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성 동녕시 삼차구진 삼차구촌은 삼차구진에서 가장 큰 조선족촌(촌장 겸 서기 김이남)으로 진정부 소재지이기도 하다. 이 촌은 동녕시에서 동쪽으로 10킬로미터 상거해 있고 러시아 변경과는 불과 몇십미터 거리밖에 안된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동녕통상구를 거쳐 러시아로 통할 수 있는 지리적 우세를 리용해 1990년대 초반부터 보따리 장사를 시작해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삼차구촌에 제일 먼저 왔던 제1대 이주호들이 모두 목단강과 연변에서 왔기에 지금도 이 마을의 교제언어는 함경도 방언이고 마을의 관음상제 풍속도 연변과 비슷하다.
수분하, 호브트하, 팔자강이 모인 곳이라 하여 삼차구로 명명
삼차구촌 호적에 등록된 가구수는 1329가구, 인구가 3186명, 상주 가구수는 325가구, 인구는 702명 된다. 촌 경작지는 9018.78무로, 주로 벼농사를 위주로 하고 있다. 현재 이 마을의 인구당 수입은 3.2만원으로, 여러차례 성급 문명촌, 선진기층당조직, 성급 생태촌으로 선정되였다. 마을중심에는 국가민정항목으로 선정되여 370여만원 투자하여 건설한 푸르른 인공잔디운동장이 펼쳐져 있으며 2년에 한번씩 이 곳에서 만여명이 모이는 동녕시조선족운동회가 성대히 열리고 있다. 또한 특색음식, 식품가공공장, 먹자골목인 조선족특색 음식거리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삼차구라는 유래는 3가지 발원설이 있는데 첫 유래는 하남, 신립, 삼차구 3개 마을에서 흘러내리는 강물이 이곳에서 합친다하여 삼차구로 이름 명명하였다는 유래가 있고 두번째 유래는 수분하, 호브트하, 팔자강 세 강이 합쳐서 삼차구로 이름을 명명하였다는 유래가 있다. 세번째로는 마을 서쪽, 남쪽, 북쪽에 큰 대문이 있어 삼차구라 명명하였다는 유래가 있다. 오랜 세월을 거쳐 점차 이 세갈래의 길이 합치기에 마을 이름을 삼차구로 명명하였다는 설도 있다.
한때 전 성 조선족마을중 제일 큰 마을로 이름 나
삼자구촌은 일제시기에 제일 먼저 왔던 제1대 이주호 10여호가 쑥대밭이던 지역에 밭을 일구고 마을을 세웠다고 한다. 그때는 경작지가 모두 한전이였다. 후에 마을이 점점 커졌다가 1945년 쏘련홍군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동북을 해방할 때 마을 사람들이 전부 다른 곳으로 가고 마을은 황폐화 되였다고 한다. 광복직후인 1945년 11월에 상급부문에서는 간부들을 동원하고 사람들을 모아 마을을 재기시켰다고 한다.
원래 조선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라 원래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왔고 새로운 이주호들도 마을에 들어왔다. 수전농사에 미립이 있는 사람들이 몇년간의 노력을 들여 1949년부터 마을에서는 수전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후 마을이 점차 커지면서 마을에 사람이 가장 많을 때인 1980년대에는 마을 상주 가구수가 1300여가구로 인구는 최고로 몇천명에 달해 한때 전 성 조선족촌 중 제일 큰 촌으로 평판받았다.
1952년 마을에 처음으로 조선족학교가 세워졌는데 녕안과 목단강에서 교원들을 모집해왔다. 지금도 삼차구조선족촌에는 삼차구조선족소학교가 있는데 학생이 100명 넘는다. 현재까지 이 마을에 청화대학, 북경대학 대학생 수십명을 배출하였고 중점대학, 본과대학 입학생이 부지기수로 한때는 봉황이 날아예는 보금자리로 이름 떨쳤다.
토지재임대, 기계장비 임대가 마을의 주 수익
촌에는 600여헥타르의 경작지가 있는데 그중 수전이 500헥타르이고 한전이 100여헥타르에 달한다. 한전은 주로 옥수수와 콩으로 알려졌다. 옥수수 수매가격이 높고 원가가 적고 알곡보조금도 높기에 대부분 옥수수를 심는다. 이 마을은 러시아 항구인 울라지보스토크와 150여킬로미터 거리를 두고 있어 해양성기후가 농후하여 북방의 소강남으로 불리우고 있다. 또한 이 마을은 호브트하, 수분하, 팔자강의 합수목으로 수원이 충족하다. 특히 수분하는 왕청현에서 발원, 발원지와의 거리가 200킬로미터 넘기에 수원이 충족하고 수온이 좋아 벼재배에 적합하다. 이 곳에서 생산하는 벼는 오상입쌀 가공공장에 판매하지만 마을에는 2호의 쌀 가공업체가 있다. 이 마을에서 생산하는 쌀은 토종브랜드로 대외에 판매되고 있다.
촌에서 경작지를 다루는 농호는 20여호로 이들이 다루는 면적은 300헥타르이고 가장 많이 다루는 농호는 90헥타르에 달한다. 경작지가 소수 농호에 집중하다보니 전반 농사는 기계화 생산으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벼수확고가 년간 700만근으로 성내외로 널리 판매되고 있다. 하여 전 촌의 재배업 수입은 1360만원 달한다. 2022년 촌집체수입은 159만원, 고정자산은 1147만원, 인구당 수입은 3.2만원으로 집계됐다.
