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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한복에 사랑과 정성을 담아

2025-07-02 12:52:54

청도원희한복 권경순 대표 25년간의 감동 운영 스토리

딸의 한복 차림에서 시작된 꿈, 이제는 청도의 문화 아이콘으로

"엄마, 나 이 꼬까옷 정말 이뻐?"

2001년 6.1아동절, 4살 난 딸 원희가 한복을 입고 활짝 웃던 모습이 권경순(55세) 씨의 인생을 바꿨다. 사랑하는 동갑내기 남편과 함께 딸애손을 잡고 청도 리창구 매화산으로 가는 버스와 관광지에서 쏟아진 현지인들의 칭찬 속에서 "이게 사업이 되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조선의상이 너무 이뻐요"

"어린 딸애가 너무 귀여워요"

현지인들의 딸애와 한복에 대한 칭찬일색속에서 이들 부부는 한복집을 운영하면 큰 시장이 있겠구나 하는 신심이 생겼다. 

명절에 친정인 연변에 갔다가 우연히 만난 연길 동창생이 운영하는 한복 공장과 손을 잡고 청도 리촌시장에 20평방미터 작은 매장을 열었다. 

2001년 6월 19일 연변에서 구입한 14벌 한복판매를 시작으로 권경순씨의 창업이 고고성을 울렸다. 상가명칭은 딸애의 이름을 딴 원희한복점(元熙韩服店)으로 정했다. 당시 청도에서 가장 많은 조선족이 살고 있는 리창구 리촌시장 빈하로 한국정품백화점내 1층에 가게를 차렸다. 

그렇게 장장 25년이 지나서 큰 딸애는 이제는 28살, 연변대학 한어문 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로산구에 위치한 한국식품회사에서 중견으로 활약하고 있다. 권경순씨의 창업의 꿈도 어느덧 25년, 청도에서 우리 민족의 복장문화를 알리는 대표적인 한복점으로 자리매김했다.

리촌시장이 철거되면서 가게를 308국도옆에 위치한 국제공예품성으로 옮겨 4년 운영하다가 다시 2013년에 청양구 정양로 중심에 위치한 루방국제풍정거리(鲁邦国际风情街) 1층으로 옮겨 70여평방미터 되는 가게를 오늘까지 열심히 운영하고 있다. 

시어머니를 모신 15년, 눈물과 땀으로 쓴 효(孝)의 기록

"한복은 단순한 옷이 아니에요.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예술품입니다."

권경순씨가 평소에 입버릇처럼 외우는 말이다. 

1999년, 시어머니 백분녀 씨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의사가 "희망 없다"고 선고했지만 권경순씨는 남편 리경도와 함께 시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왔다. 

1970년도 개띠생인 권경순씨는 연변 모아산 기슭의 룡정현 동성향 해란촌에서 4남매중 셋째로 태여났다. 어릴때부터 할머니를 모시고 일곱식구가 한집에서 살았다. 때시걱마다 집안은 활기가 띠기 시작했다. 다른 집과 달리 이집 밥상은 항상 각종 풀채소 등으로 풍성했다. 할머니의 채마전을 다루는 정성이 들어갔다. 여름에도 귀한 화로불에 된장국을 보글보글 끓여서 아버지에게 대접하였는데 전통적인 조선족가정의 례의범절이 잘 지켜진 대가정의 모습이였다. 

그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외자기업바람이 불어 연변을 떠나 청도 청양구 하장진촌에 위치한 한국기업 한신신발회사에 근무한 권경순씨는 언제나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 성격이 활달하고 항상 남을 배려하고 례의를 잘 지켜서였다. 

"저 경순씨 우리집에 시집 안올래요. 우리 큰아들이 너무 좋아요. 우리 집에 오면 고생할 일이 없어요"

당시 회사에서 식모일을 하던 백분녀라는 아주머니가 평소에 권경순이를 눈여겨보던중 과감한 제안을 한것이다. 결국에는 시어머니가 아들의 중매를 선 것이다. 

