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순전범관리소옛터전렬관이 9월 18일 공개한 한 일본 전범의 친필 자백서 및 재심 기록을 통해 동북항일련군의 창설자이자 주요 지도자 중 한명인 조상지 장군이 희생된 정확한 시간이 1942년 2월 12일 7시임이 확인되였다.
덴이큐지로 친필 자백서
무순전범관리소옛터전렬관 직원 서명(徐铭)에 따르면 이 친필 자백서는 당시 위만주국 삼강성(三江省) 학립현(鹤立县) 흥산(兴山) 경찰서장이었던 일본 전범 덴이큐지로(田井久二郎)로부터 나온 것이다.
덴이큐지로는 재판장에서 조상지 장군을 살해한 전후 과정을 다음과 같이 자백했다: "탕원과 학립 두현 경계의 산중턱 일대에 조상지 장군이 나타났다. 이에 나와 도조(东城)는 극도로 공포에 떨었다. 우리는 치안을 유지하려면 조 장군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도조에게 과거에 사용했던 밀정, 례를 들어 모피 사냥꾼 등을 파견해 조상지 장군의 부대에 잠입시키고 기회를 봐서 조 장군을 중상을 입힌 후 체포하거나 암살할 계획을 세우도록 명령했다. 나는 도조에게 이 일을 실행하라고 명령했다. 1941년 12월말부터 다음해 1월초까지 밀정 류덕산(刘德山)과 장청옥(张青玉) 두 사람이 조상지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에 잠입해 암살을 계획했다... 나는 밀정 류덕산 일당을 금전으로 조종해 이런 범죄를 저지르게 했다. 나는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덴이큐지로는 자백에서 "1942년 2월 12일 새벽 3시, 류덕산이 기회를 봐서 조상지 장군의 등뒤에서 장군을 향해 발포해 장군의 하복부를 명중시켜 중상을 입히고 쓰러뜨렸다. 바로 이때 오동하(梧桐河) 북쪽 2km 지점에 파견된 약 30명의 경찰 경비대가 즉시 조상지 장군을 체포했다. 장군이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당일 오전 7시에 국가를 위해 죽음을 맞이했다"고 말했다.
덴이큐지로는 친필 자백서에서 "중국 국민에게 사죄한다"고 썼다. 결국 그는 16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여러해 동안 우리는 조상지 장군이 희생된 정확한 시간을 알지 못했다"조상지 기념관 부관장 정영(郑滢)은 말했다. 덴이큐지로의 자백이 이 수수께끼를 풀어주었다.
"당시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은 '작은 만주국, 위대한 조상지'라고 감탄했었다"고 료녕성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소장이자 연구원인 왕혜우(王惠宇)는 말했다. "이 자백은 동북항일련군이 침략자들을 두렵게 했음을 다시 한번 립증해준다"고 덧붙였다.
/신화사
편역 라춘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