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성 민족사무위원회의 1986년 통계 자료에 의하면 성내 조선족 마을이 499개인데 62개의 현, 시에 분포되여 있다. 이 모든 조선족 마을은 조선의 이주민들이 살길을 찾아 고향을 등지고 괴나리보짐을 메고 성내 여러 지역에 정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우리 나라 동북3성에서의 조선인 이주가 흑룡강성이 제일 늦게 이루어 졌다고 한다. 20세기 초기부터 조선이주민들은 목단강시 산하의 녕안, 해림, 동녕, 목릉, 림구 그리고 밀산 등 현, 시에 많이 정착하였는데 이주민들은 주로 조선의 함경도 출신들이 였다. 그 후로 조선의 이주민들이 흑룡강성의 서쪽과 북쪽으로 많이 진출하여 정착하였는데 이주민들은 주로 조선의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들이였다. 조선인 이주민들은 오두막을 짓고 숲이 우거진 황무지를 개간하고 하천의 물을 끌여들여 논을 일구고 부락을 세우고 학교를 꾸렸다. 당시 민간에서 다른 민족들은 조선족이 모여사는 동네를 '꼬리툰(高丽屯)', 또는 '꼬리잉즈(高丽营子)'라고 불렀는데 조선족 마을 이름이 명명되면서부터 '꼬리툰'소리가 점차 민간에서 사라졌다.
기실 우리 성내에 정착한 조선족들의 리력은 대동소이하다. 마을 초창기 부터 조선족개척민들이 어느 마을에 누가, 언제 선참으로 정착하고 마을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는지 일일이 확인 할수가 없는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기록을 남긴것이 적고 개척민의 1세대와 2세대 그리고 적지 않은 지정인(知情人)들이 이미 저세상으로 가다보니 마을 이름에 담긴 비밀을 헤쳐보는데 적지 않은 애로가 있었다. 그러나 기록에 담긴 전설같은 이야기를 읽어보면서 그리고 499개의 마을 이름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면서 마을 이름에 고스란히 담긴 개척민들의 도전 정신과 동경심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럼 아래에 조선족마을 이름에 담긴 비밀이 아닌 비밀을 파헤쳐 보려 한다.
1) 밝은 미래에 대한 도전과 꼭 잘 될거라는 소망을 담아 마을 이름을 지었다.
성내 499개의 조선족마을 이름 가운데서 이름이 똑같은 마을이 많은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수적으로 많은 촌이름을 보면 동광촌(东光村)이 10개, 신흥촌(新兴村)이 8개, 동명촌(东明村)이 7개, 광명촌(光明村)이 6개이다. 그리고 '신(新)'자를 붙여 지은 촌이름이 73개, '광(光)'자를 붙여 지은 촌이름이 62개, '동(东)'자를 붙여 지은 촌이름이 53개, '흥(兴)'를 붙여 지은 촌이름이 52개, '성(星)'자를 붙여 지은 촌이름이 41개, '선(鲜)'자를 붙여 지은 촌이름이 34개, '명(明)'자를 붙여 지은 촌이름이 26개이다. 조선족들이 선호했던 이런 글자를 붙여 지은 마을이름들을 보면 실로 긍정적 에네지가 넘쳐 흐르는 이름들이였다. 그 어떤 종교적이거나 미신적인 색채가 조금치도 없는 이름들이다. 특히 몇몇 조선족향 산하의 조선족촌명을 보면 마치도 누구네 가문의 이름자돌림을 한것처럼 마을이름을 명명한 것이 또 하나의 특색이였다. 그 사례로 북안시 주성조선족향 산하의 조선족촌명을 보기로 한다. 위성촌, 주성촌, 금성촌, 홍성촌, 명성촌 등 촌명에서 '성(星)'자 돌림이였다. 또 하나의 사례는 밀산시 화평조선족향을 들수있다. 동승촌, 동흥촌, 동명촌, 동선촌등에서 '동(东)'자 돌림이였다. 조선족향 외에도 해림시 신합향의 조선족마을이름을 보면 신합촌, 신승촌, 신흥촌,신중촌, 신락촌 등 '신(新)'돌림이였다.
2) 협동과 협력을 잘하여 벼농사도 잘 짓고 마을건설도 잘 하면서 잘살아 보려는 욕심을 마을이름에 담았다.
