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평원 지대에서 살아온 나는 원시림과 깊은 산 속에 특별한 호기심과 애착을 갖고있다.
산은 나에게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어쩜 조물주가 인류에게 하사한 만물의 고향이고 삶의 원천이라고도 짚어본다.
나는 드문드문 도심을 병풍처럼 둘러싼 고층 주택을 에돌고 시가지 변두리에 서서 머리들어 멀리 사면을 둘러본다. 지평선 끝자락에 자리잡은 갖가지 모형의 자연산들이 신비롭게 시야에 들어온다.
봄이면 파란 융단이 땅밑에서 들쑹날쑹 솟은 듯 하고 여름이면 짙은 푸름이 신기루처럼 파란 하늘과 흰 햇솜같은 뭉게구름 사이에 몽롱하게 어린 듯 가관이다.
가을이면 또 알록달록한 단풍이 칠색의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경관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도 가을의 의미지와 색조를 상징하는 금산이 솟아난 듯 하다. 사실 가을산은 에누리 없는 금산이다.
겨울이면 대지에 흰눈이 내린다. 산은 거부감 없이 흰눈을 그대로 받아드려 반짝반짝 빛을 뿌리는 백색의 은빛 산봉우리들을 형성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도 흰 솜뭉치를 쌓아 놓은 듯 하고 흰 사탕가루를 무져 놓은 듯 하다. 그 하얀색 신비의 속에는 봄을 맞이할 각종 생명체들이 동면하고 있다. 해동의 봄이 되면 활기차게 터뜨릴 생명체를 엄동과 눈덮힌 백색 꿈 속에서 잉태한다.
사계절 산은 그대로 조물주가 인류에게 하사하는 아름다운 풍경이고 복산이고 지구촌 식구들을 껴안고 보듬어주는 어버이같은 존재다. 큰산이 아버지같이 위풍있고 름름하고 거룩한 형상이라면 작은 산봉우리들은 어머니같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녀인의 의미지다. 그 안에서 산의 자식들은 마음껏 성장하고 열매를 맺고 씨앗을 남긴다.
해마다 숱한 자식들을 배출하고 성장시키는 산은 몇십년이 지나도 로쇠할줄을 모른다. 오히려 해마다 더 성숙되고 왕성할 뿐이다.
나무와 잡초가 빽빽한 산은 삼복 염천에도 더위를 타지 않는다. 하늘가의 해님이 쨍쨍한 불비를 퍼부어도 서로가 서로에게 그늘이 되여준다. 산새들과 짐승들도 하늘을 치닫는 높이 솟은 나무그늘 아래에서 땀을 들이고 태평스레 여름을 보낸다. 반면 엄동설한에도 추위를 모른다. 락엽이 나무뿌리 둥지 주위를 따뜻하게 덮어주고 감싸준다. 작은 나무는 큰 나무에게 기대고 서로에게 바람막이가 되여준다. 락엽은 또 산짐승들의 포근한 이부자리가 되여준다. 이렇게 서로 의지하고 도움이 되면서 자연의 규률대로 사계절을 무난하게 넘긴다.
이것이 산의 포옹력이고 산의 위대함이고 산의 아름다움이다. 인류도 산의 이런 정신을 따라 배워서 강자는 약자를 도와주고 서로 도우며 화목한 인간 사회와 평화롭고 조화로운 행복의 락원으로 이끌어가야 할 것이다. 나도 산처럼 자연이 주는 무궁무진한 삶의 에너지를 섭취하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포옹하고 다독여주고 싶다. 산은 무엇을 바라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숙명대로 자연이 산에 부과한 생을 소리없이 완성하고 있을 뿐이다. 좋든 굳든 말이 없다. 높은 산과 낮은 산은 그저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다. 높다고 뽐내지 않는다. 낮다고 비관하지도 않고 서로 질투하지도 않는다. 하늘이 주는만큼 가지고 포옹한다. 본성이 포악한 짐승과 반면 성질이 온화한 짐승도 익조도, 해조도 모든 생물을 그 넓은 품에 안고 다독여준다. 마치도 자식을 대하는 우리 부모님들처럼 흉금이 넓다.
나는 이러한 산과 자연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던가? 생각해보고 반성한다. 주는대로 가졌을 뿐이였다. 산이 무던한 녀인처럼 말이 없으니 굳이 “산아 감사하다!”고 인사할 필요조차도 느끼지 못하였다. 어리석음을 깨치고 앞으로는 자연이 인류에게 부여한 혜택에 감사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산에 대한 절실한 체험은 몇해전 남편의 병료양 때문에 원시림이 울창하고 새소리와 날짐승 소리가 혼잡한 두메산골 마을에 가서 2년동안 보낸 적이 있기에 더욱 가능한 일이였다.
