 진지하게 책임졌다. 당성을 중시하고 원칙을 중시하며 번거로운 일상업무를 제때에 잘 처리했다. 부문 지도자와 선생님, 선생님과 학생간의 뉴대역할을 충분히 발휘하였으며 그 기간에 담임교원도 겸임했다. 학생들 속에 깊이 들어가 사상변화를 파악하고 학습과 생활 중에서 부딪히는 실제 어려움을 해결해 주면서 학생들의 절친한 친구가 되였다.

1993년은 중앙민족대학 간부훈련부 설립 40주년 해였다. 박헌수는 ‘중앙민족대학 간부훈련부 동문록’의 주필을 담당하고 책을 편집했다. 당시 통신시설이 발달하지 못했기에 련락 업무는 전부 편지에 의존했다. 인원과  경비가 부족하고 시간이 촉박하며 임무가 무거운 상황에 직면했다. 그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몇 명의 직원을 이끌고 수천 명의 동문들에게 편지를 보내 40년 동안의 동문들의 각 방면의 정보를 수집했다. 몇 달간의 주야분투로 마침내 ‘중앙민족대학 간부훈련부 동문록’  편집임무를 원만히 완수하였고 동문들에게 향후 교류를 강화하고 모일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그의 부지런하고 착실한 사업태도는 선생님과 학생들의 인정을 받았다.

같은 해 12월, 박헌수는 중앙민족대학 생화학과 부주임으로 취임했다. 당시 생화학과는 전교에서 규모가 작은 학과 중 하나였다. 전임 지도부는 단결이 부족하고 응집력이 차했다. 박헌수는 새로 구성된 지도부 성원들과 함께 난관을 극복해 나갔다. 학교 당위원회에서 확정한 중심사업을 긴밀히 둘러싸고 지도부와 교원대오건설을 강화했으며 학생들이 전문지식을 잘 배울 수 있도록 인도하는 동시에 그들을 조직해 학교내외의 의의 있는 활동에 참가하게 했다. 생화학과의 사업수준을 전면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교사대오의 사상사업을 단단히 틀어쥐고 학문을 가르치며 인재를 육성하는 새로운 기풍을 수립하여 생화학과가 전교에서 이미지가 비교적 나쁘던 국면을 결속짓고 과거의 골칫거리에서 선진학과의 대렬에 들어서게 하였다. 당시 생화학과는 학생이 180여 명밖에 되지 않아 전교에서 학생수가 가장 적은 학과였다. 청년학생들의 자의식이 강하고 인지가 왕성하며 감정이 풍부한 특징을 결합하여 학생들의 심신건강에 도움이 되는 다채로운 활동들을 전개하였다. 교내 스포츠 대회만 례를 들어도, 좋은 성적을 따내기 위해 그는 학생들과 함께 4년간의 노력을 거쳐 마침내 학교 운동대회에서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이기는 다크호스(黑马)가 되였다. 1998년부터 련속 3년간 학교 체육대회 총점 1등을 차지했다. 이것은 학생 수가 400여 명이 넘는 오래된 학과도 따라올 수 없게 하였으며 생화학과의 정신풍모를 일신시켰다.

2006년 5월, 박헌수는 생명과 환경과학학원의 당위서기로 복귀했다. 취임초부터 그는 중공중앙과 국무원에서 반포한 ‘대학생들의 사상정치교육을 진일보 강화하고 개진할 데 관한 의견’을 진지하게 학습하고 새로운 형세하에서 대학생들에 대한 사상정치사업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에 대해 깊이 사고했다. 이왕의 사상 교육 방식은 새로운 형세에 적합하지 않은 면들이 많았다. 새로운 시기 대학생들의 사상정치사업은 반드시 존중을 전제로, 감정을 출발점으로, 과학리론을 무장력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회유하며 사상교육사업의 3도, 즉 효과도, 력도와 광도를 제고하는 데 중점을 두어 사상교육사업을 새로운 경지로 향상시켜야 했다.

