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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 좌우명-최영철(한국)

2024-06-24 15:02:33

78년을 살아온 나에게 좌우명이 있다.

'목표를 정했으면 목표를 향해나가야 한다.' 이 좌우명은 내가 목릉현 하서향 갱신소학교 4학년을 다닐때 담임교사이신 리룡빈선생님께 나에게 하신 교시다.

1957년 6월1일 오후 갱신소학교에서 6월1일 국제 아동절을 맞으면서 학생 리상발표모임을 가졌다. 나보다 먼저 발표한 리상(이상, 꿈)은 대개 이렇다.

전투영웅, 자동차운전수(트럭기사), 목수, 야장, 포수, 재봉사, 요리사, 출납원 등등이었다. 그때에 내가 발표한 리상은 남달랐다.

"저의 리상은 대학교로 가는 것입니다. "

나의 리상발표에 학생석에서 조소가 터졌다.

"영철이 없는 저자식 무슨 헛소리를 줴치는 거냐!"

"대학교 변소간(화장실)에나 가라."

"저자식이 대학교에 가면 내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 "

그때에 담임교사이신 리룡빈선생님께서 조소를 제지시키시고 엄숙히 말씀하셨다.

"최영철학생의 리상은 매우 훌륭한 리상입니다. 우리는 그의 리상을 조소할 것이 아니라 지지해야 합니다. 최영철학생은 대학교로 가는 목표를 정했으면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리룡빈선생님께 하신 이 교시는 그때부터 나의 좌우명이 되어 나의 인생을 이끌었다.

내가 이 목표를 정한 다음 생각밖의 재난이 나한테 덮쳐들었다.

5학년 후학기의 기말고사를 며칠 앞두고 나는 뱀한테 오른쪽발등을 물렸다. 당시 갱신촌에는 의사도 병원도 없었다. 10키로 떨어져 있는 현성의 병원으로 가려면 두시간 걸린다. 그 사이에 뱀독이 전신에 퍼져 죽을 수도 있다.

그때에 마을의 한 할아버지께서 엄마한테 토방법을 알려주셨다.

먼저 천끈으로 발목을 동여맨다. 그리고 30분에 한번씩 풀었다가 5분 후 다시 동여맨다.

그런 후 볶은 돼지똥을 물에 풀어 한사발 마시면 뱀독이 전신에 퍼지는걸 막는다. 엄마는 나에게 돼지똥물을 마시겠는가를 물으셨다. 나는 살아서 대학으로 가기 위해 마시겠다고 했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돼지똥물 한사발을 굽냈다. 그런 후 창포뿌리를 삶은 물에 뱀한테 물린 발을 담군다. 세시간 후 짓찧은 창포뿌리를 뱀한테 물린 상처에 놓고 천끈으로 동여맨다. 이틀에 한번씩 갈아붙인다. 뱀한테 물린 그날밤에 자지말아야 한다. 내가 밤에 잠들지 않게 하려고 엄마는 석유등잔을 켜지 않고 명절밤에만 켜는 초불을 켜주셨다.

나는 밝은 초불이 그냥 켜져있는 것에 아까운 생각이 들어 산수, 조선어, 한어의 기말시험 복습문제를 보았다.

그런데 장밤 공부만 할 수 없다. 그때에 형님은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란 소설책을 나에게 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소설책을 보았다. 주인공 오스트롭쓰키의 불요불굴의 정신에 감동을 받아 날샐 때까지 그 소설을 읽었다.

닷새 후 부은 발등이 좀 내리자 나는 쌍짚팡이를 짚고 학교로 갔다. 제때에 기말 시험을 치렀다. 산수, 조선어, 한어 모두 100점을 맞았다.

그후에 재난은 멈추지 않고 계속 나한테 덮쳐들었다.

초중1학년 후학기에 풍습성관절염에 걸렸다. 제때에 치료했기에 종신환자로 되지않았다.

초중2학년 후학기에는 중이염에 걸려 하마트면 귀머거리로 될 번했다.

초중3학년 전학기에는 비염이 엄중해 수술치료를 받았다.

