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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가 차광범, 우리의 력사와 문화를 기록하다

길림성촬영가협회와 연변주문련 부주석, 연변촬영가협회 주석

2023-01-09 12:09:14

연변촬영가협회는 1965년에 설립된 이래 당의 문예방침과 정책을 참답게 관철, 집행함과 아울러 주선률에 맞춰 지역문화 및 경제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개혁개방 이후 용솟음쳐나온 젊은 우수한 촬영가들은 사진기로써 점점멀어져가는 민족사의 발자취를 기록, 정리하고 침략자들의 피비린 죄악의 흔적들을 찾아 력사자료로 남기는 등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사회주의현대화건설의 놀라운 성과와 고향의 변화, 백성들의 행복한 삶 등을 렌즈에 담아냈다. 그중에는 저명한 촬영가 차광범도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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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광범

새집과 바꾼 고급 사진기, 그리고 '정정사진관'

그는 1967년 룡정현 동성용향 차씨가문 3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여났다. 중학교시절부터 물리, 수학, 화학 등 성적이 뛰여났던걸 보면 남달리 총명하고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였음이 틀림없다. 그는 한차례 물리수업에서 핀홀이미징원리(针孔成像原理)에 의해 사진기가 발명되였다는 강의를 들으면서 사진기에 대한 집착을 가졌다. 장난감사진기라도 그렇게 욕심나서 형과 돈을 꾼 적도 많았고, 서점에 가서 '촬영기초지식'을 필사하며 독학을 견지하기도 했다. 보온병을 거꾸로 세워 만든 사진확대기를 만지며 사진기에 대한 애착을 키워왔고 필림을 현상한답시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조작해 약물에 이불이 엉망되기도 했다. 1983년, 그는 16살 어린 나이에 중국촬영가협회 연변분회에 가입했다. 촬영에 대한 거침없는 열정과 남다른 애착으로 이룩한 첫 쾌거였다.

그후 1985년 차광범은 제1기 중국촬영통신학원에 입학하게 되였다. 그는 리론과 실천을 결합시켜 '송화강'에 '꽃봉오리', 중국향진기업신문에 '로인' 등을 발표했으며 그후 연변예술학원 미술사범전업에 입학해서도 촬영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1989년 12월, 한국 월간잡지 '사진예술'에서 주최한 전시회에 작품 '시집 가는 날'을 출품하여 금상을 수상했고 1990년 4월 '천애컵'국제서법, 미술, 촬영 콩클에서 작품 '무제'로 1등상을 받기도 했다.

1991년, 고향에 돌아온 차광범은 룡정시문화관 전업촬영가의 꿈을 마침내 실현했지만 현실에 만족할 수 없어 북경영화학원 양소리 교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흑백사진촬영특별연수반에서 지식을 련마했다. 깊이 있는 리론학습과 실천활동을 거쳐 창작된 그의 흑백사진들은 질감과 표현형식이 남달랐고 독특한 예술풍격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고 했던가. 그는 점차 자신만의 촬영철학을 키워가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부모가 아들내외를 오붓이 살라고 장만해준 새집도 팔아 독일제 하수-120형 고급 사진기를 마련하는 놀라운 일을 저지르기도 했고 1997년에는 어려서부터 꿈꿔온 촬영사업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사직하고 정정사진관을 꾸리기로 마음 먹었다. 그해가 1997년이였다. 간고한 창업의 길을 걸으면서도 그는 촬영작품 창작을 한시도놓은 적이 없었다. 특히 민족이주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기록자의 자세로 연변은 물론 동북3성 조선족거주지를 찾아다니며 열심히 셔터를 눌러댔다…

력사와 문화의 기록자

천리두만강은 장백의 천지물에서 발원하여 민족의 젖줄기로 흘러 바다에 이른다. 중조 량국의 경계하로서 두만강은 마치 긴 두루마기마냥 력사의 세파 속에서 무수한 이야기를 하는 듯 싶다.

