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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수필

"배형, 우리 마지막으로 한잔 합시다!"-한영남

2022-12-03 14:37:06

토요일이다. 월드컵 한국 대 포르투갈 축구경기를 시청하고 한국이 16강에 진출하자 흥분을 가무리지 못하고 비싼 와인을 터뜨린게 화근이였다.

마시며 모멘트에 축하메시지를 올리고 사방팔방에서 축구열기로 밤을 밝히는 지인들과 희열을 공유하다보니 새벽 두시가 지나고 세시가 가까워온다.

젠장, 아예 마저 미쳐줄게!

그래서 밤샘을 했다.

아침에 아들애가 온라인수업을 시작하는 것까지 지켜보고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랬는데 11시가 넘어서 위챗문자가 들어왔다.

배봉섭형이였다.

저의 부친 배봉섭선생은 2022년 12월 2일 수행을 마치고 원적에 들어갔습니다. 향년 65세.

이 무슨 날벼락인가.

아니 국경절에도 얘기를 주고받고 그랬는데… 지난 8월에는 술 사주겠으니 나올만 하면 나오라고 전화까지 하지 않았던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나는 배형의 아들이 보낸 부고를 다섯번도 넘게 훑어보고 또 훑어봤다.

그러나, 믿기 어려운 일도, 그게 현실이라면,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사람 좋은 배봉섭형이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나와 배형의 만남은 세기초인 2004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어쩌구려 나는 흑룡강신문사에 초빙되면서 팔자에도 없는 기자생활을 하게 되였다. 맨 처음에는 뉴스부에서 번역도 하고 칼럼도 쓰면서 한해를 보냈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출근해서 휴계실에서 담배나 서로 권하는 사이였고 서로 그렇게 가깝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는 인사변동으로 사회문화부에 옮겨갔고 그때 그 사회문화부 부장이 바로 배봉섭형이였다.

배형은 애주가였다. 맨날 배를 살살 어루쓸며 술상에만 앉으면 전혀 술 마시지 못하는 사람처럼 됐어, 그만, 그 잔만… 등 가벼운 탄성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고 약도 한줌씩 집어삼키며 술을 마셨다. 그러나 일단 술이 들어가서 마취가 되면 술이 술을 청해 계속 마시군 했다.

사내들이란 그런 법이다. 술을 마시고 거나해지면 속심말도 털어놓고 서로 의가 맞으면 의형제도 맺고 그러는게 사내들이 생리인 것이다. 같이 술을 마시며 나는 배형과 대바람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배형은 웬간한 내색은 결코 겉에 드러내는 법을 몰랐다.

사무실에서 휴계실로 나갈 때에도 분명 구두를 신었음에도 발자국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걸였고 말소리도 무척 조용한 편이였다.

그 무렵 나는 어쭙잖게도 스포츠, 료리, 문화, 문학, 취미 등 다섯개 면을 책임지고 칼 물고 뜀뛰기로 설쳐대고 있었다. 어느 날 배형이 잠간 보자며 먼저 례의 그 점잖은 걸음걸이로 휴계실로 향하는 것이였다. 나는 담배쉼도 할겸 인츰 따라나갔다.

휴계실에서 먼저 담배를 반쯤 태운 배형의 손에는 갓 나온 신문이 들려있었다.

ㅡ 이거 맞나?

배형의 손가락이 짚고 있는 것은 스포츠면의 한 기사였다. 조약(跳躍)이라는 단어를 가리키며 이게 도약이 아닌가고 물어보는 것이였다. 그랬다. 조선에서는 조약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한국어보다는 조선어가 편했고 그래서 가끔씩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

나는 사무실에 달려들어가 사전을 다시 뒤져봤다. 아닌게 아니라 도약이라고 하는 것이 옳았다. 나는 한달음에 휴계실로 달려가 그때까지 거기서 담배를 계속 피우고 있는 배형한테 말했다.

ㅡ 잘못했군요. 틀린 거 알려주셔 감사합니다.

ㅡ 하, 뭐 그렇게까지야. 그냥 보다가 눈에 밟혀와 물어본 것 뿐일세.

그랬다. 배형은 항상 그랬다. 뭔가 내세우기를 싫어하고 떠들지 않고 속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였다.

그때로부터 배형은 내가 작성하는 기사글이나 번역글에서 오류들을 발견해서는 휴계실에 따로 불러 알려주곤 했다.