수전농사는 농토기본건설과 수리시설건설 등으로 농호들지간의 협동과 협력이 필요하여 집단적형태의 생활을 하여야 했고 또 한방면으로는 일제가 식민통치를 가강하기 위하여 조선족개척민들을 강제로 집중시켜 부락을 형성되게 하였다. 마을이 형성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걸쳤고 마을이름이 지어져서부터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잘살아 보려는 목표르 향해 한시도 발결음을 멈추지 않았다.
림구현 룡조진 일심촌(一心村)은 1943년에 마을에 정착한 개척민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떨쳐나서 마을길을 곧게 빼고 초가집을 나란히 지어 38세대가 새집들이를 했다. 하여 마을사람들은 한마을 한뜻으로 뭉쳐 잘살아 보려는 욕심으로 마을이름을 일심촌이라고 명명하였다. 연수현 가신진 유민촌은 넉넉할 '유(裕)'자에 백성 '민(民)'자를 붙여 촌 이름을 지어 잘 살아보려는 마을사람들의 념원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이 외에도 벌리현 길흥향 부흥촌(富兴村), 방정현 보흥향 부민촌(富民村), 연수현 가신진 부유촌(富裕村), 등이 있으며 가목사시교의 항심촌(恒新村), 아성시 사리향과 녕안시 화룡향 그리고 수화시 흥화샹의 근로촌(勤劳村)들도 있다. 해마다 풍년을 기약하고 좀더 나은 풍요로운 생활을 위하여 “풍(丰)”자를 붙여 지은 마을이름이 25개나 된다.
3) 마을이름을 개명한 사례가 특별히 많다.
훌륭한 이름보다 더 좋은것은 없다는 말이 틀림 없다. 살아가다 보면 예전에 지은 이름이나 또는 원주민들이 부르던 마을이름들이 마음에 다가오지 않거나 또는 새로운 념원을 담은 마을이름을 부르기 위하여 촌명을 개명한 사례가 많았다. 그 대표적 사례를 두개만 들겠다.
사례(1), 탕원현 탕왕조선족향에서는 인민공사시기에 예전에 부르던 마을 이름들을 개명하였다. 중심촌(中心村)을 금성촌(金星村)으로, 부귀촌(富贵村)을 태양촌(太阳村)으로 ,광성촌(光星村)을 홍광촌(红光村)으로, 영원촌(永远村)을 성광촌(星光村)으로, 승리촌(胜利村)을 홍기촌(红旗村)으로, 안민촌(安民村)을 동광촌(东光村)으로, 영전촌(永全村)을 오성촌(五星村)으로 개명한 것이다.
사례(2), 동녕현 삼차구진에서 중국과 로씨야 사이로 흐르는 후부트하(瑚布图河)물줄기를 거슬러 남쪽으로 25리가량 올라가면 예전에 부르던 대우사구(大鸟蛇沟)에 이른다. 이곳은 예전에 수풀이 우거지고 산새가 많았으며 특별히 뱀들이 욱실거렸다고 대우사구라 하였단다. 위만주국 시기에 연변의 훈춘을 거쳐 이곳에 정착한 조선족들을 모두 내쫓았다고 한다. 1945년 광복후 이곳에서 쫓겨났던 개척민들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벼농사를 지었고 그 이듬해에는 동녕현 정부에서 외현에서 온 많은 조선족들을 이곳에 이주시켰다. 하여 대우사구에 1대, 2대, 3대 이렇게 세개의 조선족마을이 형성되였다. 그후 얼마 안되여 1대를 상툰으로 2대를 중툰으로 3대를 하툰으로 개명하였는데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1955년에 동녕현정부에서는 마을이름을 고치자는 이곳 사람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상툰을 동방흥촌으로 중툰을 오성촌으로, 하툰을 광성촌으로 명명하였다. 모두 로씨야와 강하나를 사이둔 변강마을들이다. 이름이 고와야 듣기도 좋다는 속담이 가슴에 와 닿는다.
4) 정착한 지역의 산하(山河)에 의하여 마을이름을 지었다.