조선족 이주사는 대개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시작되였고 우리 조상들은 조선반도에서 이주해와 주로 동북에 생활의 보금자리를 잡았다. 고단하면서도 풍진 한세기를 기적처럼 살아낸 우리 조상들은 이 땅에서 손을 뻗고 발을 동동 구르며 길을 닦아 황무지를 개척하는 동시에 중화 대가족의 품에 융합되였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도 20세기 20년대에 어린 큰 아버지를 데리고 조선의 함경북도에서 두만강을 건너 길림성 룡정시 동성용진에 와서 정착했다. 나의 아버지와 나도 모두 동성용진 태생이다. 촬영가로서 나는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소박하면서도 평범한 실화사진으로써 력사와 문화, 고향강산을 기록하련다."

실제로 보호와 전승 의식이 날로 약해지고 우리의 민속건축, 생활습성, 풍토와 인정을 포함한 조선족 전통문화가 정도부동한 침체기에 부딪친 현재, 관련 사진자료들을 수집하는 것은 시급한 일이다. 이에 비추어 차광범은 2001년부터 2010년까지 집중적인 조사 및 촬영에 매진했다. 그는 연변주의 8개 현시와 35개 향진, 100여개 촌에 중점을 두고 전면적인 '융단식'촬영을 진행하며 총 600여명의 이민 로인들을 인터뷰했으며 10여만장의 영상자료와 현장 원음 록음 및 록화 자료를 수집했다. 그는 최대한 자연광을 리용하여 촬영했으며 자연스러움을 위해 대화 시 정면으로 마주보는 기법을 채택했다고 한다. 인터뷰대상들과 수많은 대화를 나누던 중 그는 자신도 이미 그들과 같은 숨결,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겨레임을 느꼈단다. 다년간의 이러한 노력으로 차광범은 '마지막 위안부', '행존로병', '백년룡정', '이주 1세대', '명동와의 기억', '초가집 기억' 등 서로 다른 계렬의 조선족 력사 문화 특히 항일전쟁 유적과 력사를 반영한 촬영작품을 속속 정리해냈다.

작품 '백성'과 '마지막 위안부'는 각각 2005년과 2016년에 자치주정부 진달래문예상을 받았고 '새 마을 도안'은 개혁개방 40년래 향촌생활의 새로운 변화와 빈곤퇴치에서 이룩한 성과를 주제로 제작된 장권의 촬영작품으로 2021년에 길림성 제24회촬영예술전람에서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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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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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권작품 '새마을 도안' 국부

특히 작품 '행존로병'을 촬영하기 위해 차광범은 30여년간 발품을 팔아가며 연변 8개 현시의 로병 120여명을 한 사람 한 사람씩 찾아 렌즈에 담았다. 그후 부동한 표정, 부동한 자세로 된 인물들을 부동한 크기, 부동한 위치에 배치하여 30여미터 되는 장권(长卷)의 대형 예술사진으로 제작해냈다. 이 작품으로 그는 2017년 10월에 길림성당대촬영예술전에서 최우수촬영사상을 받았다. 이런 대형 사진 제작은 연변촬영가협회 설립 60여년래 처음 창발된 것이며 길림성에서도 처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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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권 작품을 보여주고 있는 차광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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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렬작품 '행존로병' 일부

'명동와의 기억'에 대해

창작과정에서의 가장 중요한 경력이라면 바로 명동와에 대한 발견, 발굴과 기록(2000~2015년)이였다. 명동촌은 룡정시 동남부에 위치하고 시내에서 14.5킬로미터 떨어져있다. 1899년에 조선 종성의 개명신사 김약연 등이 해란강 지류인 륙도강반에 와서 비둘기 알갱이산 아래에 명동촌을 세웠다. 그들은 스스로 토기와를 만들어 집을 짓고 륙도강변 소룡동에 기와공장도 세웠다. 민족사학자들은 이 기와를 마을의 이름을 따 명동기와라고 부른다. 그들이 생산한 기와 조각과 와당은 무늬가 독특하여 전통적인 장식성과 예술성을 갖고 있었다. 그외 그들은 자신의 사상과 대사기를 기와 모형에 새겨 인쇄하기도 하였다. 명동촌에서 발견된 기와에는 '중화민국 2년(1913)'과 '중화민국 3년'이란 문구가 새겨져있는데 이를 간민회가 추진하는 '귀화운동'과 결부해 분석한 결과 기와를 만든 시간은 간민회가 설립된 1913년과 간민회가 해산된1914년이였다. 글자의 내용은 그들이 귀화할 때의 '중화민국'의 년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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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와의 기억' 일부