배형은 아들을 우리 동네에 있는 만방중학교(조선족 사립중학교)에 보내놓고 한달에 두세번 꼴로 우리 동네에 오군 했다. 늘 김태산(이미 작고)형과 함께 와서 선생님들과 아들의 학교생활에 대해 문의하고는 저녁에는 나를 불러 술을 마시군 했다. 그러면서도 두 형은 맨날 나보고 술을 적게 마시라는 당부였다.

내가 '꽃동산'편집부에서 주필노릇을 할 때였다. 나는 80페지 되는 잡지에서 철자 하나 틀리지 않겠노라고 뼈 빼물고 결사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초심, 복심, 종심, 3차례 교정을 거쳐도 잡지가 나온 다음 보면 또 틀린 것을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나는 사람 좋은 배봉섭형과 김태산형한테 새로 만든 잡지를 보내주며 청을 들었다.

ㅡ 만일 틀린 곳을 발견하면 개당 100원을 드리겠소. 물론 술은 덤으로 사드리고!

그만큼 자신만만했다.

그랬는데 어느 날 가져온 잡지를 보니 역시 틀린 곳이 나왔다. 배형이 다섯곳을 찾았고 김형이 세군데를 찾아왔던 것이다. 나는 약속대로 술을 샀고 돈을 드리려고 했더니 형들은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결국 다음에 아무 리유없이 다시 한번 술을 사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배형은 퇴직한 다음 시간이 많이 남아돌았지만 출근하는 사람들한테 방해가 된다고 련락을 잘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출판사를 그만두게 되자 한두달에 한번 꼴로 나를 불러서 술을 사주었다. 술을 사주면서도 무슨 죄지은 사람처럼 전화를 했다.

ㅡ 저 한시인님, 요즘은 잘 보내십니까? 허허 다름이 아니고 오는 토요일 오전 11시 시간이 되면 고향 함지박에서 술 한잔 할가.

그렇게 가게 되면 몇몇 지인(대여섯명)들을 불러서 집에서 모처럼 가져온 배갈을 꺼내놓고 연어사시미도 새로 떠온 것이라며 꺼내놓군 했다.

그 술을 즐기던 사람이 곁에서 술을 마시며 얼근해지는 것을 바라볼 때 형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가.

나는 말말간에도 어서 몸을 춰세워가지고 형과 함께 맛있게 술 마실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입발린 말을 해댔다.

나는 출판사를 그만둔 다음 고정수입이 없다보니 여의치 않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 사정을 잘 아는 배형은 맏형답게 늘 나를 걱정해주었고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무슨 모임에 함께 참가했다가는 뒤풀이가 끝나 다 헤여져도 배형은 꼭 나를 잡고 다시 단둘만의 술을 마시군 했다. 그러면 나는 취해가지고 속탄 이야기를 곧잘 했고 형은 그런 내 술주정(?)을 위해 항상 넉넉하게 귀를 열어주었다.

지난 8월인가 문득 형한테서 전화가 왔다. 요즘 코로나도 좀 풀렸으니 고향 함지박에서 술 한잔 하자는 것이였다. 그러나 나는 그때 개인사정이 있어 가지 못했다. 내가 잡지사의 부탁으로 원고를 마무리해야 하므로 갈 수 없다고 하자 형은 그럼 다음에 보자면서 어서 부지런히 글 써서 돈을 벌라고 당부하는 것이였다.

그것이 마지막 통화였다.

그리고 추석에도 국경절에도 위챗으로 문자를 주고받았다.

이름만 들어도 울컥 눈물이 터진다며 친구였던 남상수시인의 말을 절대 꺼내지 못하게 하던 배봉섭형, 취해서 가로수를 붙잡고 오바이트를 하는 한참 어린 후배인 나의 잔등을 투덕투덕 두드려주며 세상 찌꺼기는 그렇게 다 버려야 시원한 법이야 라고 되뇌이던 형, 금이발을 드러내며 찐빵처럼 부드럽게 다가오던 형…

언젠가 어느 지인의 상가집에 갔다가 동생이 형한테 '형, 이제 우리 어디 가서 숭늉을 마시겠소?'라고 하며 통곡하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배형을 보내드리는 이 비감함을 섞어 저 말을 패러디해서 한마디 해본다.

ㅡ 배형, 이제 나는 누구와 더불어 세상을 하소연하며 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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