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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촌진흥, 백개마을 탐방] 전통문화가 살아숨쉬는 고장 -해림시 신안조선족진 서안촌

2024-08-02 10:54:57

서안촌은 해림시 신안조선족진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경작지가 가장 큰 마을로 신안진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 잡은 조선족 마을이다. 서안촌의 인구는 2000명에 육박하고 경작지는 만무가 넘는다.

지리적위치로 보면 서안촌은 해림시에서 서남쪽으로 60여리 상거해 있고 신안진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1.8킬로미터 상거한 마을로 해림과 밀강 중심인 충적평원에 위치해 있다.

서안촌 서쪽에는 3킬로미터 길이의 룡두산이 있고, 동쪽에는 고려섬이라는 고대 군사요새 유적지가 있다.

마을 서쪽 입구에 들어서면서 서안촌이라는 금빛찬란한 글발이 살려진 마을 대문이 위용을 뽐내면서 우뚝 서 있고 마을에서 가장 크고 널찍한 중심도로가 동쪽 끝까지 하늘자로 곧게 뻗어 있다.

중심도로와 교차되게 남북 방향으로 쭉쭉 뻗은 골목길들은 중심도로와 맞물려 바둑판처럼 네모 반듯하다. 마을 중심도로 량옆으로는 시원한 물도랑이 조잘조잘 흐르고 고르로운 마을 길은 하루에도 세번씩 청소해 항상 깨끗한 모습이다.

마을의 문화광장에는 오랜 력사를 상징하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세월의 풍랑속에 거연이 솟아있는데 전문가들의 론증에 의하면 이 나무의 수령이 400~500년은 된다고 한다. 지금도 이 나무는 해마다 무성한 잎새를 키워내면서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서안촌에서 서북쪽으로 10리가량 올라가면 랭산이 있는데 그 산에서 정갈한 샘물이 퐁퐁 솟아난다. 이 샘물은 점점 큰 물줄기를 이루면서 동북쪽으로 흘러서 서안촌을 지나가는데 이 강을 밀강이라고 한다.

이 마을 최산옥(촌주임 겸 당지부서기)씨에 따르면 서안촌은 서안촌과 자흥툰으로 되였고 호적에 등록된 가구수는 706호, 인구는 1625명, 경작지는 1만3675무로 그중 수전이 9000무, 그외에 모두 한전이다. 기동지는 60헥타르 달한다. 기동지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물도랑, 광장, 도로 등 기간 건설에 투입하고 있다. 주로 벼농사가 위주이고 양계, 양어, 하우스도 하고 있으며 로무 수출인원이 천여 명에 달한다.

서안촌의 력사는 근 100년 전인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0년초에 김수산이 조선인 15가구와 함께 서안촌으로 이주해 왔다. 삶의 터전을 잡은 김수산은 마을에다 학교를 세웠는데 학교 이름은 그의 이름을 붙여 수산학교라고 했다. 이 학교는 해방 후에 서안촌소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서안촌소학교는 1920년부터 2008년까지 80 년간 끈끈한 맥을 이어왔으며 이 마을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 가운데 청와대학, 북경대학, 상해교통대학, 대련항공학원 등 국내 중점대학에 입학한 학생들과 기타 대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이 많이 배출되였다고 한다. 

당시 마을에서는 어느 학생이 대학교에 입학하면 그 학생을 장려했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배치받은 학생들은 자신의 한 달 로임을 마을에 의연해 마을 사람들의 지성에 보답했다. 그 아름다운 소행은 지금도 이 마을의 회자되는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마을 이름의 유래는 1946년 토지개혁때 북쪽으로 흐르는 밀강이 농사하기 편안하다는 뜻에서 서위사의 서자에 안녕할 안자를 붙여서 서안촌으로 부르게 됐다.

마을이 규모를 형성해 점차 커지면서 서안촌 사람들은 옛날 조선반도에 있을 때 조상들이 전승해왔던 풍속습관대로 1930년대부터 풍작을 기원하고 마을의 안녕을 수호해줄 것을 바라는 의미에서 해마다 산천제를 지냈다. 

산천제 제사상에는 8가지 특색 있는 음식을 올렸는데 그 8가지 음식의 의미는 서안촌 촌민들이 조선 팔도에서 왔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근 100년 세월이 흘러 지금 이들은 고향 사투리를 거의 잊었으며 함경도 방언으로 일관되였다.

해방전쟁과 항미원조기간에 서안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용약 참군했는데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한 사람만 76명이고 전쟁에서 희생된 혁명렬사가 28명이며 영예군인이 7명 된다.