1904년 러일전쟁 후 잔인한 일제는 연변에 대한 침략의 보폭을 가속화했다. 20세기, 일본침략을 받았을 때 조선족들은 움츠러들지 않고 용감히 적과 맞서 고향을 지키고 중화민족의 독립해방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연변이란 땅은 오래된 항일근거지이자 동북항일련군 제2군의 주요 활동지대로 수많은 혁명, 전투 유적지를 남겼다. 한편 이는 조선족 반일활동의 가장 진실한 묘사이다. 당시 김약연 등은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중화민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조선족 교육과 반일민족운동을 진행했는데 이런 정치의식과 실천을 바로 기와 제작 기술에 침투시켰다. 귀화한 조선인들은 자신을 중국의 일원으로, 명동촌을 제2고향으로 여기며 현지 각 민족 형제들과 함께 분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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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사진

강을 건넌 조상들은 농경문화를 일구면서 촌락을 형성해 삶을 영위해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그들은 교육을 중시하는 전통을 계승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민속문화의 맥을 이어가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한 일로 간직했다. 농경민족에게 있어 소는 생명보다도 더 귀중한 존재였을테지만 자식교육에 있어서는 그런 소라도 팔 수 있는 민족이 바로 우리 민족이다. 명동학교 남쪽 기와집에서 '신민'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된 것은 당시 조선족이 서당 개량과 민족교육에 힘 썼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명동지역에 첫 서당이 생긴 것은 20세기의 두번째 봄. 1908년 4월 27일에 그들은 신식 교육을 실시하는 '명동서당'을 창립했고 김약연이 서당장을 맡았으며 이듬해 4월 사립명동학교로 개칭해 1910년에는 중학부도 증설했다. 교수 취지는 배일(排日)민족 독립의식을 가진 인재를 양성하고 학생들에게 근대문화 지식을 가르치며 현대 과학지식과 반일민족 해방사상을 가진 '신민'을 양성하는 데 노력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그리고 일본 파쇼노예화 통치시기, 조선족은 조용히 명동와에 우리글 '복', '수' 등 문자를 새겼다. 이렇듯 명동와는 바람을 막고 비를 막는 건축자재인뿐만 아니라 명동촌의 력사문화 활동을 리해하고 연구하는 문물로 민족 문화 및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다.

"촬영과정에서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은 적극적으로 생활에 직면하고 변화많은 주변환경에도 잘 적응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느꼈다. 타지역과 기타 나라에로 이주한 조선족과 비교하면 우리의 전통문화 보존상태는 상대적으로 량호하다. 문화는 한 민족, 한 국가의 발전을 추진하는 저력이다. 우리는 마땅히 중화민족공동체 의식으로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기 위한 촬영창작을 견지해야 한다."

차광범에게 촬영이란 사람과 사회를 기록하는 경건한 일이였다. 사진 한장이 갖는 의미는 깊으며 독특하다. 차광범, 그가 기록하는 것은 우리 공동의 기억이자 기록이며 그속에서 우리는 그때 그시기 사람들의 록록치 않은 삶과 력사적 이야기를 다시 만날 수 있다. 먼지가 쌓여 잊힐법도 한 지난 세월을 담는 차광범의 필림은 또 어떤 력사를 기록할지, 그의 사진들은 한부 실화드라마마냥, 한편 장편서사시마냥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고있다…

/류설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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