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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그리여

2024-07-09 10:30:55

세월은 너무나도 무정하다.′아버지를 떠나보낸지도 벌써 삼십년이란 세월이 흘렀다.우리형제들 기억속의 아버지는 너무나도 무서운 존재였다.그이는 언제나 만사에 철저한 규칙,엄격한 요구만 강조하여 오셨다.

아버지의 함자는 최택룡 (崔泽龙), 1927.10. 20일(阴历) 조선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수원 최씨가문의 넷째 (장남) 로 태여나 1994.6.12일 (음력5월4일) 만 66세의 나이에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치시였다.

아버지는 소년시절까지는 배곯지는 않고 살았기에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소학교까지 졸업 할수있었다. 모두 할아버지의 부지런한 덕분이라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려관업, 료식업 등 다양한 일을 시도하셨으나 일제강점기의 조선에서, 더구나 불의에 굽힐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을 지닌 조선인으로서 실패를 거듭 맛 볼 수 밖에 없었다. 

대략 1941년경에 할아버지는 식당을 경영하다가 식당에 온 일본순사의 행실이 너무나 꼴사나워서 때려주었다.그일로 경찰서에 끌려가 반주검이 되도록 두들겨 맞아 목숨만 겨우 부지하여 살아남았다고 한다.그뒤로 할수없이 시골에 내려가 농사일을 시작했으나 자기 땅이 없는 소작농 살이라 살아가기가 아주힘들었다.

조선에서 더는 살아가기 힘들거라 판단한 할아버지는 살길을 찾아 떠나려고 작심하고 아버지를 먼저 중국 흑룡강성 밀산현 영안향 영려상촌(지금의 계동현 영안향 영량촌)으로 보내여 자리를 잡게 하셨다.그때(1943년) 아버지의 나이가 겨우 16세였다.

그때로부터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삶이 시작되였다. 

1945년 '8.15'후에는 당시 밀산현 영안향 영려소학교에서 교장직으로 일하시다가 1946년경에 할빈시 동북민주련군 조선인 간부대학에 입합했었고 졸업후 (약 1947년쯤) 송강성 교육청에서 일하셨다.1948년도에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한가정의 가장이 된 아버지는 리직하시고 집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다시 영안향 영려소학교 교장직을 맡아하셨다.1951년도경에 밀산현 흑태향 장흥촌 소학교로 전근되여 교장직을맡으셨다가 1953년쯤에 밀산현 농촌공작부로 전근되여 부부장직을 하시다가 부장으로 승진하셨다.1963년 성에서 계동현을 세울 계획이 론의되면서 아버지를 계림공사 당위서기로 파견하였다가 1964년계동현이 세워지면서 계동현정부의 상무부현장직을 맡아 했고 후(1984.4)에 계동현인대주임직을 맡아하셨다 . 그후 이선(二线)으로 물러나셨다가 1987년에 정년퇴직하셨다.

아버지는 일생의 거의 전부를 공직에 몸담고 계셨지만 집에 돌아와선 절대 본인의 사업에 대해 거론하지 않는 원칙을 지켰셨기때문에 우리형제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아버지사업과 관련된 추억들은 가련할 정도로 적다.이제 그 쪼각들이나마 더듬어보려고 한다.

아버지께서는 평생을 맡은 일에 몰두하셨는데 특히 조선민족과 백성들을 위한 일이라면 언제나 큰 사명감을 갖고 발벗고 나서서 해결하려고 노력하셨다. 

아마 1958년도쯤이라고 짐작된다.아버지는 성과 현을 뛰여다니면서 공작하여 국가투자로 영안향 영량촌에 전기를 가설하여 몇십년의 암흑생활과 원시생산에 종지부를 찍어주셨다.또 밀산현내 비교적 편벽한 몇개 조선족마을에도 전기가설을 도와나서서 뜻을 이루었다고 하셨다.

그외도 수전농사의 우량벼종자 무료수입과 보급,벼모내기기계 등 농기계증정,벼농사기술전수 등 많은 경제발전에 도움되는 일들이라면 언제나 밤낮을 가리지않고 성,지구(省、地区)를 뛰여다니시면서 그속에서 자신의 삶의 보람을 느끼셨다.

아버지는 특히 교육을 중요시 하시면서 힘썼는데 현 내의 편벽하거나 비교적 작은 조선족마을까지도 거의 학교를 세우도록 도와주셨다.책걸상에서부터 문구에 이르기까지 힘닿는데까지 개선하고 도우려고 애썼다. 

아버지께서는 늘 교육이 향상하려면 우선 교원들의 자질이 높아야 한다고 하셨다. 하여 교원들에게 외지학교들과 교육방법을 교류하고 선진적인 교육법을 배워 오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셨다. 80년대초쯤으로 기억하는데 그당시 오천원이란 적지않은 경비를 얻어들여 각 조선족학교의 골간 교사들을 선발하여 학습을 다녀오도록 한적이 있는데 다녀온뒤 교육방법에서 한단계 진보한것이 눈에 보였다면서 계동현조선족소학교에서 교장직을 맡아하셨던 조관종선생님이 말씀하신적이 있다. 아버지는 재임기간동안 교육사업의 향상을 위해 무척 애쓰셨다. 