강 줄기를 따라 가다 보면 조선족마을들을 쉽게 찾아볼수 있다. 흑룡강성내의 조선족들은 목단강, 송화강, 목릉하, 해랑하, 왜긍하, 라림하, 탕원하 등 60여갈래의 크고 작은 강하(江河)류역에 삶의 허전을 딲았다. 마을이 앉은 위치에 의하여 마을이름을 지은것이 적지 않다. 강남촌, 강북촌, 강서촌, 강동촌, 하남촌, 하북촌 등 이름으로 명명된것이 12개촌이나 되였고 '마련하', '밀강'과 같은 하천의 이름으로 명명된 마을도 있다. 상지시 경양진의 수남촌은 원래 마을이 물남쪽에 위치해 있다하여 '물남촌'이란 특이한 이름으로 불리웠는데 1947년에 '수남촌'으로 개명하였다.
산을 등지고 앉힌 마을들을 보면 오하현의 령남촌, 요하현의 쌍희령촌, 상지시의 호산촌 등이다. 해림시의 '오성촌(五星村)'은 마을 뒤산에 다섯개의 오각별모양의 산꼴짜기가 모여 있다해서 광복전부터 오성촌이라고 불러왔다. 이외에도 녕안시의 홍암(红岩)촌은 마을 뒤의 붉은 산으로 불리우는 자그마한 산이 있는데 홍암으로 된 절벽이 있어서 마을이름을 그렇게 부르게 되였다고 한다.
5) 형제 민족들과 화목하게 지내기 위하여 지은 마을이름도 있다.
한족들이 집가하여 사는 향진에 하나뿐인 조선족마을들에서는 형제 민족들과 공동히 분투하고 화목하게 지내면서 자신들의 아름다운 터전을 가꾸기 위하여 마을이름을 '우의촌', '우호촌' 등으로 지었는데 그들로는 할빈시 군력향 우의촌과 민주향의 우의촌, 그리고 녕안시 평안향의 우의촌과 범가향의 우호촌 등이다. 수십년 세월을 함께 하여 오면서 평등, 단결, 호조하는 관계를 수립하면서 번영과 부유의 길로 달려가고 있으며 모두들 호형호제 하면서 지낸다. 성내의 모든 조선족마을들은 여러 민족들과 서로 도우며 민족단결의 꽃을 피워가고 있다. 의란현 영란향의 조선족마을인 북신촌에서는 1952년 7월에 한족마을인 육림촌이 큰 홍수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북신촌에서는 큰 물에 집이 다 허물어진 육림촌의 30여호 농호들의 살림집을 지어 주었고 300여무의 비옥한 토지를 육림촌에 무상으로 넘겨 주었다. 지금도 두 마을은 친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 이처럼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민족단결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많고도 많은것이다.
6) 력사유적지나 항일투사의 이름으로 마을이름을 지었다.
녕안시 발해진 상경촌(上京村)은 162년동안이나 발해국수도였던 상경룡천부 변두리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마을이름을 상경촌이라 명명하였다. 해림시 장정진 고성촌(古城村)은 청나라 때 세워진 녕고탑 유적지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지은 촌이름이다. 철려현 년풍조선족향의 운산촌(云山村)은 예전에 지은 림운사(林云寺)부근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람들은 절 이름을 '운산'이라고 부르는것이 입에 올라 마을 이름을 지을 때 운산이라고 명명하였다.
녕안시 와룡향 영산촌(英山村)은 위만주국시기에 '남마창'이라고 불리웠다. 당시 항일투사 박영산은 경호원들을 거느리고 남마창일대에서 정찰활동을 하던중 친일주구의 밀고로 체포되여 목단강감옥에서 피살되였다. 마을사람들은 항일투사 박영산을 영원히 기리기위하여 마을 이름을 '영산촌'으로 명명하였다. 항일투사와 같은 사람의 이름으로 지은 조선족 촌 이름은 흑룡강성에서 유독 영산촌뿐이다.
7) 한족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예전의 한족 마을이름을 그대로 두고 있다.
적지 않은 조선인 이주민들이 한족마을에 정착하여 그들과 함께 삶의 터전을 닦아 오면서 부지런히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을 일구었다. 수전면적을 많이 늘이다보니 벼농사를 지으려는 조선족들이 점차적으로 많이 이주하여 오게 되였다. 나중에 조선족주거민이 많아 지면서 조선족 마을로 된 사례들이 적지 않다. 그중 녕안시 발해진 향수촌(响水村)이름에 담긴 전설같은 이야기를 적어본다.