금광이 있던 오봉촌을 경유하고 평풍산에서 서쪽으로 오불꼬불한 산기슭을 따라서 강을 옆에 끼고 한참 가면 곧 바로 연길 수원지다. 마침내 멀리서만 바라보고 흠모하던 높은 산봉우리 곁에서 생활을 체험할 수가 있어서 좋았다.
때마침 봄이였다. 봄산에는 진달래, 함박꽃이 피여 있었고 미인송이 하늘을 떠이고 치솟았는데 그 밑바닥에는 쑥, 졸뱅이, 부추, 산시금치, 고사리가 자라났다. 양지바른 산기슭에는 도라지, 더덕, 둥글레와 같은 먹거리들이 있고 이름 모를 풀꽃들도 내기하 듯 여기저기 피여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몸보신에 최고 약재로 쓰이는 인삼, 황계, 오미자, 구기자도 고운 얼굴을 자랑한다. 노래말처럼 “보배산, 황금산”이다. 산사람들은 산을 먹고 살고 바다가 사람들은 바다를 먹고 산다는 말이 실감난다. 가을이면 산 전체가 무르익는다. 달콤한 딸기, 새콤한 찔그배, 고소한 개암, 까만 진주같은 머루, 람보석같은 파르무레한 다래, 상상만 해도 군침이 흐른다. 엄마 닮은 산은 무료로 사람들에게 먹거리를 공급해 준다. 뜯기만 하면 된다. 누가 씨앗을 채집하고 뿌리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자라고 저절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면서 매년 이렇게 순환한다. 순 자연에서 이슬과 비물을 섭취한다. 산열매와 기타 먹거리들은 화학비료 맛을 모른다. 수도물과 같은 정수맛도 모른다. 하여 남편이 그 악마같은 병마로 개복하고 한두근 가량의 병변 조직을 잘라 내였는데도 십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무탈하다.
도심에서 자동차 페기와 혼탁한 각종 길거리 음식 내음에 내 후각은 절어 있었다. 원시림 속에 들어서기만 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순간 정화되여 기분이 상쾌해지고 시흥이 떠오른다. 청신한 공기가 뇌에 침투되기 때문이다. 하기에 나는 자연을 사랑하고 어머니 품과 같은 아름다움의 극치인 산을 더욱 사랑하고 의지하고 싶다.
산비탈에 자라난 빽빽한 소나무와 자작나무, 봇나무는 다람쥐들의 놀리터고 부엉이, 꿩과 뻐국새들의 서식지다. 뽀얀 백양나무 가지와 가지 사이에는 산까치들의 보금자리가 덩그렇게 놓여있다. 까치네 부부는 풀 속에서 벌레들을 잡아다가 새끼들에게 먹이고 그 새끼들을 성장시킨다. 성장한 새끼들에게 날개를 퍼덕이고 하늘을 날아예는 법을 배워주고 자립하는 방식을 가르친다. 말 못하는 조류들이 이렇게 자연을 의식하고 자연에 동화 되면서 대대로 무탈하게 살아간다.
깊숙한 수림 속에는 승냥이, 메돼지, 여우, 두더지, 너구리, 오소리, 사슴과 산토끼네 집이 있다. 또 소다리처럼 실팍한 구렁이도 있고 지팡이 같은 독사도 있고 도마뱀도 있고 기름개구리도 있다. 여름이면 저마끔 먹이를 찾아 헤매고 서로 잡아 먹기고 한다. 이것이 생태평형이다. 인류의 간섭 없이 저절로 생태평형을 이루는 것이다.
근년에 정부에서 생태를 보호하기 위하여 사냥을 금지하는 각종 조치와 방법을 도입하니 수림이 또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산은 마땅히 인류의 간섭이 없는 산짐승들의 놀이터고 왕국이여야 한다. 간섭이 심하면 산이 산 노릇을 못하고 생명을 잃는다.
사람들이 어떻게 산을 대하든 산은 말이 없다. 의견도 없다. 그저 묵묵히 받아드린다. 나무가지를 사정없이 낫으로 쳐서 부러뜨리고 꺾어도 아픈줄도 모르고 다만 눈물방울같은 즙액을 짜낼 뿐이다. 속으로 피눈물을 떨구고 울고 있는 것이다. 이듬해 봄이면 또다시 싹을 튀운다. 그리고 파란 잎새를 다닥다닥 몸에 덮고 허물을 보듬는다. 언제 그랬나 싶게 인류를 너그럽게 용서한다. 상처를 말끔이 씻고 숱한 가지를 친다.
밀림이 울창하여 각양각색의 조류와 산짐승들이 몸을 숨길 수 있는 것이다. 서로 숨박꼭질을 하고 숨기고 피하고 또 화합을 이루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산은 모든 것을 품어 안고 키워준다. 풀잎에 있는 작은 벌레까지도 용납한다.
나도 산처럼 주위의 모든 이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너그럽게 품어주고 모든 생령들을 사랑하면서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