박헌수는 일련의 조치를 제정해 학원의 정치사상사업과 학원교육사업의 발전을 심도있게 융합추진 시켰다. 대학의 각종 과정은 사상 정치 과목과 같은 방향으로 동행하여 시너지 효과를 형성하였다. 전원육성, 전과정육성, 전방위육성을 추진해 광범한 학생들의 나라사랑 당사랑 사회주의사랑을 고도로 통일시켰으며 애국열정과 보국행동을 유기적으로 결부시켰다. 

박헌수는 자신의 사업 사로를 확정한 후 일심으로 일에 몰두했다. 지도부 성원들과 분업 합작하여 각자 책임을 졌다. 우선 당무간부와 지도원을 포함한 사상정치대오건설을 단단히 틀어쥐고 학생회, 단총지(团总支), 공회 등 부서를 조직해 심신건강에 유리하고 전교에서 영향력 있는 대형활동을 적극 전개했다.

민족대학에서 박헌수의 일부 사업 방법은 모두 처음이고 성과가 뚜렷하여 다른 학부들에서 앞다투어 본받았다. 례를 들면 1990년대 중반부터 생화학과 교사들을 조직해 헌혈학생들에게 일주일간 영양식을 보장해 주었다. 이런 방법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호평을 받았고 의무헌혈 적극성을 불러일으켰다. 생화학과는 매년 의무헌혈 임무를 초과 완수했다. 생화학과의 영향으로 다른 개별 학부들도 헌혈 학생들에게 영양식을 보장해 주기 시작했다.

박헌수가 2000년 9월 생화학과를 떠난 이후부터 2006년 5월 생환학원(원 생화학과)으로 돌아오기까지, 생명과 환경과학학원은 전교 문체 등 각종 대형 대회에서 성적이 눈에 띄게 떨어져 1998년부터 학교체육대회 3년 계관을 차지했던 풍광을 잃어 버렸다. 그가 돌아온 후, 2년간의 간고분투를 거쳐 2008년부터 생명과 환경과학학원은 다시 전교 운동회, 변론대회, 노래시합, 지식경색 등 대형 활동에서 련속 1등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문체활동은 대학교사업에 있어서 교사와 학생들의 집단영예감과 응집력을 제고하고 학생들의 건전한 인격과 건강한 신체를 배양하는 등 다방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성적은 모든 일을 직접 지도하는 그의 사업 기풍을 떠날 수 없었다. 자신의 점점 늘어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학생들과 훈련의 최일선에서 작전했으며 각종 대형활동은 모두 다른 학원보다 일찍 시작하고 일찍 준비하고 일찍 훈련하게 했다. 한 시기 중앙민족대학의 기타 학원에서는 대학교 4학년 학생과 석사생, 박사생들이 학교의 각종 대형활동을 소극적으로 대하는 현상이 있었다. 박헌수가 이끄는 생명과 환경과학학원 학생들은 대학교 4학년생이나 석사과정, 박사과정 학생을 막론하고 모두 각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이는 그의 리더십과 수준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일부 대학 당위서기들은 ‘박 서기님,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습니까?’ 라고 부러워 하며 자문하기도 했다.

박헌수가 큰 호소력을 가질수 있은 것은 그가 항상 전면적으로 발전한 복합형 인재 양성을 목표와 출발점으로 학생사업을 전개하고 학생들을 배려하고 양성한 것과 갈라놓을 수 없었다. 이를 위해 박헌수는 교원과 학생들을 이끌고 전면 토론을 거듭하며 합리적인 생환학원 종합평가 조례를 제정했다. 조례는 학생들의 종합적인 자질수준을 전면적으로 반영할 수 있어 학생들의 적극성을 충분히 불러일으켰다. 학생들에게 학교규칙과 학교규률을 준수하고 전문지식을 잘 배우도록 엄격히 요구한 동시에, 생활에서 학생들이 어려움에 부딪히면 모든 방법을 강구해 해결하도록 도와주고 가족처럼 돌봐주었기에 모두들 그의 지도에 따르기를 원했다. 