아버지는 나라에 손해되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막아내려고 애쓰셨다. 

1958년도 대약진 때 밀산현에선 전국에서 세번째로 큰 팔릉산(八楞山)저수지를 건설한다고 계획을 세웠다.아버지는평소에 전 현 곳곳을 누비며 발길이 안닿은 곳이 없을 정도로 하향을 다니셨기에 저수지의 가치가 얼마나 될지 너무나도 잘 알고계셨다.저수지의 투자가 엄청난데 비하면 얻을 수 있는 효익이 적어 투자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것이다 .하여 그이는 이 항목의 투자규모를 훨씬 줄이든지 아니면 투자를 멈추어야한다고 주장했다.그로하여 그에겐 대약진을 반대한다는 '우파'죄명이 거론되기에까지 이르렀다.하지만 그는 이런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주장을 증명하기위하여 손수 측량기술을 배우고 농민 한명을 데리고 저수지를 건설하면 늘어날 수 있는 실지 경작지면적을 측량하여 투자와 수익성이 맞지 않는다는 보고를 써서 성 수리청에 올렸다.그후 성에서 이 항목은 투자만 크고 얻을것이 너무 적다고 판단하여 중단시킴으로써 경제적 손실을 피면했다.이 이야기는 현 통전부에 근무하시던 허춘근어르신께서 나한테 들려준 이야기다.그후 거의 20년이 지난 후 팔릉산저수지가 건설되기는했지만 그때에 비하여 규모가 아주 작고 그만큼 투자도 엄청 줄어 경제효익이 비교적 리상적이였다 .

또 하나의 저수지 신서광(新曙光)저수지도 아버지와 깊은 인연이 있었다.당시 문화대혁명중이라 군관회에선 저수지건설에 파견할 책임인물을 선정하는것도 골치아픈 일이였다.군관회주임 위정위는 아버지가 제일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저수지건설총책임자로 파견하였다.하여 아버지는 하달하(哈达河) 골안에서 몇년동안 저수지건설에 전념하여 마침내  마무리하고 또 삼선건설이란 전비 공정총책임으로 파견되여 몇년이란 시간을 보내셨다. 

아버지께서는 그야말로 청렴의 끝판왕이시엿다. 

그이는 남들의 일엔 언제나 발벗고 나서서 해결해 주셨지만 일가친척과 자식들은 아무도 아버지의 덕을 본 사람이 없다.더구나 손에 쥔 권력을 리용해 자신의 리익을 챙기거나 특히 자녀들의 직장을 해결해 준 일은 단 한번도 하지 않으셨다.집일은 언제나 회피 했으며 제일을 저절로 못하면 못난놈, 무능한 놈이라고 꾸짖을 지언정 절대 해결해 주시거나 도와주지 않으셨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다 자신의 직장은 절로 찾아야 하는줄로만 알고있었다. 하여 우리들은 국가의 호소를 받들어 군에 입대했거나 상산하향 하여 농촌에서 단련을 받거나 시험에 합격하거나 하여 자신의 실력으로 밥그릇을 마련했다.

나의 큰 녀동생은 상업계통에 취직하여 몆년간 지나 정식공으로 전환 할시간이 지났고 또 아버지의 한 마디 말이면 손쉽게 풀릴 일이였지만 아버지는 줄곧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당시 탄광에 들어가 륙개월만 하면 정식공으로 해준다고하여 녀동생은 지하막장에 내려가 석탄캐는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큰 녀동생은 1977년 갓 스무살을 넘긴 어린 나이에 영풍탄광에 내려가 매일 허리도 펴기 힘든 갱도안에서 곡괭이로 석탄을 파내고 빵쪼각으로 허기를 달래며 일했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겨울밤이였다고 한다. 엄동설한에는 일끝내고 천근만근되는 다리를 끌고 숙소에 돌아오면 맘놓고 편히 누워 쉴수도, 잘수도 없었다. 숙소온돌에 불을 지피면 천정에서 성에가 녹아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내렸는데 이불우에 비닐을 덮어야만 그나마 잘수 있었다. 비닐우에 고여있던 성에물에 이불이 젖기일쑤였다. 특히 이겨내기 어려웠던것은 심심찮게 발생하는 메탄가스폭발사고의 공포였다. 한번은 갱내 가스폭발이 있었는데 한작업반의 다섯동료가 숨잃은 소식을 접한 남동생이 너무도 놀라서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가 부상자들속에서 녀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다녔다. 다행히도 큰 녀동생은 무사했기때문에 놀란 가슴을 진정할수 있었다. 동생이 탄광에서 일하는 매일매일을 부모들은 물론 온 집식구들은 무사를 기원하며 맘졸이고 살아왔었다. 할머니는 매일이다싶히 동구밖에 나가 서서 큰손녀를 기다리군 하셨다. 이렇게 동생은 광부로 몆년을 일하고서야 비로서 정규직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과 집식구들에겐 엄격한 요구를 고집했다.언제나 남들의 일은 잘 해결해주지만 뢰물은 절대 거절했다.그런 아버지의 성격을 아시는 분들은 뢰물을 갔다놓고 달아나 버리기가 일쑤였다. 그럴때마다 어머니나 우리 형제들이 그 물건들을 돌려줘야 했다.그당시 뢰물이라 해봐야 거의 식품류여서 보관이 어려웠다.그럴때마다 어머니는 어쩔수없이 돈으로 계산하여 보상해주다보니 항상 빠듯한 생활비에 언제나 돈걱정에 시달렸다.한번은 밀산현때부터 함께 공작하던 한 간부가 큰물고기 한마리를 우리집에 가져다놓고 가버렸다.평시 우리 두집은 서로 왕래하던 사이인지라 어머니는 괜찮을거라 여겨 고기를 끓여 아버지의 저녁상에 올렸다.자초지종을 들은 아버지는 노발대발하시며 래일 당장 돈으로 갚아주라고 하셨다.결국 이튼날 어머니는 그집을 찾아가 돈으로 물고기값을 계산해주었다. 그후에도 이런 일들이 아버지의 리직까지 쭉 이어졌다.