목단강상류에 자리잡은향수촌은 300여년의 력사를 품은 마을이다. 몇백년전 마을에서 금수라고 부르는 처녀가 도사가 주었다는 방망이로 강변의 바위돌이 앉아서 빨래를 하였다. 갑자기 금수처녀의 빨래방망이 질에 바위가 갈라지더니 거기에 갇혀 있던 영준한 총각이 나타났다. 그 총각은 바로 룡왕의 삼태자였던것이다. 그후 부부로 된 금수처녀와 룡왕의 삼태자는 향수마을의 넓은 석강벌에 부드러운 흙을 덮어 주어 기름진 밭을 이루게 하였다. 그 후로 마을 사람들은 금수 처녀와 룡왕의 삼태자를 못잊어 마을이름을 '상수(想水)'라고 부르다가 후에는 집안에서도 흐르는 강물소리를 들을수 있어서 마을이름을 “향수(响水)라고 개명하였다고 한다. 아마 향수입쌀이 이들 부부의 고운 마음씨를 품고 있어서 인지 향수입쌀이 4차례나 전국농업박람회에서 금상의 영예를 받았고 '국가지리보호산품'으로 지정되였다. 과학영농으로 하여 향수촌은 목간강시에서의 유일한 '벼일품촌(水稻一品村)'으로 명명되였고 이 일대에서 생산된 우질 입쌀을 통털어 '향수입쌀'이란 상품입쌀로 흑룡강성의 명제품으로 평선되였다. 지금은 '향수입쌀'에 이어서 '오상입쌀' 등 우질 입쌀이 전성 각지에서 명품으로 떠오르고 있다.
또 하나의 사례를 보기로 한다. 해림시 신안조선족진의 삼가자촌(三家子村)은 처음 이곳에서 마(马), 관(关), 복(卜)씨 성을 가진 한족 3세대가 살았다고 하여 삼가자라고 불리웠다. 후에 수전농사를 하려고 많은 조선족들이 이주하여 와서 나중에 조선족마을로 되였는데 지금도 계속하여 삼가자촌이라고 부른다.
사람의 성씨로 지은 마을이름은 보통 한족동네이다. 조선족은 사람의 성씨로 마을이름을지은 사례를 찾아볼수 없다. 의란현 영란조선족향의 오가촌(吴家村)은 한족 오씨네가 모여 살던 마을이였는데 벼농사를 지으려고 이주하여 온 조선족이 많아지면서 조선족마을로 되였다. 지금도 이 마을의 조, 한족들은 화목하게 지내고 있다.
8) 조선족마을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선(鲜)'자를 붙여 지은 마을이름도 있다.
"'연수현 조선족 백년사'에 연평향 평선촌은 연편향이란 '평(平)'자에 조선족마을이란 '선(鲜)'자를 붙여 지은 이름이다."고 기록되여 있다. 전성 조선족마을 이름에서 '선'자를 붙여 지은 마을이름이 모두다 조선족마을임을 보여주기 위한것은 아니다. 기록이 없어서 확인 할 방법이 없는것이다.
이외에도 다른 소수민족마을이 없는 현, 시에서 '민족촌'이라고 지은 마을은 조선족마을임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경안현과 수중현의 '민족촌'경우를 놓고 말하는 바이다. 그리고 손극현에서는 전현에 하나밖에 없는 조선족마을이름을 '조선족촌'이라고 명명하였다.
9) 옛 고향의 지명을 그대로 차용한 사례도 있다.
상지시 어지향 초산촌에 처음 삶의 터전을 잡은 사람들은 조선의 초산군에서 이주아혀 온 사람들로서 고향을 못 잊어 촌의 이름을 초산촌(楚山村)이라고 명명하였다. 역시 어지향의 창평촌도 원 조선의 고향지명 창평(昌平)으로 지은 이름이다.
이상과 같이 조선족촌이름에 담긴 비밀이 아닌 비밀을 헤쳐보면서 수많은 아름답고 전설같은 이야기들을 일일이 글에 올리지 못하여 미안하고 아쉬움을 금할수 없다.
기실 마을이름에 숨겨진 이야기를 하려함은 마을 초창기 조선족 개척민들을 기리기 위함이였다. 집필과정에서 조선족촌이름 자체가 조선족 개척민들의 삶이였음을 절실히 느꼈다. 또한 조선족마을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화폭으로 흑룡강성 수전생산의 근대사를 멋지게 장식하면서 끊임없이 분발노력하는 우리 민족의 이름을 날렸고 또 그 이름을 빛냈다고 자랑스레 말하고 싶다.
/전동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