학생 공작에서도 그들의 잠재력을 불러일으키는데 능숙했다. 그는 연구생들에게 경비 면에서 큰 지원을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일정한 자률성을 주어 장점을 충분히 발휘하게 했다. 적지 않은 활동은 연구생과 본과생들이 함께 전개하여 상호 간의 소통과 교류를 촉진시켰으며 학생들의 활동열정을 크게 증강시켰다. 중앙민족대학 연구생 ‘민족혼·애국정 및 중국인민항일전쟁 승리 65주년 기념 합창경기’에서 생명과 환경과학학원은 1등상과 최우수 지휘상을 수상했다. 적극적이고 건강한 기숙사 문화로 좋은 학급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각 기숙사장이 동시에 정보원을 겸임하고 처음으로 기숙사장을 학생간부로 확정해 그들이 종합평가에서 부가점수를 따낼 수 있고 우수학생간부 선정에도 참가할 수 있게 함으로써 기숙사장의 사업열정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바로 기숙사문화건설의 부단한 추진으로 학원의 학급문화건설은 매우 큰 진보를 가져왔다.  2010년 생명과 환경과학학원 2007급 생물과학 1반은 중앙민족대학에서 처음으로 북경시 ‘학습형우수반집체’의 영광을 수여 받았다.

학원의 전체 교원들과 학생들의 공동 노력하에 생명과 환경과학학원의 제반 사업은 전성기에 들어서게 되였으며 교학, 과학연구, 문체 등 사업은 여러 차례 휘황한 성과를 이룩했다. 특히 보연(保研)진학률은 다년간 전교에서 1위를 차지했다. 학원 당위서기로서 박헌수는 선후로 과학발전관학습실천활동, 북경시 당건설평가, 북경고등학교 당건설선진학교 평가 등 사업을 원만히 완수했다. 그의 인솔하에 중앙민족대학 생명과 환경과학학원은 일련의 특색있는 브랜드 활동을 만들었다. 특히 대학생 사상정치교육의 목적성, 층차성과 실효성 등이 결여된 문제에 대하여 생태문명리론의 형성에서 출발해 생태문명이 대학생 사상정치교육사업에서 응용되는 타당성과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는 ‘생태문명시역에 기초한 대학생 사상정치교육사업’(基于生态文明视域下的大学生思想政治教育工作)학교급 중점과제를 주관해 완수했다. 그는 리론적 성과의 총결과 향상을 중시하고 전국 교육시스템의 유일한 당건설정기간행물인 ‘학교당건설과 사상교육’에 글을 발표하여 중앙민족대학은 민족대학의 거시적 시야에서의 공통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시적 시야에서의 자체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이 특수성에 근거하여 중앙민족대학은 사상정치교육방면에서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하며 중앙민족대학이 소수민족의 걸출한 인재를 양성하는 요람과 민족지역 경제사회발전문제 연구의 중요한 기지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확정했다.

(5)

21세기는 중화민족이 부흥하고 세계 민족의 숲에 우뚝 솟은 위대한 시대이다. 이 위대한 목표를 실현하려면 원대한 리상과 문화가 있는 우수한 인재들이 수요된다. 당대 우수한 대학생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중견이자 골간이며 그들의 각성과 자질의 높낮이는 개혁의 진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 중에서 당원을 양성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매우 긴박한 정치임무였다. 

박헌수는 조사연구를 통해 몇 년간 학원 당위원회는 학생들 중에서 당원발전사업을 강화하고 해마다 학생당원 비률을 제고하고 총체적인 질면에서 크게 향상되였지만 무시할 수 없는 문제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일부 동지들은 학생당원을 발전시키는 것은 학원 당위서기와 학생정치지도원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관심을 갖지 않았기에 전체 당원간부, 교원들이 힘을 합쳐 학생당원을 양성하고 발전시키는 분위기를 형성하지 못했다. 