아버지의 이런 고집으로 인해 제일 힘든 이는 어머니셨다. 아홉 식구 함께 사는 대가정의 살림을 책임지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였다. 때는 대약진의 여파도 남아있는 때라 모두가 살림이 어려웠겠지만 우리집은 특히 어려웠다.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고 매 끼니 걱정은 더구나 컸다. 국가에서 주는 배급으로는 턱없이 부족한지라 인당 5근씩 주는 입쌀은 항상 잡곡으로 바꿔 먹어야 했고 쌀누룽지를 안 만들기 위해서는 끼니마다 들나물을 뜯어다 쌀밑에 깔고 밥을 짓고 밀가루는 죄다 옥수수가루로 바꿔 량을 뿔궈먹어야만 했다. 그때의 기억때문에 여동생들은 지금까지도 조밥이나 옥수수떡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우리집은 시내에서 살아야할 조건이엿으나 장기 농촌에 산 리유는식품과 생활비 때문이였다.물론 어떤사람들은 간부집안이 왜그렇게 곤난햇을가 의심할것이다.아버지는 권리로 제배를 채우는 일은 털끝만치도 하지않았기에 시내에서 쌀사고 채소사먹으며 살형편이 못되였다 .지출을 줄이기 위해서는 줄곧 농촌에서 생활하며 가축을 길러서 수입을 보충하고 나물을 뜯어서 채로보태먹고 또 가을이면 목돌피를 하고 이삭주이를 해서 식량을 보탰으며 코크스를 줏고 나무, 풀들을 베여다 땔감을 해결했다. 

아버지는 자녀교육엔 항상 너무나도 엄격하셨다. 뢰봉을 따라 배우고 황계광, 동존서 등 영웅들을 따라 배우라고 항상 가르치셨다. 언제나 옳바르고 착하고 일엔 끈기있게 어떠한 고난과 역경도 이겨내며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고 교양하시였다. 

아버지는 언제나 지식에 대한 갈망으로 책사기를 무척 즐겨하셨다.얼마 안되는 수입이여서 서적구매지출은 만만치 않았다.소설, 시와 같은 문학류로부터 농업,수리,축산,력사,지리, 외국어,심지어 예술, 음악에까지 정말 흥미가 다양하셧다.어느곳에 살든 우리집은 그곳에서 책을 제일 많이 갖고있는 도서관 같은 존재였다.하여 그이는 남보다 더 폭넓은 지식을 장악하셨고 일본어 수준은 일본인 못지않았으며 로어도 대화가능한 수준이였다.

그이의 노력에 대한 긍정이랄가 아버지는 1963년도에 성민족대표로 선발되여 영광스럽게도 북경에서 열린 건국 25주년 경축행사에 참석해서 모택동주석, 주덕위원장,류소기부주석,주은래총리 등 국가 최고령도들의 접견을 받고 함께 기념사진까지 남길수 있었다. 

아버지는 해방후 력대정치운동때마다 민감한 정치후각과 랭철한 판단력으로 한번 또 한번의 험난한 고비들을 무사히 넘기며 버텨내셨다.그리고 민족의 번영과 진보에 자신의 힘, 지혜와 함께 일생을 후회없이 다 바쳤다. 

아버지는 오직 엄격한 원칙과 법칙으로 진리추구를 고집하며 철두철미한 자아절제와 헌신으로 일생을 살아오셨다.그이는 인생이란 비석에 크고작은 업적들을 차곡차곡 새겨놓고 조용히 떠나셨다!

그이의 일생을 철두철미한 원칙주의자 ,완벽한 헌신주의자로 평가해도 지나치진 않을것이라고 생각한다. 

근엄하면서도 더없이 자상한 아버님의 형상은 영원히 우리들의 가슴속에 새겨져 있을겄이다! 

/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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