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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강반에 활짝 핀 예술의 꽃

2025-01-22 11:06:41

- 인민예술가 고 남영선생님을 추모하여

2024년 12월22일 오후 남영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부고를 받은 나는 억장이 무너진듯한 슬픔에 잠겼다. 한편 고인 남영선생님께서 예술을 탐구하는 길에서 걸어오신 발자욱들이 새록새록 눈앞에 나타났다. 

1940년 12월 29일 남영선생님께서는 흑룡강성 상지현 하동향 6계마을의 남씨 가문에 일곱째로 태여나셨다. 째지게 가난한 살림에 일곱째가 태여나자 어머니께서는 어린애가 없는 집에 양자로 보내려고 생각하셨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이런 일곱째 남선생님께서 무럭무럭 자라면서 남한테 없는 재주로 마을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눈썰미가 남달랐던 남선생님은 뭔가 한번만 보면 주변에 흔한 진흙으로도 그것을 척척 만드는가 하면손칼로 나무에 무늬를 새겨 그것을 만드셨다. 그의 재주는 상지현조선족중학교를 다니실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셨다.

그의 조각작품은 종종 신문, 잡지에 실렸다. 1960년 9월, 남영선생님께서는 우수한 성적과 뛰여난 조각작품으로 “할빈예술학원 미술학부”에 입학하셨다. 미술학부에서 예술의 대가 서비홍(徐蕜鸿)의 제자 반소당(藩绍堂)교수의 지도하에 조각예술 리론을 참답게 배우셨으며 조각실천을 남보다 공들여 배우셔 반급에서 앞자리를 차지하셨다. 그의 조각작품 “자매”는 북경에서 열린 전국 미술전시회에 전시되어 조각예술가들의 눈길을 끌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교를 졸업할때만 하여도 그는 조각예술분야에 배치받아 어려서부터 무르익혀온 꿈을 펼치리라 다짐했었다. 그런데 그이가 졸업하던 해부터 중국에서는 지식분자가 공농병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이상한 붐이 불기 시작했다. 그뒤 남영선생님께서는 조각예술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가목사시 인쇄제지공장에 발령받고 말단노동자로 되였다.

모든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오는 법이다. 1965년 가목사시에서 영웅 류영준열사의 사적이 신문, 방송을 통해 널리 전해졌다. 놀라서 날뛰며 대로를 달리던 말의 고삐를 잡아채 하교중의 여러 학생들을 구하고 자신은 희생된 류영준열사의 희생장소로 추모의 대오가 꼬리에 꼬리를 이었다. 그 시기 가목사시 인쇄공장의 말단노동자였던 남영선생님께서는 남다른 생각을 하셨다. 

"류영준열사께서 희생한 곳에 열사의 동상을 세운다면 열사의 영웅사적이 더 널리 전해지고 오래오래 추모할수 있지 않을까…“


남선생님께서는 먼저 류영준조각상을 설계한 뒤 가목사시 관계부처를 찾아가셔서 그의 계획을 말씀드렸다. 그의 제안은 시관계부처의 한결같은 호응을 받았다. 1966년 9월 남영선생님께서 제작하신 “류영준조각상”이 열사의 희생지에 우뚝 세워졌다. 이 소식이 ”해방군일보“, “중국청년보”에 실리자 해방군전사들, 중학교, 대학교 학생들의 발걸음이 줄을 이었다.

당시 고중을 졸업하지 못하고 학교에서 문화대혁명시기를 겪던 나도 가목사시로 가 ”류영준열사의 동상“을 참배했다. 남영선생님의 조각예술은 그가 소속해 있던 가목사인쇄제지공장 공장장의 이목을 끌었다. 뒤이어 높이 20메터 ”모택동주석 석고상“이 남영선생님의 손끝에서 제작되여 인쇄공장 앞마당에 우뚝 세워졌다. 1992년 겨울, 남영선생님께서는 새로운 기회를 잡으셨다.

그해, 나는 림구현 장흥향 오성촌으로 갔을 때 그 마을의 김달준청년이 집마당에다 얼음으로 잉어, 사슴, 호랑이 등 조각상을 만들어 세운걸 취재해 흑룡강신문에 발표했다. 당시 ”경제정보신문“의 총편집이신 남영선생님께서 내가 쓴 기사를 보시고 기발한 생각을 하셨다. "겨울에 할빈시에다 얼음조각전시장을 설립하면 많은 시민들이 구경할것이다."남영선생님께서는 수십장의 조각설계도를 그리신후 할빈시정부 관계부처를 찾아가셔서 그의 계획을 말씀하셨다. 