박헌수는 학원의 정공간부와 교원당원들을 조직하여 중앙조직부와 북경시위원회의 대학생중 당원을 발전시킬데 관한 문건을 진지하게 학습시키고 학생당원발전의 가능성, 필요성, 절박성을 인식하게 했다. 청년학생들은 세계관 형성단계에 처해 있고 가소성이 크고 새로운 사물을 빨리 접수하며 진취심이 강하다. 그들은 당의 로선, 방침, 정책의 학습을 거쳐 조국에 보답하는 책임의식이 뚜렷하게 향상되고 진지한 교육과 양성을 거쳐 공산당원의 표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대학생 중에서 당원을 발전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며 이는 학원 당조직의 저버릴 수 없는 책임이다.

사상인식을 제고하는 기초상에서 상응한 조직조치를 취했다. 매 학기마다 학원 당위원회 회의를 소집하여 보고를 청취하고 경험을 교류하며 상황을 분석하고 존재하는 문제들을 해결했다. 신입생 중 학생당원수가 극히 적어 학생당지부를 건립하기 어려운 상황에 근거해 지부서기, 지도원과 고학년 학생당원으로 구성된 련합당지부를 건립했고 어떤 지부는 교원당지부가 학생학급을 도급하는 등 방법을 채택해 학생중에서 당원사업을 발전시키는 조직적 보증을 가지게 했다.

적극분자 대오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일부 어려움을 겪게 되였다. 어떤 학생들은 입당을 요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풍자와 비웃음을 받을까봐 두려워 했다. 어떤 학생들은 자신이 학생 간부가 아니기에 입당을 제출해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학생들은 입당신청이 공부에 영향을 미칠까봐 두려워 했다. 

박헌수는 신입생들에게 입학 초부터 “삼애”(三热爱)와 4가지 기본원칙을 견지하는 교육을 진행했다. 11기 3중전회 이래 당의 일부 중요한 문건과 기본지식들을 체계적으로 학습시키고 학원의 당조직 상황과 학생당원을 발전시키는 상황을 소개하며 희망과 요구를 제기했다. 학원은 공산주의사상품성과목을 개설하여 학생들에게 일상적인 공산주의사상교육을 진행하고 정확한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수립하도록 도왔다. 각 지부는 학생들의 당안자료와 입학후의 표현에 근거해 조건이 비교적 좋은 학생들을 찾아 담화하고 그들로 하여금 문화과목을 잘 배우는 동시에 제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도록 격려했으며 정치면에서도 적극적으로 진보하여 당조직에 가까워지도록 계발했다. 각 당지부는 학생들을 도와 당규약 자습소조를 설립했다. 박헌수는 매년 방학마다 학원 공청단위원회가 주최하는 공청단간부훈련반에 참석해 연설하면서 공청단조직이 당조직을 위해 적극분자를 수송하는 일을 잘 할 것을 요구했다.

학원의 각 기층당지부는 학생들이 입학한 첫 학기 말이나 두번째 학기 초에 가급적 입당을 절실히 요구하고 당의 방침과 정책을 옹호하며 네가지 기본원칙을 견지하고 열심히 연구하며 성적이 우수하고 제반 정치활동에 적극 참가하며 대중과 련계하는 학생들을 중점배양 적극분자로 삼았다.  매 학년의 첫학기면 입당적극분자 대오에 대해 한차례 심사를 진행하고 전 학원에서 매년마다 300명 정도의 학생 적극분자대오를 유지하도록 했다.

