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녹자 화단에 새로운 묘목이 심어졌다. 대부분 묘목들은 날이 바뀜에 따라 자리를 잡고 싹도 트고 양분을 섭취하며 생기가 도는데 유독 왼쪽끝의 묘목만 유표하게 사막을 걷고 있 듯이 풀이 죽어있었다.
"글렀구먼! 쯧쯧, 저러다 그냥 죽겠어…"
지나가던 식당 아주머니가 한마디 던졌다. 웬지 속이 짠해났다. 나무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엄마는 신물 나도록 병석에 누워 계셨다.
난 엄마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를 고대했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점점 우묵하게 꺼지는 눈확, 패여들어가는 량볼, 마르다 못해 앙상한 사지, 그치지 않는 고열, 점점 가냘파지는 목소리… 모든 것이 엄마의 생명이 끝을 보고 있다는 현실을, 세상이 야속할 만큼 나의 오감을 통해 적라라하게 확인시키고 있었다…
왜소한 왼쪽 묘목이 가여운지, 원예사도 더 많이 신경을 써서 가꾸었다. 물을 따박따박 많지도 적지도 않게 부어주는가 하면 주변의 흙덩이도 부수어주며 외로울세라 쓰다듬어주고 말도 건넸다.
"허허, 괜찮아. 급해말거라. 차차 좋아질거야."
그런 원예사의 모습이 아빠랑 겹쳐졌다.
"아빠, 어디 계세요?"
"엉… 우리 딸, 아빠 지금 좀 바쁜데…헉헉… 나중에 전화할게…"
"네…" 라는 대답이 떨어지기 바쁘게 아빠는 전화를 끊었다. 외지에서 입원하는 엄마 병간호를 하느라 바쁘신가보다 하고 어린 나이에 그냥 넘어갔다. 먼 후날, 알고보니 그 때 아빠는 산에 오르고 있었다고 한다. 병원 바로 뒤산에 절이 있었는데 엄마의 병이 좀처럼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빠는 턱없는 희망이라도 잡아보려고 산으로 갔던 것이다. 과묵한 아빠가 어떤 심정이고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나는 알길이 없었다. 그냥 한층계 오르고 한번 엎드려 고두하면서 산밑에서부터 산꼭대기의 절에 올라갔다고만 엄마의 제사날에 취중진담으로 들었다.
왼쪽 묘목은 여전히 생기가 돌지 않았다. 그 옆의 묘목들은 앞다투어 잎을 피우고 꽃도 방울방울 터뜨렸건만 왼쪽 묘목만 외톨이처럼 앙상하게 겨울에 남겨져 있었다.
'원예사의 정성은 어디로 흘러갔을가?'
정성을 거스른 묘목이 약간 아니꼬왔다.
새해가 되였지만 엄마는 점점 허약해졌다. 침대머리에 기대여 앉아있는 것만으로 숨이 가빴다.
"우리 딸… 엄마 화장 좀 해줄래?"
엄마의 부탁이 의아스러웠지만 그래도 해드렸다. 출근하실 때 쓰셨던 화장품들을 서랍끝에서 겨우 찾아냈다. 어떻게 손 댈지 몰라 인터넷 동영상을 한쪽으로 보면서 불안불안하게 화장해드린 결과 엄마는 얼굴이 새뽀얀 짱구로 되였다. 거울 속의 나의 '솜씨'를 보면서 나와 엄마는 오래만에 배를 끌어안고 "하하…호호..." 웃었다. 그게 아마 우리 모녀의 마지막 좋은 추억이였던 것 같다.
그후 얼마 안되여 엄마는 갑작스런 혼수로 마지막 입원을 하셨다.
하루하루 뭐가 그렇게 바쁜지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5월 말이였다. 머리를 식히려고 잠깐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게 웬일인가? 왼쪽 묘목이 어느새 잎사귀도 자라고 꽃도 피워내고 있었다. 그것도 그 수많은 묘목들 중에서 제일 많은 꽃을 피우며 튼실하게 자라고 있었다!
놀랍고 기쁘고 격동되는 한편 형언하지 못할 억울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왜? 원예사 못지 않게, 아니, 그 보다 백배의 정성을 더 들였는데… 왜 나와 엄마의 인연은 끊어졌을가?'
엄마 같은 묘목인 줄 알았고 언젠가는 쓰러질 거라고 생각했던 묘목이였는데 저렇게 씩씩하게 자라나고 있어서 나는 자기부정에 빠지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나의 정성이 부족했던 거야…' 너무 괴로웠다. 만사가 나의 잘못인 것 같았다. 아빠가 너무 그리워 전화를 드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답답했던 속이 좀 후련해진 것 같아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예전부터 궁금했던 물음을 여쭤보았다.
"그 때, 엄마 위해 절에 갔었잖아요. 아빠 뭘 빌었어요?"
아빠는 한참동안 말씀이 없었다. 괜히 물었나 자책하고 있을 때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려달라고 빌었다… 나의 안해도, 엄마 없이는 못사는 여린 내 딸도 … "
순간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의 엄마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엄마, 내가 대신 아파주었으면 좋겠어…"
엄마는 생명이 사그라져가는 힘든 순간에도, 나의 말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아주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돼! 절대 안돼! 우리 딸…아프지마!"
원예사인줄 알았던 내가 알고보니 묘목이였던 것이다. 그 가소로운 착각은 나의 오만이였고 나의 어리석음이였다.
내가 어찌 부모님의 사랑과 길고 짧음을 댈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