당시 백분녀씨의 큰 아들 리경도씨는 고향 길림성 교하의 담임 리복길선생의 도움으로 청도에 진출하여 청양구 모 한국기업에서 1991년부터 근무중이였다. 

"만나고보니 내 수준에 맞는 여자였지요. 사귀고보니 괜찮았어요. 가정교육을 잘 받아서 더욱 마음에 들었어요."

권경순씨에 대한 리경도씨의 평가이다. 

"맏이였는데 사람이 점잖고 성품이 좋았어요." 남편에 대한 첫 인상이다. 

이렇게 청춘남녀는 1년을 사귀다가 1997년 2월 7일에 결혼식을 올렸고 1998년 11월 16일에 사랑의 선물로 첫 딸애가 태여났다. 

그러나 행복한 생활도 잠깐 중매를 서준 시어머니가 심한 뇌출혈로 쓰러졌다. 

중환자인 시어머니는 찬바람을 맞으면 안돼 두칸짜리 집 창문은 항상 닫겨 있었다. 음식도 매운것과 단것을 들지 못했다. 그러니 끼니마다 신경을 써서 따로 챙겨야 했다. 

무더운 여름에도 창문을 열지 못해 선풍기조차 틀 수 없었던 방에서 대소변 냄새를 견디며 옹근 15년을 간병했다. 감동과 눈물이 없이는 들을수 없는 현대판 효녀 심청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강인한 시어머니도 마비되지 않은 왼손으로 스스로 밥을 먹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점심에 혼자서 침대에서 내려 며느리가 준비한 점심을 드면서 강한 의지력으로 버텨냈다. 그러다가 침대에서 떨어져 골절되고 당뇨합병증까지 와서 어쩔수없이 생을 마감했다. 전문의사들도 손을 든 병이였지만 며느리와 자식 손주들의 효성에  받들려 장장 15년이란 세월을 견뎌낸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2013년 12월 27일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 며느리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며늘아가야 그동안 고마웠어. 고생 시키지 않을려고 데려왔는데..."

시어머니는 뒤말을 잊지 못하고 흐느끼고 말았다. 

"아니요. 어머니 이것은 제가 응당 할 일이예요."

이렇게 화답하는 권경순씨의 눈에서는 줄 끊어진 진주마냥 눈물이 주룩룩 흘려내렸다.

권경순씨는 떠나가는 시어머니에게 가장 이쁜 한복을 입혀보냈다. 질병과 고통이 없는 천국에서 시어머니가 아픔을 훌훌 털고 일어나 이쁜 한복을 입고 덩싱덩실 춤추는 모습을 간절히 보고 싶었다.

한복으로 중국시장을 정복하라! 민족복장문화 전파의 선봉장

청양구 정양로 루방국제정품거리 1층에 위치한 원희한복집에 들어서면 항상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한복 색상이 화려하고 품질이 좋으며 특히 서비스가 좋다고 하는데 그중에도 사모님 성격이 좋다고 엄지손가락을 내세운다. 

"물건을 안사도 얼굴은 보고 가야지" 아줌마들이 수시로 찾아와 커피 한잔 마시면서 수다를 떨수 있는 곳이 바로 원희한복집이다. 

년세가 아무리 많은 고객이 와도 권경순씨의 입에서는 "언니"라는 호칭이 자연스레 나온다. 80세 이상이여도 언니라로 불러주면 기분이 좋아서 얼굴에 미소가 찰랑인다.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손님이 들어서면 "아야, 이제는 자리를 내주어야지." 하면서 스스로 자리를 내주고 돌아간다. 

초창기 연변에서 들여온 복장을 위주로 판매하던데로부터 점차 한국의 유명 브랜드로 수입원을 개척했다. 날로 높아지는 다양한 고객들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다. 