학생 입당적극분자 대오를 건립한 후, 다방면의 사업을 통해 양성교육을 강화했다. 첫째는 전문 양성하고 정기적으로 담화하며 개별인에 대한 사상공작을 진행했다. 모든 학생 입당적극분자에 대해 1~2명의 당원을 지정하여 자주 그들과 련락하고 정기적으로 담화하며 수시로 구체적인 도움을 주었다. 둘째로, 중대한 문제를 틀어쥐고 심포지엄을 전개하여 사상인식을 제고시켰다. 셋째는 정기적인 심사, 단체훈련이다. 매학기 중간과 기말에 두 차례의 심사를 진행해 입당적극분자의 주요 장단점을 분석하고 양성교육의 중점을 명확히 한 후, 심사결과에 근거해 입당적극분자와 담화 훈련을 진행했다.

당원의 발전 질량을 보장하기 위해 비교적 완전한 수속제도를 수립했다. 한사람 한사람 발전시켰으며 대량발전과 졸업 전 돌격발전의 현상을 방지했다. 2008년 한 해에만 전 학원에서 60명의 학생당원을 발전시켰다.

(6)

재학 중인 대학생들은 대부분 부모와 멀리 떨어져 있고 세계관이 아직 완전히 형성되지 않았다. 사회상의 각종 유혹은 그들에게 곤혹과 어려움을 가져다 주었다. 학생들의 성장에는 학교와 선생님의 관심, 도움, 지지가 필요했다. 박헌수는 학원의 당위서기로서 학생들의 심신건강을 자신의 천직으로 삼고 많은 정력을 투입하여 그들이 학습, 생활에서 부딪친 어려움이나 좌절에 대해 해결해 주었다. 천 명이 넘는 학생들이였지만 그는 누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학습에 영향을 주지나 않는 지 등에 대해 제때에 료해하고 그들의 근심을 해소해 줌으로써 안심하고 학업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

2008년 생환학원의 한 녀학생이 란소 기형종(卵巢畸胎瘤)에 걸렸다. 박헌수는 그 녀학생과 학부모를 데리고 여러차례 북경의 몇몇 전문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게 했다. 전문가 번호를 따기 위해 그는 날이 밝기도 전에 학부모와 함께 병원에 갔다. 병원의 치료 방안에 따르면 그 학생은 수술 후 출산 능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수술과 불수술의 딜레마에 직면한 그는 다른 전문 병원에 련락하여 학부모, 전문가와 거듭 소통했다. 결국 병원은 보수적인 치료 방안을 통해 종양을 제거한 동시 출산 능력을 유지함으로써 수술의 영향을 최소화했다. 이 모든 것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감동시켰다. 

학생 개인의 직업 계획에 대해서 열성적으로 세심하게 지도했으며 학생들이 겪는 각 방면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도움의 손길을 보냈다. 반간부, 단간부, 학생당원들과 집체담화를 하고 기숙사장, 중점인과는 개별담화를 했다. 학생들의 개인계획과 자기소개자료에서 그들의 내면세계를 해독하고 계획이 없는 학생은 가능한 한 빨리 구축할 수 있도록 하고, 계획이 비현실적인 학생은 계획을 조정하게 하였으며, 계획을 제대로 세운 학생은 차근차근 목표를 달성하도록 독촉했다. 또한 대학생들의 사회실천을 지도하는 등 형식을 통해 그들이 한층 더 자신을 인지하고 완선화하게 했다. 

지득쌍은 중앙민족대학 법학원의 졸업생으로 박헌수와 북경흑룡강대학생친목회 준비작업에서 알게 되였다. 지득쌍은 졸업 후, 대학생 ‘촌관’으로 기층에 파견되여 사업했다. 그는 창업 프로젝트를 통해 현지 촌민들을 인솔하여 빈곤에서 해탈되고 초요수준에 이르게 했다. 그러나 자신의 학력 향상에 대해 망설였다. 박헌수는 그에게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기회를 잡고 가능한 빨리 목표를 세우도록 격려해 주었다. 나중에 그는 북경교통대학 법학원에 입학해 석사학위를 공부했다. 지득쌍의 ‘촌관’ 복무기간이 만료되자 박헌수는 국가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라고 독촉했다. 그가 안심하고 시험준비를 할 수 있도록 기숙사를 찾아 주면서 생활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주었다. 그의 격려로 지득쌍은 2022년도 북경 공무원시험을 통과하고 면접 1등의 성적으로 북경시시장감독관리국에 채용되였다.