할빈시정부 관계부처에서는 그의 계획을 검토한 뒤 관할 부시장한테 제출했다. 그의 구상은 할빈시 관할분야의 관심을 끌었다. 시정부에서는 ”얼음조각 전시장“을 “할빈조린공원”으로 정하고 조각에 필요되는 모든 장비를 제공키로 했다.

송화강이 두텁게 얼자 관계부처에서는 얼음을 채집해 조린공원으로 실어 날랐다. 남영선생님께서는 10여명의 조각가들을 이끌고 낮에는 얼음조각품을 만들어 세우고 밤에는 채색 전등을 얼음조각품 안에 설치했다.

1993년 1월 5일 저녁 7시 “제1회 할빈빙등전시회”가 정식으로 막을 올렸다. 이튿날부터 할빈시민들은 20전(인민페) 입장권을 구입해 오색령롱한 얼음조각작품을 관람하며 “와~” 하는 감탄의 함성과 함께 동화속 겨울왕국을 감상할수 있었다. 

얼음조각 대다수가 남영선생님의 작품이었다. 제2회부터 흑룡강성 조각애호가들의 얼음조각작품이 전시되기시작했다. 림구현 오성촌 김달준의 얼음조각품도 명당에 자리를 했다.  

뭇사람들의 발길을 끈 얼음조각작품 중 항일영웅 리조린장군의 묘지 앞에도 남영선생님께서 조각한 리조린장군의 얼음조각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할빈 조린공원에서 얼음조각전시회를 제5회까지 개최한 후 남영선생님의 제안으로 전시장은 할빈 태양도 옆의 넓은 공지로 옮겨졌고 대규모의 빙등과 얼음조각작품들이 함께 전시됐다. 

할빈시관계부처에서는 남영선생님의 참여없이 자기들끼리 해도 된다고 여기고 남영선생님을 참가시키지 않고 전시장회 명칭을 “할빈빙설제”로 개명하였다. 이곳에서 열린 빙설제를 ”제1회 할빈빙설제“ 라고 했다. 그런데 할빈시 관계부처의 생각과 달리 조린공원 전시회는 해마다 경제수입이 흑자였으나 태양도빙설전시회는 첫회부터 경제수입이 적자를 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신 남영선생님께서는 시정부 관계부처를 찾아가 볼거리 많은 빙설전시회를 만들려면 전국의 조각인재를 발굴해야 한다고 제안드렸다. 제25회 빙설조직위부터 드디어 남선생님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각인재를 전국뿐 아니라 세계적 범위내에서 발굴하기 시작했다. 대성공을 이루었다.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경제수익도 큰 흑자로 돌아섰다. 

지난해의 제25회 빙설제장면을 텔레비전으로 관람하신 남영선생님께서는 더 없이 기뻐하셨다. 조각예술의 정상에 오르신 남영선생님의 배움의 걸음은 멈출줄 몰랐다. 당시 ”경제정보신문(중문신문)“총편집이신 남영선생님께서 낮에는 사무실에서 업무로 분망히 보내셨고 퇴근후에는 작은 화실에서 밤늦게까지 그림을 그리셨다.

그이가 그린 ”안중근과 할빈“,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쏘다”라는 련재그림은 국내외 예술분야에서 호평을 받으셨다. 한국에서는 안중근탄생 100주년을 맞으면서 이 그림을 “안중근기념관”에 전시했다. 한국을 방문중이던 남영선생님께서는 당시 김영삼대통령님의 접견을 받으셨다.

2001년 1월에 정년퇴직하신 남영선생님께서는 여러 질병으로 고생하시면서도 산수화창작에 몰두하셨다. 그이께서 그린 20편의 산수화는 “전국그림전시회”에서 금상을 받으셨다. 2010년 북경공예미술출판사에서는 “남영산수화작품집” 화책을 출판했다. 2022년 8월 “중국서예미술연합회”에서는 남영선생님께 ”인민예술가“라는 명예를 안겨주었다. 54명 인민예술가 명단중 조선족화가로는 남영선생님이 유일했다.

2024년 12월 22일 11시27분 남 영선생님께서는 향년 84세로 이 세상을 떠나셨다. 위대하신 인민예술가 남영선생님께서 영생하시길~

최영철 드림 

2025년 1월 22일

한국 부천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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