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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년만에 이룬 꿈- 91세에 입당한 할빈사대 리보영 부교수

2021-06-23 14:30:00

지난 5월27일, 할빈사범대학 퇴직일군외국어학원당지부 회의실에서 한 할머니가 챙챙한 목소리로 당기앞에서 장엄하게 선서를 했다.

"나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기를 지원합니다. 나는 당의 강령을 지지하고, 당헌을 준수하며 당원으로서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또한 당의 결정을 따르고, 당 규률을 엄격히 준수하겠습니다. 당의 비밀을 보호하고, 당에 충성하며 열정적으로 일하겠습니다. 나는 공산주의를 위해 일생을 분투하고, 언제든 당과 인민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으며 영원토록 당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선서인-리보영" 그가 바로 17세에 공산주의 신앙을 접하고 파란만장한 세월을 거치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중국공산당 창건 100주년을 맞아 75년만에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원에 입당하는 꿈을 이룩한 할빈사범대학의 91세고령의 리보영부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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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할빈사범대학 동방언어학원 왕기(王淇)원장의 소개로 할빈 송화강변에 위치한 리보영할머니의 자택을 찾았을때 그는 한창 '중국공산당간사'(中国共产党简史)를 읽고 있었다. 큰아들인 김광일씨 내외와 함께 살고 있다는 리보영부교수는 91세 고령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귀도 밝고 목소리도 챙챙했으며 건강상태도 량호해 보였다. 매일 독서를 하고 서예를 하며 규칙적인 식생활과 간단한 운동을 견지하고 있다는 그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직도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 80여년전의 일들도 어제 일 처럼 술술 이야기하는 그의 매력에 우리는 금방 빠져버렸다. 

리보영은 1930년 2월14일 생으로 서울의 한 대가족의 3자매중 둘째딸로 태여났다. 하지만 9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3세에 아버지를 여의면서 친척집을 전전하게 되였다. 양아버지인 박종만선생(한국 제2대 문교부차관)의 도움으로 공주녀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47년 청주녀자상과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했으나 공산주의를 지향한다는 리유로 홍색분자로 락인찍혀 퇴학을 당했다. 모교인 서울효제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던중 동료들을 이끌고 교장의 비리에 맞서 싸우다 좌익분자로 찍혀 방출, 서울동대문국민학교에서 다시 교단에 섰다. 1950년 6월25일 조선전쟁이 일어나자 그를 데리고 남으로 피난을 떠나려는 양아버지의 권유를 거절하고 자신의 신앙을 지켜 서울에 남았다. 그때 당시 후날 남편이 된 김영명씨를 만났다. 9월30일,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철수하는 조선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철수, 11월 부상당한 김영명씨와 함께 중국에 도착, 김영명씨의 고향인 흑룡강성 수화현 장유촌에서 간소한 결혼식을 올렸다. 수화현 태평촌조선소학교에서 교사로 있다가 1952년 남편을 따라 할빈으로 이주했다. 

조교(朝侨)신분이였고 여러 정치투쟁을 겪으며 한때 '조선특무'로 몰렸던 리보영은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신심을 잃지 않고 여러 공장을 전전하며 남편과 아들 둘의 뒤바라지를 견지하였다. 전쟁부상의 후유증으로 남편의 신체는 허약했으며 아이들도 정치투쟁을 받는 부모들의 영향으로 한때 방황했다. 건강에 좋다는 약과 음식을 구해 남편을 극진히 공대하였으며 애들도 아무리 힘들어도 역경을 이겨내는 법을 알아야 한다며 엄격하게 교육한덕에 큰 아들 김광일씨와 작은 아들 김광호씨 모두 어엿한 대학생으로 성장하였으며 일본 류학을 마치고 자신의 일터에서 훌륭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당과 정부에 대한 굳은 믿음에 대한 보상이라고 할까 1976년 그의 정치문제도 해결되여 공직을 회복하였다. 1977년 할빈사범대학의 일본어교원 초빙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한 리보영은 오매불망 그리던 교단에 다시 서게 되였다. 1979년 혁명적동지이자 영욕의 세월을 함께 견뎌온 남편 김영명씨를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보냈다. 전쟁의 포화속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한국, 조선, 중국을 전전했던 그들 부부였기에 당시 리보영의 마음은 무척 아팠다. 하지만 비통을 힘으로 바꾸어 어렵게 얻은 교직에 충성하며 더욱 사업에 매진했다. 