생환학원의 학생 허보의 어머니는 2010년 5월 11일에 교통사고를 당해 두개골이 부서지고 주망막하강 출혈로 깊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응급처치 비용은 매우 높아서 여러 방면의 기금 모금 후에도 여전히 8000여원의 비용을 빚지게 되였다. 병원에서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응급처치를 중단했다. 박헌수는 소식을 듣고 긴급히 각 반 지도원 회의를 소집하여 선생님들에게 허보의 구체적인 상황을 소개하고 각 반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모금활동을 하도록 동원했다. 박헌수의 조직하에 전 학원의 선생님과 학생들은 즉시 행동해 수술비를 모아 허보의 어머니를 제때에 구할 수 있게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생환학원의 교원과 학생 외에도 중앙민족대학의 사생, 이미 졸업한 학생들까지 어려움에 부딪히면 처음으로 박헌수를 생각했다. 그의 따뜻한 마음은 전교에서 이름이 있었다. 공작과 생활에서 항상 열성적으로 남을 도와주고 문제가 있으면 자신의 일처럼 해결해 주었다. 작게는 기차표 구입으로부터, 크게는 구직 상담, 질병에 대한 질문과 의사 찾기, 심지어 투자와 재테크 등 문제까지 도움을 청했다. 박헌수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의 열정은 뼛속부터 나오는 것이다’고 평가했다. 

중앙민족대학의 본연의 사업을 훌륭하게 완수하는 외에도 그는 고향의 “재경차세대”(在京下一代) 젊은이들의 발전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다. 2012년 흑룡강성 북경주재사무소와 북경흑룡강기업상회는 북경에서 북경흑룡강대학생협회를 설립했다. 준비 과정에서 준비팀의 동지들이 박헌수를 찾아왔다. 그는 개인의 인맥을 통해 민족대학의 흑룡강적 교원들을 련락해 준비 작업에 참여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기 주머니를 털어 흑룡강적 학생들에게 활동 경비를 제공해 주었다. 2013년 박헌수는 북경흑룡강대학생협회 및 북경흑룡강기업상회 대학생위원회 고급 고문으로 초빙되였다. 다년간 그는 협회의 활동장소, 활동경비, 소통과 련락 등을 위해 열심히 뛰면서 협회의 발전에 적극적인 공헌을 하였다.

(7)

박헌수는 은혜를 알고 감사해 할 줄 아는 사람이였다. 그는 부모님의 사심없는 헌신과 양육의 은혜에 감사해 했고 형제자매에게 감사해 했으며 모든 선생님과 어른들에게 감사해 했고 함께 분투하고 도와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해 했다. 각급 조직의 다년간의 교육과 양성에 감사해 했으며 감사의 씨앗을 마음 깊이 묻어두고 실제 행동으로 사회를 위해 봉사했다. 