경영을 해오면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가 코로나시기다. 코로나로 매출이 반토막 나자 권경순씨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한복대여시장을 대폭 개척한것이다. 현재 판매액의 90% 수입이 대여에서 온다고 한다. 특히 소비가 위축된 올해는 다양한 고객의 수요에 따라서 각종 공연복장을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여 환영을 받고 있다. 청양구에서 활약하고 있는 수많은 예술단들은 물론 연태, 위해의 단체들도 이미 원희한복집의 단골로 되였다. 

최근에는 한복 웨딩 촬영 서비스를 개시하면서 한족 관광객들에게 조선족 복식문화를 널리 알리고 있다. 최근 관광으로 찾아오는 관광객들로부터 루방국제풍경거리(3A급 관광지)에서 원희한복을 입은 신부들의 웨딩 사진은 SNS에서 화제를 모았다. 1500원이면 원하는 한복을 선택하여 입고 촬영하는데 사진첩까지 챙겨주는 서비스는 소비자들의 각광을 받고 있다. 

따라서 위챗 틱톡에서 원희한복에 대한 칭찬화면을 심심찮게 볼수가 있다. "한복을 입은 중국 신부들이 '한국 드라마 주인공 같다'며 좋아해요.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죠!"

권경순씨의 기쁨에 찬 말이다. 

앞으로 한복대여업무를 북경, 절강, 상해, 할빈 등 전국 여러 대도시로 계속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가족은 나의 힘, 한복은 나의 길

올해 5월 25일 청도 70친목회 설립 10주년 및 월드70친목회 설립 대형행사 무대에서 권경순씨가 이끈 개띠 녀성 7인춤 '왔지용'은 전국각지에서 온 170명 동갑들의 열띤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쁜 한복을 입고 아름답게 춤을 추면서 그녀는 다시한번 민족복장과 민족무용의 매력을 느꼈다. 조상이 만들어낸 한복을 입고 민족 문화의 살아있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민족의 전통을 이어나갈 사명이 우리 세대 어깨에 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우리가 이어나가지 못하면 우리 후대들은 더 할수가 없지요. 피할수 없으니까 즐기면서 하는것이죠."

권경순대표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녀의 또다른 애호는 야채가꾸기이다. 아파트 베란다에 올망졸망 마련된 화분에 상추와 고추, 토마도 등 각종 야채를 재배하여 키우면서 "제철 음식으로 가족 건강을 챙기는 게 취미"라고 웃는 권경순씨. 그녀는 매일 아침 남편을 위해 된장국을 끓이며 밥상을 챙긴다. 하늘같은 남편이라며 정성을 다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어릴쩍 온 가족의 밥상을 위해서 채마밭을 알뜰히 가꾸어 야채로도 풍성하게 상을 차려주던 할머니의 모습을 볼수 있다. 

권경순씨는 1년 열두달 가게에 출근한다. 매년 음력석때만 며칠을 휴식하고 나머지는 매일 가게에서 시간을 보낸다. 

어쩌다가 주말이 되면 딸애 원희와 고중 2학년에 다니는 아들애도 집을 찾아와 가족이 오붓이 한자리에 모인다. 의례 권경순씨의 정성이 담긴 밥상이 푸짐하게 나온다. 

어느날 키가 훨씬 큰 아들애가 어머니를 보면서 한마디 던진다. 

"엄마, 너무 힘들게 살지마. 든든한 아들딸 뒷심이 있잖아!"

순간 그 소리에 경순씨는 큰힘을 얻었다고 한다. 

그렇지 우리 민족의 후대들이 산동땅에서 씩씩하게 자라고 있지 않는가. 이들은 아직도 청춘이다. 청춘은 미래이고 희망이다.

25년 원희한복운영에 담겨온 감동 스토리, 가족을 향한 효성과 사랑, 민족문화를 지켜가는 뜨거운 열정—권경순씨의 이야기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민족사랑과 전통유지에 대한 많은 내용을 담아 전해주고 있다. 

/박영만 기자, 리계옥 특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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