서안촌은 광복 후부터 문예활동을 활발히 전개한 마을로 소문이 파다하다.

기록에 의하면 1946년 8월 15일, 광복 일주년 기념으로 서안촌에서 운동회를 할 때 악단에 15명 나팔수들이 나팔을 불면서 함께 개막식에 입장했다고 한다. 이 기간 서안촌에서는 낮에는 운동회를 하고 저녁에는 널판자로 만든 무대우에서 노래자랑을 했다고 한다. 

1950년대부터 서안촌의 문예활동은 더욱 활기를 띠였는데 당시 집체무를 추던 한 사람은 연변연극단 무용배우로 뽑혀갔고 다른 한 사람은 전국소수민족문예술대회에 참가해 모택동, 류소기, 주은래, 주덕 등 중앙령도들의 접견까지 받았다. 서안촌의 자랑찬 문화예술 력사를 자랑하는 명물이 바로 1956년의 지은 문예구락부를 들 수 있다. 이 구락부는 면적이 800평방미터인데, 1960년대부터 선후로 해림시문화관, 목단강시문화관과 연변 연극단에서 이 구락부에 와서 공연하였다. 매번 공연단이 올 때면 관람객이 너무 많아 이틀씩 공연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서안촌 문예구락부는 서안촌악대의 련습장과 공연장으로 쓰이고 있으며 흑룡강성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농촌구락부이며, 서안촌악대는 중국조선족농촌에서 유일무이한 농민악대이기도 하다.

서안촌에서는 2004년도에 5000평방미터 되는 문화광장을 건설했는데 해마다 여름이면 촌민들이 이 광장에서 광장무를 추고 각종 문예공연을 펼친다고 한다. 조선족전통문화의 전승을 위해 서안촌문화광장에는 각종 민속문화전시물과 설명서를 갖춰놓고 촌민들과 관광객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력사가 유구한 서안촌에는 또 하나의 명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마을 중심거리에 우뚝 선 철탑에 매달아 놓은 구리종이다. 이 구리종은 1946년에 동북 민주련군이 이 마을에 오면서 증정한 대포탄알이다. 대포탄알로 만든 이 종은 그때부터 마을의 각종 회의 때마다 울렸는데 회의 때마다 종을 치는 차수와 박자에 따라 촌민들은 오늘 하는 회의가 무슨 회의인가를 알았다고 한다.

현재 서안촌은 몇년간의 노력을 들여 720만원의 자금을 마을 건설에 투입했다. 최근 3년 사이 촌에서는 10킬로미터의 마을 길을 포장도로로 건설하고 2만미터의 세멘트 물도랑을 수선했으며 3000평방미터의 레저광장을 건설하고 스크린까지 갖춘 현대풍의 공연무대를 건설하였다. 또 로인들의 문화생활에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 160평방미터 되는 로인협회 활동실을 짓고 표준 문구장 두 개를 만들었다.

서안촌 주요 거리에는 신형의 태양에네르기 가로등이 설치돼 있고 감시카메라까지 있어 촌민들은 안정감을 느끼고 있으며 촌의 3000미터 구간에 쇠그물 바자가 둘러쳐 있다. 서안촌은 촌으로부터 진 구역 그리고 부근의 촌에 이르는 구간이 모두 포장도로로 되였다. 촌에서는 또 각 방면의 자금을 적극 쟁취해 하우스 39개를 건설하였으며 매 하우스의 면적이 400평방미터 된다.

이 마을 로인협회 최경남 회장에 따르면 마을 로인협회는 1950년대에 몇분이 모여 독보조 형태로 출범하였으며 인민공사시기에는 로인독보조로 되였다. 지금은 마을 청장년들이 연해, 해외로 많이 진출한 관계로 35명의 로인이 현재 협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평시에 로인들은 협회에 모여 문구, 마작, 화투를 하고 있으며 마을의 신농촌건설을 위해 마을의 방화호림과 마을의 화단조성, 불우이웃돕기를 하고 있으며 문예공연을 정기적으로 조직하여 시합에도 나가고 있다.

이 마을의 촌사를 집필한 최경남 회장은 1950년에 이 마을에서 태어나 1974년부터 서안촌 제1생산대 대장을 맡았고 1998년부터는 서안촌촌민위원회의 주임을 맡았으며 2012년부터 서안촌로인협회 회장을, 2014년부터는 신한진로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의 고심참담한 노력과 집필을 거쳐 2020년 5월에 신안촌 촌사가 출간됐는데 마을의 력사를 완벽하게 집대성한 이 책은 조선족농촌마을에서 보기 드문 촌사이기도 하다.

/김동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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