1985년 밀산을 떠나 북경에서 공부하고 사업하며 생활한 지 어언 37년이 되였지만 그는 시종일관 고향사람과 고향사업의 발전을 념려하고 걱정했다. 수도 북경에 거주하는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각종 경로를 통해 적극적으로 고향을 소개하고 고향의 투자유치,인재모집, 로무수출과 취업자문 등을 위해 다리를 놓으면서 최선을 다했다. 밀산은 조선족이 상대적으로 집결된 곳으로 로년협회활동이 비교적 활발히 전개되였다. 그는 로년협회의 각 사업과 로인들의 심신건강에 관심을 기울이고 로년협회에 성금과 물품을 기부했다. 2020년 밀산시조선족로년협회 총회는 협회 창립 20주년에 즈음하여 대형 기념화첩 “석양만청”을 편집 출판했다. 박헌수는 기념화첩 편집위원회의 초빙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편집심사를 맡았다. 그는 자신의 인맥을 동원하여 기념화첩의 편집 출판을 위해 많은 일을 했고 출판발행에 만원을 기부했다.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亚运会) 기간, 그는 아시안게임 마을에서 자원봉사자가 되여 한국어 통역을 맡았다. 두 달 남짓한 봉사 기간에 그는 대회의 제반 제도를 엄격히 준수하고 직무와 책임을 다하며 조금도 소홀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봉사하며 고품질로 제반 사업 임무를 완수했다. 그의 뛰여난 활약은 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의 칭찬을 받았다. ‘당시 중국인으로서 아시안게임을 위해 봉사할 수 있게 된 걸 행운으로 생각하며 임무가 신성하고 영광스럽게 느껴졌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당시의 정경을 회상할 때면 그의 눈에는 여전히 열정의 빛이 가득 차 있었다.

1998년 장강류역에 특대홍수 재해가 발생한 후, 중앙민족대학에서는 ‘홍수방지’기부활동을 전개했다. 박헌수는 제1시간에 추호의 주저도 없이 자신의 적은 로임에서 2000원을 기부했다. 실제행동으로 사회책임을 지고 사랑으로 박애의 정서를 전달했다. 여러 차례 천원 이상의 특별당비를 바치면서 조직의 배양에 감사하고 사회의 도움에 감사했다.

박헌수의 사업과정에서 보여준 헌신정신은 주변의 사생들을 감염시켰다. 그는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고 말했다. 1999년 국경 50주년 경축 준비행사에서 박헌수는 민족대학생화학과 학생들을 조직하여 수도대학생 행진방진훈련(游行方阵训练)에 참가했다. 북경의 7, 8월 낮의 평균 온도는 섭씨 30여 도에 달했는데 그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서 매일 4시간 훈련을 했다. 그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학생들과 함께 더위를 견디며 규정된 동작을 훈련했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훈련과정에서 기절했다. 하지만 한사람도 포기하지 않았고 끝까지 견지했다. 국경 50주년 행진행사가 원만히 끝난 후, 행사에 참가했던 민족대학생화학과 학생들은 박헌수에게 ‘비록 우리는 여름방학 내내 휴식을 포기했지만, 두 달간의 훈련은 매우 충실하고 즐거웠다. 모두들 부동한 민족, 부동한 지역, 부동한 문화배경과 풍속습관을 가지고 신중국 50주년 탄신에 헌정하기 위해 함께 모여 열심히 훈련했으며 서로 도우면서 민족단결의 기쁨을 깊이 느꼈다.”고 감개무량하게 말했다.

학원의 지도자로서 박헌수는 주변 력량을 광범위하게 동원해 각종 자원봉사활동에 참여했다. 2008년 북경 올림픽 때, 그는 솔선수범하여 학생들을 조직해 자원봉사에 신청하게 했다. 결과 30명 이상의 대학생들이 자원봉사 활동에 참가했다.

박헌수의 인격적 매력은 결단성 있는 사업작풍뿐만 아니라 간고소박하고 명리를 담백히 여기는 고상한 품격에서도 체현되였다. 학원의 당무사업에 종사한 30여 년 동안 그는 성부급의 상을 선정하든 직함을 진급하든 임금을 올리든 몇 차례나 영예와 기회를 동료에게 양보하여 우수한 공산당원의 품성을 보여주었다.