고중1학년 전학기에는 페결핵병에 걸렸다. 이 병은 잘 치료하지 못하면 건강불합격으로 대학입시참가 자격을 잃는다.

나는 매일 마이실린 주사를 2번 맞는 외에 페결핵병 치료에 도움된다는 민간방법을 죄다 사용했다. 그중 태반을 먹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대충 씻어 잘게 자른 태반을 씹지말고 삼켜야 한다. 나는 돼지똥물을 마실 때처럼 두눈을 질끈 감고 피물이 떨어지는 자른 태반을 입에 넣고 꿀꺽꿀꺽 삼켰다. 눈물이 질끔질끔 흘러내렸다. 그해에 나는 태반 3개를 먹었다. 그래서인지 1년간 치료한 후 현립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대학입시 참가에 지장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후부터 나는 복습과 예습을 결합해 차근차근 공부를 해 고중2학년 후학기에 고중3학년의 수리화 진도를 끝마쳤다.

대학교로 갈 자신이 있자 나는 고중2학년 전학기 초에 학교교무처에 당해 대학입시 참가신청서를 제출했다. 교무처에서 모의고사를 치른 후 나의 신청서는 현교유과를 경유해 흑룡강성 교육청에 전달됐다.

1966년 5월4일에 흑룡강성교육청에서는 고중2학년 대학입시 참가 신청자 54명을 모여놓고 모의고사를 치렀다. 그중 5명이 당해 대학입시 참가 자격을 받았다. 그 5명중에 나의 이름이 끼어있다. 나는 대방의 문대에 골 넣은 선수처럼 소리를 지르며 어쩔바를 몰라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잠시었다. 전례없는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당중앙에서 대학입시제도를 취소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대학교으로 가는 길이 사라졌다. 나는 절망했다.

이런 나에게 재난은 멈추지않고 계속 꼬리를 물고 덮쳐들었다.

문화대혁명의 불길속에서 나는 '류소기자산계급교육로선'의 검은 싹으로 몰렸다.

1968년 5월에 아버지께서 다른사람의 모함으로 '력사반혁명분자' 모자를 쓰시자 나는 검은 오류분자(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나쁜분자, 우파분자)의 자녀로 몰려 마을에서 100여리 떨어져있는 방모장에 가 100여마리 소무리를 몰았다. 그때에 관성이라 할까 습관이라 할까. 나는 방목장으로 갈때 이불짐 속에 고중 수리화 교과서와 참고서, 로어교과서를 넣고 갔다.

방모장에 도착한 그날저녁에 김삼덕조장께서 나보고 말씀하셨다.

"영철젊은이 내일부터 아침소몰이는 혼자하게. 그리고 점심밥과 저녁밥을 짓고 오후 소몰이는 안나가도 되네."

이 결정에 나는 아니란 말을 할 권리가 없다. 빈농 세분의 감시와 재교육을 받는 처지에서 "옛"하고 대답할 권리만 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초막을 나선 나는 눈앞에 나타난 정경에 두눈이 휘둥그레졌다. 소울타리 밑에서 멧돼지 10여 마리가 뒹굴며 놀고있었다. 등골이 오싹해 났고 식은땀이 쫙 흘러내렸다. 멧돼지한테 물려죽으면 뼈도 추리지 못한다. 그래도 나는 방목을 해야 한다. 나는 몽둥이를 들고 물통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멧돼지들은 슬금슬금 달아났다. 나는 뛰는 가슴을 부여안고 소울타리로 가 소무리를 울타리밖으로 몰고 나와 들판으로 몰고갔다. 아침 이슬풀을 먹는 소들은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아침에 맑고 시원한 공기를 마셔서인지 머리가 상쾌해남을 느꼈다. 그때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로어 단어와 문장을 암기하면 얼마나 좋으랴."

다음날부터 나는 가슴속에 로어교과서를 품고 로어 단어와 문장을 암기하면서 신나게 소몰이를 했다.