경지를 다루지 않는 농호에서는 헥타르당 1만2천원 가격으로 대외로 임대해주고 있다. 마을에 많은 사람들이 외국이나 기타 도시에 있다보니 이들의 경지는 촌에서 통일적으로 집중시켜 임대해주고 있다.
국경통상구와 변강의 특수를 누리는 마을 사람들
이 마을과 잇닿은 동녕통상구는 1990년에 설립되였다. 통상구를 거쳐 러시아 땅에 들어서면 멀지 않는 곳에 우수리스크가 있다.
마을에서는 통상구를 거쳐 러시아로 향하는 지리적위치를 리용하여 1990년대부터 보따리 장사를 시작하여 꽤 짭짤한 수입을 올리였다. 그 소식을 듣고 러시아장사로 가는 타지방 사람들이 이 마을에 몰려들어 한때 이 마을의 식당이나 상점에서는 장사가 잘 되였고 민박집도 손님들이 밀물처럼 쓸어들었다. 그때 상점의 한달 수입만 하여도 만여원이나 되였다 한다.
지금은 통상구를 거쳐 무역하는 사람들이 마을 중심을 거쳐 가다보니 이들을 상대로 하는 서비스업도 리익을 많이 보는 편이다. 비록 이왕보다 장사를 하는 사람이 적지만 이 마을은 변경지역이기에 촌민들은 달마다 1250원의 변방보조금을 향수한다. 토지보상금도 한사람이 매달 1500원씩 받는데 많이 받는 사람은 1700원씩 받는다.
생태마을 프로젝트로 살기 좋은 동네 만든다
'록수청산은 곧 금산은산'이라는 습근평주석의 향촌진흥리념하에 촌에서는 전반적인 마을공간배치를 조화로운 생태환경조성에 력점을 두고 합리적이고도 색상이 풍부한 경관작물면적을 적절히 확대하였는바, 식수만 1000여그루, 화초 6만그루 재배하였다. 한편 쾌적한 환경마련을 위해 마을도로 건설에 지금까지 100만원의 경비를 투자하여 1만미터의 포장도로를 건설하였고 도로 량옆에는 콩크리트 배수구를 마련하였으며 마을의 가가호호 테두리에는 이쁘게 단장한 담장이나 란간이 세워져 있다. 또한 안전보장을 위한 110개의 가로등과 60여개 감시카메라가 주요도로에 설치돼 있어 마을의 평안을 보장해주고 있다.
하여 이 마을에 들어서면 질서정연한 논밭, 산수초목이 우거진 경관, 전통민속특색이 짙은 청기와 담벽, 밤이면 불빛이 명멸하는 일자형 가도등 및 가로세로 포장도로가 그물망을 이루어 봄, 여름, 가을 절기에는 마치 도연명이 쓴 '도화원기'를 상기하게 된다.
로인들이 장수해야 마을이 지켜진다
한편 이 마을 청년 대부분이 연해지역이나 외국으로 나아가 있어 촌에는 로인들이 주로 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형편이다. 하여 촌에서는 로인협회에 아낌없는 지원과 성원을 다하고 있다.
이 마을 로인협회에 따르면 1984년에 설립, 당시 협회 회원이 200명이나 되였다고 한다. 현재는 70명좌우 남아있으며 주로 문구, 학습, 마작, 문예경연을 조직하여 만년 즐겁게 보내고 있다고 소개한다.
로인들의 만년을 즐겁게 하기 일환으로 촌에서는 5헥타르 경지를 주어 협회의 경비로 쓰게 하는 한편 매년 촌에서 2만여원을 지원하여 다양한 활동으로 만년건강을 기원했다. 아울러 로인협회에서는 매년 촌지도부를 도와 가로수, 배수구, 마을록화 등 마을 건설에 동참하고 있다. 하여 동녕시로부터 행복가원이라는 단위로 선정되였다. 10월 5일인 중양절이면 로인들을 위한 각종 취미의 대형 활동을 조직하고 조선족 전통항목인 윷놀이 등 행사도 다채롭게 조직하고 있다.
토지임대, 민속관광, 기계임대, 로무수출 등 다양한 형식의 경제활동을 통하여 치부의 길을 열어가는 삼차구촌에서는 근년에는 또 중앙의 홍색마을프로젝트에 힘입어 마을에 항일영웅당성교육관, 단산자공산국제비밀통로, 다기능주체의 전통민속촌을 꾸리여 년간 7000여명의 방문객을 맞이해 상가수입을 10만원 올리게 하는 등 쾌재를 맛보고 있다. 현재 태양광발전프로젝트를 추진중에 있으며 분포식 태양광발전시스템 건설로 '성급 생태촌' 등 여러가지 영예를 한몸에 지니고 있다. 살기좋은 동네, 로인들이 만수무강하는 마을, 행복지수가 높은 동네, 자연의 청정과 현대가 아우르는 무릉도원을 건설하는 것이 목표라는 삼차구촌 김이남 서기는 지난 한해 막대한 홍수피해속에서도 마을 재건에 오늘도 힘차게 노력을 몰붓고 있다.
/김동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