2009년 국경60주년 축제 준비활동에서 박헌수는 군중행진 ‘중화사랑’ 방진 제6중대의 중대장을 맡게 되였다. 제6중대의 조직 관리 및 리허설 훈련 업무를 책임졌다. 이미 55세의 나이가 된 그는 비록 군중 행진엔 참가하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훈련, 리허설의 최일선에 서있었다. 학교 운동장에서의 훈련이든 5번의 분지(分指)와 총지(总指)의 합동 훈련이든 모두 신체 불편 등 각종 어려움을 극복하고 참가했다. 군중행진방진은 대부분 걸어서 천안문 광장을 지나갔다. 유독 중앙민족대학의 900명 대학생들로 구성된 “중화사랑” 방진만은 전국 56개 민족을 대표하여 전 과정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즐거워하며 천안문광장을 통과했다. 이는 력대 국경절 축제에서 처음으로 민족 복장을 입고 표연한 방진이다. 90여일의 밤낮되는 훈련에서 박헌수는 한 번도 휴가를 내지 않고 시종 대원들의 곁에 있었다. 전교에서 극소수의 전근(全勤)기록을 낸 중대장 중 한 명이 되였으며 수도국경절 60주년 경축행사 지휘부로부터 ‘수도국경절 60주년 행진활동 우수공작자’라는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당시 국경절 ‘중화사랑’ 군중행진방진 훈련이 긴박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 박헌수는 중앙민족대학을 대표하여 전국 제4회 대학생 무룡무사 선수권대회(舞龙舞狮锦标赛)에 참가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그는 즉시 학원의 학생들을 동원하여 11명의 생환학원 학생들로 구성된 중앙민족대학 무룡대(舞龙队)를 설립했다. 이 11명의 무룡대 학생들은 동시에 국경절경축 군중행진 ‘중화사랑’ 방진훈련에 참가했기에 훈련시간이 충돌되는 문제가 나타났다. 박헌수는 합리적으로 훈련 시간을 배정하고 매일 학생들과 함께 훈련하면서 훈련의 주도권을 쥐였다. 이번 선수권 대회에서는 전국 25개 대학교의 46개 무룡대(舞龙队)와 무사대(舞狮队)가 함께 경쟁했다. 수도대학교를 대표하여 시합에 참가한 두 개의 무룡대 중의 하나인 중앙민족대학 무룡대는 전국 제4회 대학생 무룡무사 선수권대회 ‘우승상’을 취득하여 학교를 위해 영예를 떨쳤다. 영예는 중앙민족대학의 력사이래 이 시합에서 처음으로 받은 상이였다.

봄누에는 죽을 때까지 실을 뽑고, 초불은 재가 될 때까지 눈물을 흘린다. 40여 년의 사업 중에서 박헌수의 근면하고 착실한 사업기풍과 뛰여난 지도재능은 조직의 인정을 받았다. 선후로 ‘흑룡강성밀산현로동모범’, ‘중앙민족대학 우수당무사업자’, ‘중앙민족대학 우수당원’, ‘중앙민족대학 선진사업자’, ‘북경대학교 2010-2012년 선두우수공산당원’, ‘수도 60주년 군중행진우수사업자’ 등 영예칭호를 수상했다. 그가 주관하여 완성한 당건설과제는 ‘중앙민족대학 당건설과제 우수성과상’, ‘북경시대학교 우수당건설사업 혁신프로젝트’로 선정되였다. 2016년, 그는 ‘북경시교육시스템 차세대우수특별초청 당건설조직원’으로 선정되였다.

초심을 잊지 않고 사명으로 인재를 육성하면서 보낸 수십년 세월,  풍상세례는 얼굴에 주름을 새겼지만 마음속 격정을 앗아가지는 못했다. 박헌수는 시종일관 초심을 굳건히 지키고 시대가 부여한 사명과 책임을 과감하게 감당하면서 지칠 줄 모르는 분투자세, 비범한 인격매력과 시대와 함께 하는 혁신정신으로 고등학교 당무사업의 빛나는 장을 썼다.

/맹고군(피금련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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