비록 대학시험이 회복된후 입학한 첫기의 대학생이라고는 하지만 정치운동을 중시하고 학문에 뒤전이였던 시대를 거친탓에 대부분 학업기초가 낮았으며 더우기 일본어기초는 형편없었다. 히라가나, 가다가나 같은 기초문자나 대충 알고 있는 백지장같은 당시 대학생들의 일본어수준을 제고시키기 위해 리보영은 맞춤형교안을 짜서 학생들이 알기쉽게 문법, 정독을 강의했다. 또한 일본어써클을 조직해 학생들의 일본어회화수준도 크게 제고시켜주었다. 1982년 할빈사범대학 일본어학부 졸업생 하치빈은 리보영선생님은 당시 학생들에게 선생님이 아니라 엄마같은 존재였다며 평소 학생들의 생활을 관심하고 한없이 인자하시지만 학문에 대해선 엄격했다고 밝혔다. 대학을 졸업하고 후날 함께 사업했던 그는 은사의 사업태도, 동료애 등에 감동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할빈사범대학에서 당시 선진적인 시청각설비를 유치했지만 사용할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리보영은 주동적으로 이를 맡아 밤을 새가며 40여만자에 달한 록음영상교재를 편찬해 할빈사대의 일본어교수의 공백을 메웠으며 전국적으로 20여개 대학에서 이 교재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불타는 학구열로 수업이 없는 날이면 학교도서관에서 살다 싶이 했다. 당시 할빈사대 도서관 직원은 전체 학생과 교사를 막론하고 도서관리용률 1위, 독서량 1위, 도서대여량 1위는 리보영선생님이라고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일본어수업에서 거둔 뛰어난 성적과 기여로 1987년 리보영은 일본어학과 부교수직함을 취득했다. 당시 직함체제하에 일본어학과의 정교수가 없었던 정황에서 부교수는 최고수준의 상징이였다. 후날 당시 할빈사대 교장을 담임했던 서국림은 “리선생님 미안합니다. 정교수급인재인 당신에게 합당한 대우를 드리지 못한 것은 저의 유감이고 실책입니다” 라며 사과를 했다. 그는 업무에서뿐만 아니라 고상한 품성을 소유해 늘 주변의 존경을 받았다. 평소 생활상 검소했던 그였지만 남들을 돕는데는 종래로 린색하지 않았다. 불우학생을 지원해 공부를 시켰으며 그들이 자립할수 있도록 신심을 주었다. 재직기간 그는 여러차례 우수교사의 영예를 받아안았다. 

1983년 한국KBS라디오방송의 리산가족찾기 방송프로인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를 통해 미국에 있는 동생들을 찾게 되였다. 전쟁속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언니, 누님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은 동생들은 그를 미국으로 초청했다. 1986년 4월, 조교의 신분으로 미국비자를 받은 첫 사람으로 그는 미국방문길에 올라 헤여진지 36년만에 동생들을 만났다. 우월한 환경과 대우로 미국에 남아 함께 생활하자는 동생들의 권유를 물리치고 그는 중국으로 돌아왔다. 1987년 57세에 중국국적을 취득하게 되였다. 1990년 정년퇴직을 하고도 그는 학교의 요구에 응해 1년간 수업을 견지했다. 퇴직해서도 그의 도전은 계속되였다. 외국려행에 대한 감수를 적은 수필을 쓰고 사진촬영을 하였으며 서예공부를 견지했다. 그리고 80세가 넘어서'노도시대의 회억록'  이란 일본어 자서전을 집필했다. 지난5월7일, 할빈사범대학 개교 70주년 기념활동때 일본어학부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다채로운 '마지막 수업'을 진행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중국, 미국, 한국, 일본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취미생활을 즐기며 행복한 만년생활을 즐기고 있었지만 리보영할머니의 마음속엔 늘 유감이 있었다. “공산당의 영명한 령도가 있었기에 새 중국이 있을수 있었고 당과 정부의 따뜻한 관심으로 오늘날의 내가 있을수 있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오던 그는 17세때부터 가져왔던 공산주의 신앙을 저버릴수 없었다. 그는 한자한자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정성들여 쓴 입당지원서를 당조직에 바쳤다. 할빈사범대학 동방언어학원 왕기원장, 안요림당위서기는 리보영선생님의 사명감과 책임감은 모든 사생들의 본보기이고 그의 스승으로서의 도덕품성을 전승해가야 한다며 적극 지지해 나섰다. 

당조직의 배려와 관심으로 올해 5월27일 리보영할머니는 75년만에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는 꿈을 이루게 되였다. 습근평 새 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사상의 지도하에 날로 번영창성하는 중국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그는 중국공산당 창건 100주년 생일에 바치는 “백년의 비바람속에도 초심을 잊지 않네 일로를 굳게 지켜 본색을 영원히 간직하리 서로를 굳게 지켜 미래의 꿈을 쫓아가네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분투를 멈추지 않으리 ” 라는 시를 적었다. 

최근 리보영할머니를 위문한 할빈사범대학 신보충당위서기는 모진 풍상고초를 겪으면서도 당과 정부에 대한 믿음을 견지해온 리보영선생님은 ‘새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며 그의 정신과 꿈에 대한 열망은 리보영선생님 본인뿐만아니라 할빈사대의 귀중한 정신적자산으로서 모두가 따라배워야 할 본보기라고 강조했다.  

/진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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