오후에 세분이 소몰이를 하러 나가시면 나는 나무그늘밑에 앉아 수리화 교과서와 참고서를 보았다. 3개월간 3번 훑어보았다. 어떤 문제가 어느 페이지에 있다는 것까지 알수 있었다. 소무리가 끝난 후 나는 다른 일터로 갈 때 수리화 책을 번갈아 갖고가 보았다.

2년후 아버지께서 '력사반혁명'모자를 벗으시자 나도 검은 오류분자 자녀대오 속에서 해제됐다.

1977년 6월에 국가 교육부에서 대학입시제도를 회복했다. 대학교로 가는 길이 다시열렸다.

그런데 나는 나이가 많아 대학입시에 참가할 자격을 갖지 못했다.

그 해의 11월에 66기, 67기고중졸업생은 나이가 많아도 대학입시에 참가할 수 있다는 보충 정책이 발표됐다. 나는 간신히 대학입시 참가 자격을 가졌다. 12월 24일, 25일에 대학입시장에 들어가 시험을 치렀다. 시험성적을 예측해보니 괜찮았다. 그런데 나는 피식웃었다.

" 나이가 많은 나를 어느 대학에서 데려가나?"

그런데 생각밖으로 1978년 설날 오전 10시에 나는 '연변대학 입학통지서'를 받았다.

그때에 리룡빈선생님께서 제일 반가워하셨다.

"영철아 너 정말 대단하다. 대학생제자가 있을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김삼덕조장께서도 더없이 기뻐하셨다.

"나는 소몰이를 할 때 영철 젊은이가 남다르다는 것을 보았어. 그 어려운 시절에 이불짐안에 있는 고중 교과서를 보았어. 그때에 감동을 받은 나는 영철젊은이에게 오후에 공부를 할 시간을 주려고 아침소몰이와 점심,저녁밥짓기를 시켰어." 그 분의 말씀에 나는 어린애처럼 소리를 내 울었다.

나는 대학으로 가는 목표를 정한 후 장장 20년간 만난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갔기에 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늦깍이 대학생으로 아내에게 어린 아들 둘을 맡긴 나는 연변대학을 다닐때부터 3년전까지 3개 목표를 정했다. 그중 2개 목표는 도달됐다. 하나는 연변대학을 무사히 졸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흑룡강신문사의 편집으로 되는 것이다. 이 두개 목표도 생각밖에 나타난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나갔기에 도달했다.

미도달 목표는 3년 전에 정했다. 죽기 전에 신문과 방송에 50편 글을 발표하는 것이다. 신체가 건강하면 이 목표를 달성하는데 별문제가 없다. 28년전에 나는 사지마비병에 걸려 지금은 네바퀴밀차가 없이는 한발작도 걷지 못한다. 또 허리통증으로 앉아서 글을 쓸 수 없다. 나의 글쓰는 방법은 남다르다. 먼저 침대에 누은후 왼손으로 한글자판이 열려있는 스마트폰을 들고 오른손 식지로 한글자판의 자음과 모음을 톡톡 치면서 글을 쓴다.

이렇게 글을 쓰기에 다른사람이 1시간 쓴 글을 나는 적어서 5일 걸려야 겨우 써낸다. 그래도 나는 첫 해에 신문과 방송에 10편 글을 발표했다. 그런데 또 생각밖으로 2년전에 대장암3기 진단을 받았다. 눈앞이 캄캄해 났다.그때에 주치의사님께서 나에게 좋은 정보를 알려주셨다.

"다행히도 환자분의 암세포는 다른 장기에 전이되지 않아 수술치료를 받으면 5년이상 생존할 수 있습니다. 수술 후 건강관리를 잘하면 10년이상 생존할수 있습니다. "

나는 주치의사님의 말씀에 용기를 얻고 수술치료를 받았다.병원에서 퇴원한 3일 후부터 나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신문과 방송에 35편 글을 발표했다. 2년이상 더 살면 15편 글을 발표하는데 별문제가 없다.오늘도 나는 침대에 누워 왼손으로 한글자판이 열려있는 스마트폰을 들고 오른손 식지로 한글자판의 자음과 모음을 톡톡 치면서 마지막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글 최영철(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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